지배구조 내부규범 개정해 최고경영자 자격요건 추가
‘이사회가 인정하는 자’ 자의적 해석 가능한 문구 삽입
19년차 금융권 초장수 CEO…혁신 선보였지만 힘 부쳐
임기 만료까지 3년…입지 다질 묘수는 마이데이터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 (사진제공=현대카드 뉴스룸)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 (사진제공=현대카드 뉴스룸)

[스페셜경제=윤성균 기자 현대카드가 최근 최고경영자(CEO)의 자격요건을 변경했다. CEO를 금융업 경력자로 제한했던 것을 비금융업 경력자도 CEO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자격요건을 완화한 것이다.

현대카드의 기존 지배구조 내부규범 ‘제43조 적극적 자격요건’에서는 최고경영자 자격을 ‘금융업 또는 계열회사 부서장 이상의 지위로 5년 이상 근무한 자’나 ‘금융업 또는 계열회사 경영진 또는 그에 준하는 직급으로 3년 이상 활동한 자’로 정하고 있었다.

이번 개정을 통해 ‘회사의 경영진 또는 그에 준하는 경험을 가진 자로서, 이사회가 최고경영자로서의 충분한 자질과 능력을 갖추었다고 인정하는 자’라는 요건이 추가됐다. 금융사 경력이 없더라도 이사회가 인정하면 최고경영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수차례 지배구조 내부규범 손봐

현대카드가 지배구조 내부규범에서 최고경영자 선정 관련 항목을 개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18년 9월 지배구조내부규범 개정에서는 ‘제24조 임원후보추천위원회’에서 규정한 대표이사 선임을 위해 필요한 경우 각 이사는 임원후보추천위원회에 후보군에 속하지 않는 자를 대표이사 후보로 제안할 수 있으며, 임원후보추천위원회는 이사로부터 제안 받은 자를 후보로 추천할 수 있도록 했다.

2019년 1월에는 ‘제44조 후보자 선정 및 관리’를 개정해 임원후보추천위원회는 후보군 검토시, 최고경영자 후보 추천 및 경영승계 절차의 적정성도 함께 검토하도록 정했다.

2019년 12월 개정에서는 ‘제47조 최고경영자의 역할 등’에서 차기 최고경영자 후보 육성을 위한 노력을 추가했다.

일련의 지배구조내부규정 개정을 살펴보면, 대체로 CEO의 문턱을 낮추고, 현 CEO 및 이사가 차기 CEO 선정에 어느 정도 개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현대카드 지배구조내부규범 최고경영자 관련 주요 개정 내역 (제작=스페셜경제)
현대카드 지배구조내부규범 최고경영자 관련 주요 개정 내역 (제작=스페셜경제)

 

CEO 선발 투명성 악화 우려도

현대카드의 이러한 개정의 방향은 금융사가 지배구조내부규범을 정해 CEO 자격요건과 승계 프로그램을 마련해 엄격하게 관리하도록 한 당초 취지를 무력화할 여지가 있다.

현행의 지배구조내부규범은 금융당국이 2014년 12월 제정한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에 근간을 두고 있다. 모범규준은 은행 및 은행지주사 이사회와 사외이사의 역할과 책임을 강화하는 한편, 최고경영자 승계 프로그램을 마련해 CEO 리스크를 차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후 2015년 7월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금융회사지배구조법)’이 제정되면서 적용 대상이 다른 업종의 금융사로까지 넓혀졌다.

모범규준은 금융사가 내부규범에 CEO의 최소 자격요건과 후보자 추천절차 등을 반드시 포함하도록 정하고 있다. 금융산업 전문성이 부족한 인사가 낙하산 CEO로 선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개정되기 전의 현대카드 내부규범은 이러한 목적에 어느정도 부합했다. 금융업 종사 경력 및 이와 유사한 경력에 대해 계량적 평가 기준이 적용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개정을 통해 ‘이사회가 최고경영자로서의 충분한 자질과 능력을 갖추었다고 인정하는 자’로 예외적인 규정을 둔 것이다.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다 점에서 CEO 선발의 투명성을 저해할 수 있는 조항이다.

이에 대해 현대카드 관계자는 “1, 2항의 내용과 달리 표면적으로 금융업에 종사하지 않은 사람도 CEO가 될 수 있는 구조가 된 것은 맞다”면서도 “CEO 자격요건이 완화됐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내부규범 중 임원추천위원회에서 CEO를 어떻게 결정하는지 부가항목들이 있고 추천 후보에 대한 풀도 관리되고 있어 최대한 공정성을 기할 수 있도록 돼 있다”며 “검증 과정 없이 아무나 쉽게 CEO가 될 수 있는 그런 구조는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혁신의 옵션 차단해선 안돼”

현대카드 CEO 자격 요건이 논란이 되자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이 직접 입장을 밝혔다. 정 부회장은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금융사는 금융인만, 테크기업은 엔지니어만, 언론사는 언론인만, 대학학장은 교수만, 패션기업은 디자이너만 대표가 가능하다면 무경계, 혁신의 시대에 맞는 원칙일까?”라며 “물론 업을 실수 없이 잘 관리할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혁신의 옵션을 차단해 놓을 필요가 있나?”라고 되물었다.

정태영 부회장 페이스북
정태영 부회장 페이스북

 

그러면서 소위 ‘전문가 CEO’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정 부회장은 “나는 항상 전문가라는 단어에 저항감이 있다. 전문가라함은 업을 이해한다는 것일 뿐 미래를 연다거나 하는 것과 큰 관련성이 없다”며 “일런 머스크는 자동차 전문가가, 제프 베이조스는 유통전문가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일런 머스크는 대학에서 물리학과 경제학을 복수전공했지만 현재 세계 최대 전기자동차 기업인 테슬라의 CEO를 역임하고 있다. 아마존닷컴의 창업자인 제프 베이조스는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프로그래머 출신이다. CEO가 특정 분야의 전문가거나 해당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이들로 한정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현대카드 관계자도 “디지털·모빌리티 등 새로운 방향성에 대해서 계속 고민하는 회사다 보니 단순히 금융이라는 형태로 회사를 정의하고 있지 않다”며 “디지털·데이터 기업으로서 혁신을 추구하다 보니 그런 방향성이 CEO 자격요건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 부회장, 업계 혁신 주도

카드업계에서 현대카드가 가장 ‘혁신’이란 단어와 잘 어울리는 기업이라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정태영 부회장은 2003년 현대카드와 현대캐피탈 사장에 선임되면서 당시로서는 생소한 ‘디자인 경영’, ‘문화 마케팅’ 등 경영기법으로 새바람을 일으켰다. 당시 포인트 마케팅과 차별화된 혜택을 선보인 ‘현대카드M’은 출시 후 1년 만에 회원 100만명을 돌파했고, 신용카드 단일 브랜드로는 국내 최대 규모인 800만여명이 가입했다. 2008년 세계적 디자이너인 ‘카림 라시드’를 기용해 카드 플레이트 디자인을 맡겨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2015년 현대카드가 국내 처음 선보인 PLCC(상업자 표시 신용카드)는 현대카드의 참신함과 혁신성을 대표하는 상품이다. 일반 제휴 카드가 카드사의 브랜드에 제휴사의 혜택을 추가하는 형태였다면, PLCC는 협업 기업의 브랜드를 카드 전면에 내세워 해당 브랜드에 특화된 혜택과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다. 현대카드는 2015년 이마트를 시작으로 현대·기아차, 이베이, 코스트코, SSG닷컴, 대한항공, 스타벅스, 배달의민족 등 유력 업체와 협업 관계를 맺어 왔다. 최근에는 네이버와 PLCC 출시를 위한 파트너십 계약을 체결해 업계의 눈길을 끌었다.

지난달 1일 진행된 네이버와의 협약식은 현대카드식 혁신을 잘보여주는 사례다. 이날 협약식이 진행된 서울 용산구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는 원래 공연이 열리는 콘서트홀이다. 정태영 부회장과 한성숙 네이버 대표는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 섰고, 업무협약 현수막 대신 네이버와 현대카드 로고가 무대를 꽉 채웠다. 두 기업의 협약식이 하나의 이벤트로 기획·전시된 것이다. 스타벅스와 협약식을 할 때는 정 부회장과 송호섭 스타벅스커피 코리아 대표가 만나 직접 커피를 내려 마셨고, 배달의민족과의 협약식에서는 정 부회장과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의장이 민트색 헬멧을 쓰고 함께 기념 사진을 찍는 식이다.

네이버-현대카드 업무협약식에 참여한 정태영 부회장과 한성숙 네이버 대표 (사진제공=현대카드 뉴스룸)
네이버-현대카드 업무협약식에 참여한 정태영 부회장과 한성숙 네이버 대표 (사진제공=현대카드 뉴스룸)

 

성장 동력 떨어진 현대카드

현대카드의 이러한 마케팅 방식은 보수적인 성격이 강한 기존 금융사와 확실히 구별되지만, 실속 없는 이미지마케팅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실제로 최근 현대카드 실적은 답보상태다. 지난해 3분기 개인·법인 신용카드 일시불·할부 취급액 기준 시장점유율을 살펴보면, 현대카드는 16.31%로 4위에 머물렀다. 신한카드(21.25%)·삼성카드(18.3%)·KB국민카드17.64%) 등 톱3와의 시장 점유율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현대카드는 2017년 KB국민카드에 3위 자리를 내준 이래 좀처럼 격차를 줄이지 못하고 있다.

현대카드는 모기업인 현대차의 판매부진으로 동반침체를 겪고 있다. 매출에서 현대·기아차 판매에 지나치게 의존해 왔기 때문이다. 지난 2018년 현대라이프생명이 부실 경영 끝에 대만의 푸본생명에 최대주주 자리를 넘겨주게 됐을 때는 정 부회장의 교체설까지 불거졌다. 금융사CEO로서 경영능력에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푸본현대생명(옛 현대라이프생명)은 인수 직후 흑자전환한 데 이어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마이데이터 사업으로 입지 다질까

이런 상황에서도 정 부회장은 지난해 말 현대차그룹 정기임원 인사에서 유임이 결정됐다. 임기는 오는 2024년까지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체제가 본격되면서 부회장단이 축소되는 등 세대교체가 진행되고 있지만 매형인 정 부회장은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남은 임기동안에도 그룹의 지배구조 개편 움직임은 계속될 것이고, 정 부회장은 나름의 생존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지배구조내부규범 개정도 그 일환이라는 게 전문가의 분석이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카드업계는 카드 수수료 하나가지고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다”며 “4차산업혁명으로 블록체인이나 QR코드 등 다양한 지급결제수단이 등장하면서 카드업계도 수익원을 다양화하기 위해서 여러 분야의 전문가를 불러들일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필요하다면 디지털이나 블록체인 전문가가 카드사 CEO가 될 수 있는 옵션을 열어뒀다는 설명이다.

다만, 실제로 외부의 전문가가 CEO에 오를 가능성은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김 교수는 “내부규범에 CEO 자격요건을 추가한 것은 외부 인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현 경영진의 경영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의도로 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정 부회장은 현대카드·현대캐피탈·현대커머셜 CEO 경력을 제외하면 전문금융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기존 자격 요건도 금융사 경력이 아닌 현대그룹 계열사 근무경력을 인정받아 자격 요건을 충족한 케이스다. 이번 개정으로 ‘이사회가 인정하는 자’라는 요건이 추가되면서 입지가 강화된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정 부회장은 자신의 입지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향후 3년 동안 새 먹거리를 발굴해야 하는 숙제를 풀어야 한다. 현재 현대카드를 비롯해 현대캐피탈이 본인신용정보관리업(마이데이터 사업) 본허가를 받은 상태다. 마이데이터 사업이 시행되면 각 금융기관에 흩어진 각종 신용정보를 바탕으로 개인에게 가장 적합한 맞춤형 상품과 서비스를 추천할 수 있게 된다. 정 부회장이 공들여온 ‘PLCC 동맹’을 기반으로 한 마케팅 협업도 가능하게 된다.

재계 한 관계자는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을 앞두고 셈법이 복잡하다”며 “지주사 전환을 통한 금융계열사 독립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정 부회장은 그룹내 입지를 다질 묘수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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