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 국, 반도체 자급 올인…공격적 투자
깊어진 미·중…노골적으로 양자택일 종용
정부 '지원' 내밀며 “고용·투자 최대한 해달라”
업계 “구체적 대책 아쉬워…기업 부담 늘 수도”

반도체 칩셋 관련 이미지 (사진=게티이미지 뱅크)
반도체 칩셋 관련 이미지 (사진=게티이미지 뱅크)

[스페셜경제=변윤재 기자] “반도체 산업은 우리 경제의 현재와 미래가 걸린 핵심 국가전략 사업이다. 세계 1위를 지키고 격차를 벌리기 위한 다각도의 지원 방안을 수립하겠다” (문재인 대통령, 15일 확대경제장관회의에서)

K반도체가 제3의 길을 통해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까. 정부는 반도체 산업을 “핵심 국가전략산업”으로 규정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미국처럼 반도체 해법을 ‘국가적 사안’으로 접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를 위해 규제 완화, 세제 지원, 전문 인력 양성 등을 추진하고 특별법 제정도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업계의 분위기는 미묘하다. 문 대통령의 임기가 1년여 밖에 남지 않은데다 정부의 대책도 원론적 수준에 그쳤기 때문이다. 특히 특별법을 통해 총력 지원을 한다고 했지만, 임기 말 레임덕 속에서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정부는 반도체 산업 육성책을 당근으로 내밀면서 어김없이 ‘투자와 고용’을 꺼냈다. 전 세계가 반도체 자급화를 목표로 대대적인 투자를 벌이는 데 맞써 고군분투해 온 기업들의 부담만 더욱 늘었다.

미국도 중국도 유럽도 ‘쩐의 전쟁’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는 국내 반도체 업계에 기회이자 위기가 됐다. 비대면 문화가 일상이 되고, 원격수업·재택근무·화상회의 등을 위해 노트북·태블릿 등 IT 기기 수요가 늘어나면서 반도체 업계는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지난해 영업이익을 보면,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은 18조8100억원, SK하이닉스는 5조126억원을 기록했다. 삼성전자의 경우, 반도체가 절반 이상의 수익을 책임지면서 2017~2018년 반도체 초호황기에 못지 않은 성적을 달성했다. SK하이닉스 역시 메모리 반도체의 선전으로 젼년 대비 이익이 84%나 급증했다. 

그러나 코로나19 확산세에 따라 국경 봉쇄와 생산기지 폐쇄 등이 잇따르면서 전 세계는 반도체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여기에 지진, 한파 등과 같은 재해가 겹치면서 반도체 확보는 최우선 과제가 됐다.

비단 반도체는 스마트폰·노트북과 같은 고사양 IT 기기에만 들어가는 게 아니다. 어린이용 장난감부터 데이터센터까지 전자식 제어가 필요한 곳이라면 필수적으로 탑재된다. ‘국가 인프라’라는 말이 나온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반도체 생산기지의 상당수가 아시아권에 집중돼 있다. 자국 내 반도체 생산망을 구축해 안정적인 공급을 확보려는 움직임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더욱이 4차 산업혁명 이후 반도체 기술력 확보는 좁게는 ICT, 넓게는 세계 산업계에서 주도권을 가짐을 의미한다. 

이에 자국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편하려는 각 국의 움직임이 자못 공격적이다. 미국은 지난해 반도체 지원법을 제정했다. 총 지원규모만 220억달러(약 24조6000억원)다. 반도체 설비 투자 비용의 40%를 세액 공제해주고, 반도체 생산기지를 건설하면 연방 지원금을 추가로 지급한다. 반도체 인력 양성, 연구개발(R&D) 비용도 지원한다. 올해 추가로 500억달러(약 56조원) 투자안을 내놨다. 국가반도체기술센터(NSTC) 설립, 미국 내 반도체 생산을 위한 투자 시 인센티브 제공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중국은 2015년부터 향후 10년간 1조위안(약 170조원) 규모의 투자를 추진 중이다. 중국 반도체 시장의 70%를 자국 업체들로 채우겠다는 목표다. 이를 위해 15년 이상 기업 중 28나노 이하 공정을 도입한 기업에 법인세를 면제해주고 있다. 전문인력 확보, 해외 반도체 업체 인수합병(M&A)도 공격적으로 단행하고 있다. 세제 혜택, 임대료 감면과 같은 지방정부의 지원은 별도다. 

유럽도 아시아 의존도를 낮추고 2030년까지 전세계 반도체 점유율 20% 달성을 목표로 내걸고 대규모 투자를 할 예정이다. EU는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500억유로(약 67조원)를 투입하기로 합의했다. 각 국 정부도 투자 금액의 20~40%를 보조금으로 지원하며 반도체 기업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반도체 화상회의에서 반도체와 배터리 분야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반도체를 만드는 웨이퍼를 들어보이는 바이든 대통령 모습. (사진-SBS 뉴스 갈무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반도체 화상회의에서 반도체와 배터리 분야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반도체를 만드는 웨이퍼를 들어보이는 바이든 대통령 모습. (사진-SBS 뉴스 갈무리)

‘반도체 주지마’ VS ‘공급난은 미국 탓’ 격렬해진 미·중 갈등

이런 가운데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국내 반도체 업계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두 나라는 서로를 견제하며 노골적으로 ‘양자 택일’을 종용하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2일(현지시간) 백악관 주재의 반도체 CEO 서밋에서 직접 웨이퍼를 들어보이며 “이 칩은 배터리와 인터넷망을 위한 웨이퍼다. 이것은 모두 인프라(기반 시설)로, 오늘의 인프라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반도체를 국가 기반시설인 인프라로 접근하고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중국과 세계의 다른 나라는 (반도체 투자를) 기다리지 않는다. 미국이 기다려야 할 이유가 없다”고 투자를 압박하기도 했다. 

이미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2월 반도체, 배터리 등 4대 품목을 전략부품으로 지정하고 공급망을 재검토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린 상태다. 현재 미 행정부는 그동안 수입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았던 반도체 칩 공급망의 안정적 확보를 위한 100일 검토 작업을 진행 중이다. 동시에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 공급망의 복원력 확보는 미국 내 생산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치를 공유하고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 국가와 긴밀하게 협력하도록 해야 한다”며 반중(反中) 전선 구축의 필요성을 거듭 역설하고 있다.

중국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중국 관영 매체 환구시보의 영문판인 글로벌타임스는 미국의 반도체 CEO 서밋이 “중국의 성장을 가로막으려는 또 하나의 정치 공작”이라고 폄하하면서 “중국 기업에 대한 제재가 별 효과가 없자 미국 기업이 아닌 대만(TSMC)과 한국(삼성전자) 같은 동맹국에 무리하게 중국과 떨어져 지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상징하는 화웨이의 입을 빌려 노골적으로 반미(反美) 동맹의 필요성도 주장했다. 칼 송 화웨이 글로벌 대외협력 및 커뮤니케이션 담당(사장)은 “반도체는 각각의 장점을 가진 기업이 하나의 생태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한데, 화웨이가 제재를 받으면서 상황이 악화됐다”며 “일본과 한국, 유럽과 같은 반도체 선진국과 협력해 글로벌 공급사슬을 다시 형성하고 싶다”고 말했다. 쑤 즈쥔(영어 이름 에릭 쉬) 화웨이 순환회장 역시 11일 중국 선전에서 열린 화웨이 애널리스트 서밋에서 “미국이 중국 기업에 부과한 규제 때문에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이 타격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중국 정부는 지난 3일 푸젠성 샤먼에서 열린 한·중 외교정상회담에서 우리 정부에 반도체와 5G 통신분야에서의 협력을 요청했다.  

대만 TSMC 반도체 생산라인 (출처=뉴시스)
대만 TSMC 반도체 생산라인 (출처=뉴시스)

“최대한 투자·고용 확대해달라” 조건부 당근에 업계 부담 가중  

국내 반도체 업계는 복잡한 심정이다. 반갑지 않은 러브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투자를 마냥 지연시키기도 어렵게 됐다. 바이든 대통령의 요청에 반도체 기업들이 속속 화답하는 분위기다. 인텔은 3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 진출을 선언하면서 설비 구축을 위해 200억달러를 투입한다고 밝힌 데 이어. 차량용 반도체 생산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전세계 파운드리 1위 업체인 대만 TSMC도 중국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 설계 업체인 페이텅과의 거래 관계를 끊기로 했다. 지난해 5월에는 미국 애리조나주에 120억달러(약 13조5000억원)를 투자해 최첨단 반도체 공장 2곳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글로벌파운드리는 미국·싱가포르·독일 공장의 생산량 확대를 위해 올해 14억달러를 투자하고, 미국 뉴욕주 몰타에 신규 공장 건립에 착수한다. 

중국과의 관계를 끊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 시안과 쑤저우에서 각각 반도체 생산기지를 운영 중이다. 이들 기업이 중국에서 올린 매출은 30%, 40%에 달한다. 중국 정부가 추가 투자를 요구할 경우, 수용할 수밖에 없다. 

이에 업계에서는 기업별 신규 투자와 별개로 정부 차원에서 기업에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었다. 반도체 문제는 개별 기업을 넘어 국가 간 통상문제로 비화됐기 때문에 우리 정부도 외교나 안보의 영역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 교수는 “바이든 행정부의 기본 기조는 ‘바이 아메리칸’이기 때문에 미국 내 투자 활성화 등을 압박할 가능성이 크다. 이번 서밋에서 최후통첩식으로 압력을 넣을 수 있다고 본다”며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정부가 명확한 입장을 정하고 이에 따른 불이익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밀했다. 

결국 우리 정부도 한 박자 늦었지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15일 확대경제장관회의에서 “반도체 산업은 우리 경제의 현재와 미래가 걸린 핵심 국가전략 산업”이라며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우리가 계속 주도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세계 1위를 지키고 격차를 벌리기 위한 다각도의 지원 방안을 수립하겠다. 종합 반도체 강국 도약을 강력히 지원하겠다”며 규제 완화, 투자 인센티브 등을 언급했다. 정부는 상반기 내로 반도체산업 종합지원대책을 담은 K반도체벨트 전략을 발표할 계획이다. △핵심 밸류체인별 클러스터 구축 △세제지원 확대 △전문 인력 양성 △규제 합리화 등이 담길 예정이다. 반도체 지원 특별법 제정도 검토한다. 

업계는 정부가 해법을 적극 모색키로 한 것을 반기면서도 조건부 지원이 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거센 변화의 파고를 이겨내고 기회를 선점하기 위해 기업과 정부가 한 몸이 되어야 할 것” “정부와 기업이 오늘 한 몸처럼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을 국민께 보여드릴 수 있어 보람이 있었다” 등 기업의 협력을 강조했다. “최대한 투자와 고용을 확대해주시면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다할 것”이라고도 했다. 

정부 지원의 실효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업계는 지난 9일 성윤모 산업부 장관에게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면서 R&D 및 제조설비 투자 시 최대 50% 세액 공제, 반도체 관련 시설 인허가 규제 완화, 전문인력 양성 프로그램 운영 등을 건의했다. 현재 정부의 지원책은 방향만 세워진 상태로, 세부 지원안은 일러야 6월경에나 발표된다. 기업들이 체감하는 위기에 비해 대처가 느린 것이다. 게다가 임기 말이기 때문에 정책 추진 동력도 떨어진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관련법까지 제정하면서 세계가 반도체 육성에 혈안이 돼 있는데 정부가 구체적으로 지원책을 제시하지 않은 게 아쉽다. 핵심 국가전략산업이라면 그에 마땅한 투자가 있어야 하는데 얼마나 현실적인 대책이 나올지 모르겠다”며 ”고용을 늘릴 것을 요청할 경우, 모든 여력을 투자에 돌려야 하는 기업 입장에선 부담이 가중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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