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회장, 5대 그룹 총수 중 가장 먼저 빈소에 도착
26일 조문에 이어 28일 영결식에도 참석…고인 추모
이재용, 공식석상서 현대차 사용‥팰리세이드 직접 운전
반도체·자동차로 서먹했던 과거 옛말‥전방위 협력 기대감

▲ 이재용(오른쪽)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 지난 1월 서울시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국내 각계대표 및 특별초청 인사들과의 신년 합동 인사회에 참석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뉴시스)

 

[스페셜경제=변윤재 기자] 삼성과 현대 사이의 오래된 매듭이 풀렸다. 28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영결식에 참석한 것이다. 정의선 회장은 이재용 부회장과 평소 사적인 고민을 나눌 정도로 각별한 관계인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이 골프를 즐기는 모습이 종종 포착되기도 했다.

 

특히 정 회장은 이 부회장과 2차례 만나 전기차 배터리를 포함해 미래 모빌리티 분야에 대한 논의를 나눴던 만큼, 두 그룹이 앙금을 털고 협력을 강화할 것이라는 기대감 어린 관측이 나온다.

 

정 회장은 앞서 26일에도 5대 그룹 총수 가운데 가장 먼저 이 회장의 빈소를 찾았다. 이날 오전 조문한 정 회장은 항상 따뜻하게 잘 해주셨다. 너무 훌륭하신 분이 돌아가셔서 참으로 안타깝다우리나라 경제계에서 모든 분야에서 1등 정신을 아주 강하게 심어주신 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추모했다. 또 이 부회장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좋은 쪽으로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도 했다.

 

삼성과 현대는 오랜 시간의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두 그룹은 재계 1위를 높고 이병철-정주영 창업주부터 2세대인 이건희·정몽구 회장 때까지 경쟁을 이어갔다. 특히 현대가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고 삼성이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면서 두 그룹의 갈등은 깊어졌다.

 

유학시절부터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던 이건희 회장은 1994년 자동차사업에 뛰어들었다. 전 세계 웬만한 자동차 잡지는 다 구독해 읽었고 세계 유수의 자동차 메이커 경영진과 기술진을 거의 다 만나봤다. 즉흥적으로 시작한 게 아니고 10년 전부터 철저히 준비하고 연구해왔다고 회고했을 만큼 이 회장의 자동차 사업에 대한 열망은 강했다. 유학시절부터 자동차광으로 소문난 그는 취임 직후 자동차 사업 태스크포스(TF)를 꾸렸을 정도다.

 

199412월 상공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로부터 승용차 사업 진출을 허가받으며 이 회장의 꿈은 이뤄지는 듯 했다. 이듬해 부산공장이 착공되고 이 회장은 직접 공장을 찾았다. 프로젝트명 KPQ(SM5)의 시승회도 열렸다.

 

이 회장의 자동차 사업에 대한 의지를 매우 강했다. 부산공장의 경우, 현대자동차 공장 건설비의 5배에 달하는 비용을 쏟아 넣으며 최고의 설비를 갖췄다. 현대자동차 출신 임원을 영입하고, 부품 또한 국산화를 꾀했다. 이 같은 투자 덕분에 삼성차의 첫 세단 SM520은 내구성과 품질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중형차 시장에서 급부상했다. 이 회장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때 평소 타던 벤츠 대신 삼성자동차 최고급 사양 모델인 SMS525V를 타고 가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삼성은 IMF 외환위기로 법정관리에 들어간 기아차 인수합병(M&A)을 추진하기도 했다. 삼성생명이 8%의 지분을 보유했기 때문에 삼성에게 유리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결국 기아차를 품에 안은 것은 현대차였다.

 

삼성의 도발에 현대도 반도체로 응수했다. 현대는 기아차 인수 당시 LG반도체도 함께 인수했다. 1983년 현대전자를 세우며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던 현대는 LG반도체 인수 덕분에 D램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인수 당시 현대전자와 LG반도체는 세계 D램 시장에서 각각 2위와 5위로, 두 회사의 점유율을 합하면 20.8%에 달했다.

 

그러나 삼성과 현대의 도전은 쓴 맛만 남기고 끝난다. 김대중 정부가 재벌개혁을 위해 전자-자동차 빅딜을 추진하면서 삼성은 자동차를 정리했다. 4조원에 달하는 부채를 탕감하기 위해 이 회장이 사재에서 삼성생명 주식 400만주를 출연하기도 했다. 현대도 막대한 인수자금에 따른 유동성 위기와 D램 시장 불황이 겹치면서 2001년 현대전자를 계열에서 분리시킨다.

 

전자와 자동차라는 주력사업이 보다 분명해지면서 두 그룹 간 앙금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2001년 이 회장은 자신과 삼성 계열사 사장단의 공식 업무용 차량 100대를 현대차 에쿠스로 교체했고, 같은해 정주영 창업주가 별세하자 빈소를 찾았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이후 정 회장과 단독으로 만나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다만 이때까지도 두 그룹 간 사이는 서먹했다2014년 두 그룹은 다시 한번 맞붙었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서울 삼성동 옛 한전부지를 보고 삼성과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것이다. 정 명예회장은 감정가의 3배가 넘는 10조5500억원을 베팅, 낙찰받는 데 성공한다.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은 3세대에 이르러서다. 이재용 부회장과 정의선 회장은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정기적으로 만나 의견을 나누고 친분을 쌓아왔다.

 

특히 이 부회장과 정 회장은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경영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다. 삼성과 현대차 모두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만큼, 협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실익이 크다. 이 때문에 정 회장은 지난 5월과 7월 이 부회장과 만났다. 5월에는 정 회장이 삼성SDI 천안사업장을 찾았고, 7월에는 이 부회장이 현대·기아차 남양연구소를 찾았다. 특히 현대·기아차 남양기술연구소가 재계 총수에게 공개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2번의 만남에서 두 사람은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도심항공모빌리티(UAM) 등 차세대 모빌리티 분야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협력의 필요성을 교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그룹 간 협력으로 삼성으로선 반도체와 전장분야에서의 보폭을 더욱 넒힐 수 있다. 현대차는 IT 첨단 기술력을 바탕으로 미래차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다.

 

이같은 협력을 염두에 둔 듯 이 부회장은 현대차와 함께 공식석상에 나서고 있다. 이 부회장의 전용 차량은 제네시스 G90이고, 최근 이건희 회장의 빈소에 현대차의 SUV 팰리세이드를 직접 몰고 등장해 이목을 끌었다. 삼성 총수 일가가 직접 자동차를 운정해 공식성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전례가 없는 일로, 지난달 베이징모터쇼를 통해 현대차가 팰리세이드의 판매를 공식 발표하며 중국 시장에서의 점유율 회복에 나선 것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게 아니냐는 시각이 있다.

 

스페셜경제 / 변윤재 기자 purple5765@sp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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