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北 대결구도 속 ‘한반도 운전자론’ 후퇴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7월 6일(현지시간) 베를린시청 Bear Hall에서 쾨르버 재단 초청 연설을 하고 있다.

[스페셜경제=김영일 기자]이른바 ‘베를린 구상’으로 지칭되는 독일 쾨르버재단 초청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한반도 평화통일을 주창했다. 그러나 북한 김정은은 문 대통령의 베를린 구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탄도미사일 도발은 물론 6차 핵실험까지 강행했다. 그럼에도 대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통일에 방점을 찍은 베를린 구상에 집착하고 있는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은 베를린 구상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양상이다.


이런 가운데 ‘남북관계에서 주변국에 기대지 않고 우리가 운전석에 앉아 주도해 나가겠다’고 자신했던 문 대통령은 최근 ‘안보 위기에 대해 우리 주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한다’며 한계를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내놨다. 이에 <스페셜경제>가 베를린 구상의 한계 및 이상과 현실에 대해 진단해 봤다.


보수정당 ‘색깔론’ 받아친 文


‘대화 통한 평화통일’에 방점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12년과 올해, 두 차례 대선에 출마한 끝에 대한민국호(號)를 이끄는 선장이 됐다.


두 차례 대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문 대통령에 대한 여러 약점이 노출됐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안보관이 큰 약점으로 지목됐다.


그도 그럴 것이 문 대통령 본인 및 주변 인물들의 성향·이념 탓도 크지만 안보정당을 자임하는 보수정당은 선거 때만 되면 ‘종북세력(북한추종세력)’, ‘빨갱이(공산주의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 등 노골적인 색깔론을 펴며, 진보 후보를 공격하기 때문인 것도 있다.


보수정당의 전매특허인 색깔론은 케케묵은 구태적인 프레임(Frame·틀)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선거 때 보수층을 선동·결집시키기에는 이만한 네거티브 전략도 없다는 점에서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대착오적인 구태인 줄은 알지만 마치 끊을 수 없는 약에 중독이라는 된 듯 보수정당은 선거 때면 으레 색깔론을 들고 나오기 마련이다.


이번 대선에서도 보수정당이 여지없이 색깔론을 들고 나오자, 문 대통령은 재수에 강하다고 밝힌 자신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색깔론을 정면으로 받아쳤다.


대선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가던 지난 4월 20일. 문재인 후보는 강원 원주시 중평길 유세를 통해 “또 선거 때가 돌아오니까 색깔론, 안보 장사가 또다시 좌판을 깔았는데, 군대 갔다 오지 않은 사람들은 특전사 출신인 저 문재인 앞에서 안보이야기 꺼내지 말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당시 자신감에 가득 찼던 문 후보는 “지긋지긋 하지 않느냐, 이제 국민들은 속지 않는다”면서 “지난 10년 안보에 실패한 안보 무능, 국정 준비 안 된 안보 불안 세력, 가짜 안보 세력에게 안심하고 안보를 다시 맡길 수 있겠느냐, 그래서 이제는 가짜 안보를 진짜 안보로 바꾸는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이에 앞서 3일 전인 17일에는 보수의 심장인 대구를 방문해, 경북대 유세에서 특수전사령부전우회 대구시지회의 환영을 받으며 특전사의 상징인 베레모를 쓰고 이렇게 말했다.


“대구 시민 여러분, 아직도 문재인이 대통령 되면 안보가 걱정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죠? 군대도 안 갔다 온 사람들, 저 문재인 앞에서 안보얘기 하지 마시라.”


그렇다. 사골도 아니고 선거 때만 되면 우려먹는 보수정당의 색깔론을 문 후보는 정면으로 받아쳤다.


일반 군 생활을 포함해 공익근무요원이든, 산업기능요원이든 모든 병역의무가 힘들고 고달프기 마련이지만, 군 생활이 결코 녹록치 않았을 법한 특전사 출신이라는 장점을 부각시키며 자신의 약점을 불식시킨 것이다.


물론 문 후보가 5·9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데에는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여파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보수정당의 주된 공세 포인트였던 색깔론을 정면으로 받아친 대목은 간과할 수 없어 보인다.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5.9 대통령선거 공식선거운동 첫 날인 지난 4월 17일 대구 경북대학교 북문에서 진행된선거운동에서 박종길 특전동지회 회원이 전달한 베레모를 쓰고 경례를 하고 있다.

“남북관계, 운전석에 앉아 주도할 것”


재수 끝에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문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차 미국을 방문한 지난 7월 1일, 워싱턴에 위치한 한 호텔에서 열린 동포간담회에서 한미 정상회담 성과를 설명하며 “남북관계에서 주변국에 기대지 않고 우리가 운전석에 앉아 주도해 나가겠다”고 자신했다.


당시 문 대통령의 ‘운전석’ 발언은 지난 1998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핸들을 잡고 나는(클린턴) 보조를 하겠다”고 언급한데 대한 연장선상으로 해석됐다.


문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저 사이에 형성된 신뢰를 바탕으로 북핵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겠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한반도의 평화통일 환경 조성에 주도적 역할과 남북대화 재개에 재한 지지를 확보한 것은 매우 중요한 성과”라고 자평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과 저는 제재와 대화를 모두 활용해 단계적이고 포괄적인 접근으로 북핵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자는 데 뜻을 같이했다”며 “무엇보다 대화의 문을 열어 놓고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로 한 것은 큰 성과였다”며 남북관계에서의 주도적 역할과 대화를 강조했다.


이러한 기조는 닷새 뒤, 이른바 ‘베를린 구상’으로 지칭되는 독일 쾨르버재단 초청연설에서도 이어졌다.


문 대통령의 베를린 구상은 대화를 통한 한반도 비핵화, 이어지는 평화적 통일에 방점을 찍었다.


“안보위기 주도할 여건 못 돼”


베를린 구상‥한계·무력감 공존


내우외환…상실된 ‘한반도 운전석론’


제재보다는 대화에 방점을 찍은 문 대통령의 베를린 구상을 보수정당은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대선에서 패배한 보수정당은 ‘지금은 대화할 때가 아니라 제재를 가할 때’라며,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제1야당이자 보수의 큰 집을 자처하고 있는 자유한국당은 전술핵 재배치론을 주창했고, 필요하다면 자체적인 핵무장까지 해야 한다며 베를린 구상과는 완전 배치되는 입장을 견지했다.


아울러 대화의 당사자인 북한 김정은은 문 대통령의 베를린 구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지속적인 탄도미사일 도발에 이어 6차 핵실험까지 강행했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은 문 대통령을 배제한 채 ‘로켓맨’, ‘늙다리 미치광이’, ‘완전히 파괴 하겠다’, ‘악의 대통령’ 등 거친 설전을 주고받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자, ‘코리아패싱’ 우려와 함께 한반도에는 그 어느 때보다 엄중한 안보위기가 드리워졌다.


이쯤 되면 베를린 구상은 그냥 구상에 그쳐야 하겠지만, 문재인 정부는 인도적 차원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북한에 800만 달러를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보수야당은 당연하고 국민의당까지 가세한 야권은 인도적 지원이라는 명분은 십분 이해하지만 북한이 핵·미사일 도발을 지속하고 있는 이 시기에 지원을 꼭 해야만 하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뿐만 아니라 문 대통령이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하던 중에는 송영무 국방부 장관과 문정인 통일외교안보 특보의 불협화음까지 연출되면서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라인 사퇴촉구도 이어졌다.


엄중한 안보위기 상황과 이에 걸맞지 않은 정부의 800만 달러 지원, 외교안보 라인의 불협화음 등 안보 관련 비난이 쏟아지면서 70~80%대 고공행진을 유지하던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60%대 후반으로 내려앉았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남북관계를 주도하겠다던 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석론’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한국당 “대통령 무력감 표시…국민들은 한탄”


문 대통령은 지난 10일 정세균 국회의장과 김명수 대법원장, 이낙연 국무총리, 김용덕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등 5부 요인과의 오찬에서 “안보상황이 어려운 것은 외부에서 안보위기가 조성되고 있기 때문이고, 안보위기에 대해 우리가 주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엄중한 한반도 위기 상황 속에서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남북관계에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운전석론이 다소 후퇴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물론 문 대통령의 언급은 안보위기에 대한 외부적 요인이 있다 하더라도 내부만 제대로 결속되고 단합한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취지로 내부 단합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직접적인 대결구도 속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없는 현 상황에 대한 무력감을 호소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자유한국당 정우택 원내대표는 지난 10일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대통령이 5부 요인 오찬에서 ‘한반도 문제는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해결함 힘이 있지 않고 또 합의를 이끌어 낼 힘도 없다’고 했는데, 이 말은 정말 대통령으로서 무력감을 표시한 것이고 국민들로서는 한탄이 나오는 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질타했다.


정 원내대표는 “그동안 대통령이 얘기했던 운전자론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이냐”며 “저희들은 조수석은 물론이고 뒷좌석도 못 탔다고 얘기했고, 심지어 차조차 타지 못했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고 했는데, 운전석론을 얘기할 때와 어제 회동에서 말한 것은 천지차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제가 배운 역사 지식에 의하면 조선시대 말기 각국의 열강에 의해 조선이 아무것도 못하고 손 놓고 있는 그러한 구한말 시대가 상상되는 표현”이라며 “대통령이 이렇게 무력화할 것이 아니라 미국과의 공조관계를 더 공공이 하는 모습도 보이고, 또 미국에 특사도 보내 미국과의 공조 의미를 국민들에게 다시 한 번 부각을 시키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하지 않고 지금 뭐하고 계시는지, 오찬과 만찬으로 때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답답할 따름”이라고 비판했다.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0일 청와대 인왕실에서 열린 5부요인 오찬 회동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


대화를 통한 한반도 비핵화, 이어지는 평화적 통일에 방점을 찍은 문 대통령의 베를린 구상은 결코 틀렸다고 할 수 없다.


한반도 주변국 또는 전쟁이 곧 돈으로 직결되는 외부 세력이야 돈벌이나 정치적 이유 등으로 전쟁을 바랄지도 모르겠으나, 여야를 막론하고 우리가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는 한반도에 전쟁이 나길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따라서 문 대통령의 베를린 구상은 꽤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데 있다.


작금의 현실은 베를린 구상을 비웃는 북한의 도발로 인한 엄중한 안보위기 상황과 미국과 북한의 직접적인 대결구도 속에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없는 한계 및 무력감의 공존이다.


따라서 베를린 구상은 현재의 한반도 현실에 비춰봤을 때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안감이 엄습해 올 정도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결코 좋다고 할 순 없지만, 이상을 낮추고 현실을 직시해 특전사 출신 대통령답게 다소 강경한 대북정책으로의 전환을 고려하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대선 과정에서 보수정당의 색깔론을 특전사 출신이라는 장점을 부각시켜 정면 돌파한 것처럼 말이다.


<사진제공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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