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범의 풍수로 본 2017년 대통령은? 2탄]조선의 도읍지와 태조 이성계의 제왕적 풍수[함수관계]

조수범 박사 / 기사승인 : 2016-08-25 11:4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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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촌의 주성인 안산의 모습 - 사진출처 조수범
[스페셜경제=조수범 박사]좌청룡(左靑龍)·우백호(右白虎)·배산임수(背山臨水) 등 집터나 사업장, 또는 조상의 묘(墓)를 잘 써야 자손이 복을 받는다고 해서 명당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는 부귀영화와 성공, 명예, 권력 등 나쁜 기운은 내쫓고 좋은 기운을 받아들이기 위함이다. 그만큼 풍수지리는 우리 생활 곳곳에 널리 퍼져있으며 중요하게 인식되어지고 있다.


이에 <스페셜경제>가 풍수지리 전문가인 조수범 단국대 평생교육원 풍수지리학과 교수(행정학 박사)를 통해 풍수지리에 대한 개념과 역사는 물론 역대 대통령들의 풍수 분석 및 차기 대선후보들에 대한 풍수지리적 분석까지 시리즈로 기획해 봤다.<편집자주>


태조 이성계의 가계와 풍수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의 조상은 본래 전주에 거주하였다. 그런데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가 고려 조정에서 파견된 전라감사와의 갈등으로 인해 삼척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후에, 이안사의 부모가 타계하자 이안사는 길지(명당)를 찾아 쓰게 되는데, 그 곳이 준경묘와 영경묘이다. 시간이 흘러 이안사는 우여곡절 끝에 함경남도 덕원군 적전면 용주리(湧珠理)로 옮겨갔다.


그리고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익조), 이행리의 아들 이춘(경조), 이춘의 아들 이자춘(환조)까지 이 곳에 거처하게 되었다.


이성계의 부친인 이자춘은 용주리의 인근에 있는 함경남도 염흥군 순녕면 흑석리로 길지(명당)를 찾아 이주하였는데, 이 곳에서 이성계가 태어나게 된다.


이 곳은 십리가 넘는 구릉이며, 왕기(王氣)가 피어오르는 풍수적 길지였다. 왕흥강이 서북쪽에서 돌아 사신(四神-현무·청룡·백호·주작을 말함), 조대(朝對-조산이 앞에 바르게 섬)가 잘 정비되어 봉사(奉仕), 위호(衛護), 조공(朝貢)의 세(勢)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성계의 태를 묻은 곳인 순녕면 정자리의 준원전도 길지라고 한다.


이성계가 무관이던 시절의 어느 날, 무학이 그의 스승인 나옹대사를 수행하며 수학하던 길 이었다.


무학과 나옹대사는 함주에 이르러 앞산을 보며 왕이 날 자리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성계의 구종이 우연히 그 대화를 듣게 되고, 이를 이성계에게 전하게 된다.


이를 들은 이성계는 곧바로 무학과 나옹대사를 뒤쫓아 간 후, 부친의 묘자리를 구하는데 도움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무학과 나옹대사는 이성계의 부친(이자춘)을 모실 좋은 자리(명혈)를 정해주었는데, 이 곳이 지금 함흥에 있는 정릉(定陵)이다.


전해지기를 이 묘 자리가 좋아서 이성계가 왕이 되었다고 한다. 한번은 이성계가 신기한 꿈을 꾸게 되어 무학에게 이 꿈의 해몽을 청하였는데, 무학은 그 꿈이 이성계가 반드시 왕이 될 꿈이라고 해몽해주었다는 설이 있다.


그 후에 실제로 왕이 된 이성계는 두 번이나 확실하게 미래를 예견한 무학에게 조선의 도읍을 정하는 일을 맡기게 된다.(‘조선의 풍수(무야라마 지쥰 저)’ 인용).


가계의 풍수적 해석


이성계의 조상음택 중 전주에 있는 전주이씨 시조 묘도 길지(吉地)인 혈(穴)에 바르게 안장되었고 삼척의 이안사 부친(이성계 현 고조부)의 준경묘도 대단한 길지(吉地)인 혈(穴)에 소점된 것을 확인하였으나, 이성계의 현 고조모의 영경묘는 큰 자리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때까지만 해도 용의 그림은 그려졌으나 용의 눈은 아직 그려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데, 무학과 나옹대사에 의해 이성계의 부친(이자춘)이 군왕지(君王地)인 명당(明堂)에 천명(天命)을 받게 되면서 용의 눈이 그려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화룡정점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고, 비로소 용이 승천(昇天)할 수 있게 된 것일 것이다.


이처럼 이성계의 탄생과 500년 역사를 가진 조선의 창업이 풍수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면 땅은 살아있는 생명체인 것이고, 그 작용력에 인간의 의지가 더하여져서 역사가 만들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더불어, 좋은 땅을 찾기 위해 노력(인간의 운명을 바꾸려는 개운의 노력)하는 인간에게 땅과 하늘의 신령(神靈)스러운 기운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

이성계, 도읍지의 선택 어떻게 했나?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는 새 나라의 도읍 후보지를 정하는데 무학대사, 하륜, 권중화, 정도전에게 그 중심(中心)적인 역할을 맡겼다.


새로운 도읍 후보지는 한양과 계룡산에 있는 신도안 두 곳 이었는데, 이 두 곳에 대해서 많은 주장과 학설이 난무하였다.


먼저 계룡산 신도안은 남덕유산에서 서북으로 행룡(行龍)하다가 진안 마이산에서 기운을 일으키고 운장산과 대둔산을 거쳐 계룡산에 이르게 되는데, 이 곳에서 회룡고조(回龍高祖)로 하나의 큰 보국을 만드니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의 명당길지가 형성되었다. 이 맥(脈)을 금남정맥이라고 부른다.


고서에 ‘산은 천리의 시작을 알아야 하고 물은 천리의 끝을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산은 멀리서 오는 근본을 알아야 하고 물은 하나로 모인 끝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써 풍수의 이론 중 하나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금남정맥은 서북진으로 수백리를 행룡하면서 배룡수(背龍水)인 금강물을 끌고 들어오니, 계룡산 신도안을 용(龍)과 물(水)이 배합하는 부부정배로 보는 것이다.


계룡산(鷄龍山)은 신도안쪽으로 개면하였는데, 주변의 산은 높고 사위(四衛)가 주밀하여 기운이 잘 갈무리되는 장풍국의 명당길지가 된다. 따라서 이곳은 한때 조선의 도읍으로 거론될 정도로 훌륭한 택지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한편, 하륜 등은 서울 신촌 등을 도읍으로 정하기를 주장하였다. 그는 중국에서 가져온 전대미문의 지리서(호순신의 지리신법 풍수필사본, 용(龍)을 볼 때 쓰는 오행(五行)을 물을 보는 것으로 전도시킨 잘못된 내용을 담고 있음)로 판단하기를 ‘산이 건방(乾方)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으로 흘러가게 되면, 생기가 나가게 되어 대흉하다’고 하였다.


결국 이 잘못된 책의 내용과 하륜의 주장으로 인해 신도안이 도읍 후보지에서 탈락되었다. 이러한 사례를 보면 이 땅의 주인은 이씨(李氏)가 아닌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천작으로 만들어진 혈(穴-하늘에서 반드시 좌향까지도 결정한다고 함)에 호순신의 오행을 대입하여 본 결과, 자연의 법칙(혈)과 맞지 않는 것을 확인하였다(많은 혈에서 검증해 봄).


*이 지리신법의 이론을 적용한, 한 분의 대권주자가 있었으나 낙선하였음



어쨌든 풍수적으로 계룡산의 길지는 아직 남겨져 있으니 추후 활용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서울 용산 등에서 이주한 육해공군 본부가 신도안에 터전을 마련하였는데, 풍수의 터 잡기(입지)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 부분은 뒤에 설명).


▲ 인왕산과 신촌의 주성인 안산의 모습 - 사진출처 조수범
태조 이성계는 한양을 도읍지로 결정한 후, 그 궁궐의 입지로 지금의 신촌(하륜 주장)과 백악산을 주산으로 하는 경복궁터를 논의에 붙인 결과, 현재의 경복궁터를 새로운 신도(新道)로 결정하게 된다.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대립 <왜>


그런데 이번에는 궁궐의 좌향을 가지고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의견이 대립하게 되었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낙산(樂山-풍수상 정확한 설명은 개좌임)으로 하여서 천장법인 동향 즉, 유좌묘향(酉坐卯向)으로 궁궐의 좌향을 정하기를 주장하였다.


이는 북악의 살기를 피하고 배룡수인 청계천물과 조화되는 향법이기 때문에, 향후 장자(長子)가 왕위를 계승하고 이백여년 간 태평성대가 이어진다는 이유였다.


한편, 정도전은 역대 임금들은 모두 남향으로 하여 정사를 펼쳤다는 논리를 내세워, 지금의 궁궐향인 남향 즉, 임좌병향(壬坐丙向)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도전의 주장에 무학은 탄식하며 앞으로 이백년후 내 말이 헛되지 않음을 자각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신라 말의 의상대사는 산수비기에 장차 도(道)를 택할 자가 승(僧)의 말을 믿으면 국운의 연장을 바랄 수 있으나 만약 정(鄭)씨가 나와 시비를 하면 오세(五世)가 되지 못해 화(禍)가 생기고 이백년 내외에 탕진될 위험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비기(秘記)대로 태종 형제간의 싸움이 나게 되었고 세조반정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상 몇 가지의 사례들만 보아도 풍수지리가 허황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정법의 풍수 이론은 티끌만큼도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정도전도 풍수의 대가였는데 왜 이것을 몰랐을까. 아마도, 무학은 승려로써 욕심이 없으므로 자연에 순응하는 이치에 따라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도모하였지만, 정도전은 정치적 야심을 가진 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도전의 정치적 발걸음을 따라가 보면, 방석 등 후처소생을 상징적인 왕위에 세우고 실질적인 정치는 신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신료정치를 꾀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마치 현재의 내각책임제와 유사한 형태여서 정도전 당시 내각책임제를 주창했다고 보아도 될 듯하다.


아무튼 이러한 정도전에 의해 경복궁의 터와 좌향은 임좌병향으로 정해지게 되었는데, 이후 조선의 운명은 이때 정해진 터와 좌향에 따라 결정되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북악산과 학익규어형의 모습 - 사진출처 조수범
▲ 저녁 무렵의 북악산과 그 주변 모습 - 사진출처 조수범
▲ 북악산과 우백호인 인왕산의 모습 - 사진출처 조수범
▲ 한양도성의 성곽 - 사진출처 조수범
▲ 도성의 안산인 남산(목멱산)의 모습 - 사진출처 조수범
▲ 창덕궁과 종묘의 모습 - 사진출처 조수범
무학이 궁의 건물을 신축할 때마다 도중에 무너져버리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걷던 무학은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있던 늙은 농부가 소에게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 늙은 농부 조언에 움직인 무학대사...서울의 유래?


그 늙은 농부는 소에게 ‘이 종잡을 수 없는 놈 너의 심술은 무학과도 같다’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무학은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움을 느끼면서 그 늙은 농부에게 궁의 기둥을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가르침을 구했다.


이에 농부가 대답하기를 ‘한양은 학이 날개를 편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 곳은 등인데 여기에 건물을 지으려면 학의 날개를 누른 뒤에 해야 한다. 날개를 그대로 두고 그 등에 기둥을 세우려하니 어찌 그것이 넘어지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그 뒤 무학은 농부의 말대로 궁성을 쌓고 혈을 세웠는데 실제로 공사가 잘 진행되었다고 한다.(‘조선의 풍수(무야라마 지쥰 저)’ 인용)


참고로 경복궁의 지형은 학이 날개를 펴고 물고기를 엿보는 학익규어형으로 볼 수 있다.(풍수는 생기설(生氣說)의 학문이므로 이에 따라 해석하면 학이 날개를 펴는 것은 그늘을 만들어 물고기 사냥을 하기 위함이다)


한양의 궁성을 쌓는 것도 고민거리였다. 하루는 눈이 내린 후 해가 뜨면서 쌓인 눈이 녹기 시작했다.


그래서 산 능선을 따라 눈이 녹은 부분과 녹지 않은 부분으로 확연히 구분 지어졌는데, 이 경계선을 따라 성곽을 축조하였다. 이것이 한양도성의 성곽이다.


이렇게 설(雪)을 따라 친 울타리란 뜻으로 설울(서울)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서울이란 지명의 유래라고 한다.


한양의 주성인 북악산은 살기(殺氣)가 많은 산이며, 북악산에 박혀있는 몇 개의 큰 바위 덩어리 들은 종기와 부스럼(송나라때 저술된 옥수진경의 내용)에 해당하는 흉석으로 보아야 한다.


도읍지 한양의 풍수적 해석


이런 여러 살기(殺氣) 때문에 경복궁은 북악산을 좌편으로 하는 터를 정해 조금이나마 살기(殺氣)를 피하는 추길피흉의 법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경복궁 이후 지어진(한양은 5개의 궁궐이 있었음) 궁궐 중에, 창덕궁은 북악의 살기를 거의 제거한 곳에 지어진 궁궐로써 조선 숙종대왕은 여기(창덕궁)가 가장 편안하고 좋다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풍수적으로 보아도 5궁중에서 창덕궁의 터가 가장 좋은 것으로 보인다.


▲ 한양의 조산인 관악산(봉우리가 불길이 일어나는 형상임) - 사진출처 조수범
남쪽에 위치한 관악산은 풍수개념으로 볼 때, 오성(五星)중에 화체(火体)의 산으로 불의 기운이 강하다.


더구나 불의 방위인 남쪽에 위치하여 불의 기운이 더욱 강폭해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도성 안에 크고 작은 화재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불은 불로서 염승하는 비선의 대비책으로써 숭례문(崇禮門) 현판(‘숭’자가 불꽃형상)을 세로로 써서 걸어놓았다.


여기에 더하여 숭례문 앞에 남지라는 연못을 만들고, 광화문 앞에 물의 신인 해태 상을 세워 또 한 번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제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관악산의 화기(火氣)는 한강 물이 비선함으로서 그 기운이 약화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견과 조산(祖山)으로서의 관악산은 사격(砂格)으로 용루사에 해당하고 상격귀사(上格貴砂)로 대귀(大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숭례문 - 사진출처 조수범
▲ 숭례문 현판 - 사진출처 조수범


*그런데 국회의사당 앞에 해태상을 세워놓았다. 무슨 이유로 물이 많은 여의도에 물의 신을 세워두었을까? 국회의사당 앞의 해태상이 그 터에 적절한 조각상인지 다시 고려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 국회의사당과 해태상 - 사진출처 조수범


한양의 도성은 천지(天地)를 팔방(八方)으로 나타내어 8門(문)으로 하고, 북쪽에 숙지문, 동쪽에 흥인지문, 남쪽에 숭례문, 서쪽은 돈의문, 동북쪽은 혜화문, 동남쪽은 광화문, 서남쪽은 소덕문, 서북쪽은 창의문으로 8방위의 기운(氣運)이 도성으로 유입하고 순환하도록 설치하였다.


도성의 중앙에는 보신각을 동서남북에는 4대문을 세워 동양사상인 인의예지신을 모두 표현하였다.


팔역지에서는 한양의 도성이 진곤저허(동쪽과 남서쪽이 낮고 허함)하고 담이나 도랑을 준설하지 않은 까닭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두 난을 모두 지킬 능력이 없었다고 말한다.(‘조선의 풍수(무야라마 지쥰 저)’ 인용).


그러나 도성의 성곽을 높게 쌓는다고 다가오는 흉운을 완전히 피할 수 있었겠는가. 한양에 대한 무학대사의 풍수적 해석을 보면 조선의 흉화는 필연적으로 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앞글에서 무학대사는, 궁궐을 임좌병향(남향)으로 세우게 되면, 200년 후에 내말이 헛되지 않음을 자각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200년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렇게,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7년 동안 조선강토가 유린되는 참담하고도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측하였다는 것은 풍수의 미래예측기능을 확인시켜 주는 사례일 것이다. 더불어 무학대사의 풍수적 식견이 道(도)의 경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궁궐을 남향으로 하였을 때 일어나는 실체적 현상을 풍수지리적으로 어떻게 분석할 수 있을까. 풍수에서는 터와 향을 정할 때 지기(地氣)에 승하고 천기(天氣)를 점하는 법을 써야 한다.


경복궁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여 남향인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세웠는데, 임좌병향에서 천기(天氣)를 점하는 병향(丙向)쪽의 천기(天氣)가 흉신(凶神)으로 작용(作用)하게 되었다.


그리고, 북악의 배룡수(부부정배로 음양이 화합하는 물)인 청계천이 흘러서 한강과 합류하게 되는 지점은 을진방(乙辰方)으로써 이곳이 궁궐의 진수구(眞水口)가 된다.


이곳과는 수법(水法)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음양생기(陰陽生氣)가 화합하여 새로운 생기(生氣)가 발현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와 어긋남으로 해서 흉신(凶神)으로 변하게 되고, 이로 인해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풍수적 분석과 역사적 사건의 상관 관계


청계천 물과 을진방(乙辰方)에서 만나는 한강은 속리산에서 발원한 한남정맥이 끌고 들어온 객수(客水-부부가 아닌 남이 먹다 버린 물로 표현)로 표현할 수 있다.


이를테면, 깨끗한 재물, 깨끗한 권력 등이 아닌 부정한 재물, 부정한 권력 등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한양의 깨끗한 천기(天氣)는 청계천이 한강과 교구하는 지점까지로 볼 수 있다.


또한, 경복궁 앞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은 우측물이 좌측으로 유거하면서 천기(天氣)의 흉한 기운과 조응하는데, 이것의 영향으로 세조반정, 연산군의 폭정 등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진흉신(辰凶神)의 영향으로는 임진(壬辰)년에 임진왜란, 흉신인 병향(丙向)의 영향으로는 병자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전쟁의 참화를 겪게 되고, 조선의 처녀 30여만명이 청나라에 끌려가는 수모를 겪게 된다.


이때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처자를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는데, 이는 나라가 약하면 남자는 목숨을 내놓아야하고 부녀자와 아이들은 고통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역사적 비극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객수(客水)인 한강의 경우는 강화도 옆 서해바다와 만나면서 그 기운(氣運)을 다하는데, 그 방위가 신술(辛戌)방위이다.


그런데 진수구인 을진(乙辰)과 신술(辛戌)은 서로 충(沖)을 하여 깨져버린다. 이로 인해 경술(庚戌)년에 일제에 의해 조선이 망하게 되는 것이다.


풍수의 중요성...봉화마을과 노무현 전 대통령


이와 같은 풍수이론으로 봉화마을에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후 거주한 집에 적용해 보았는데, 이에 대한 풍수지리적인 해석이 정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자세한 설명을 할 것이다)


만약 무학대사가 주장했던 것처럼 동향으로 궁궐을 세웠다면 200~300년 정도의 태평성대가 이루어져 백성들의 삶이 평안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더불어, 풍수가 누군가에게는 허무맹랑해 보여도 털끝만큼도 오차가 없는 정확한 학문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는 하늘에서 부여한 천시를 타고 났기에, 그 시대정신(時代精神)에 적합한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중심(中心)에는 땅의 신령한 정기를 받는 인물들에 의해 필연적으로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만들어졌다고 본다.


따라서, 터를 정하고 이용(利用)하는 것은 대자연의 이치와 섭리에 따른 천조지설에 따라야지 조금이라도 욕심과 술수를 부린다면 신령스러운 땅은 절대 용서치 않을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풍수명인은 풍수지리가 지니는 진정한 도(道)의 이치를 깨달아 하늘의 메신저(심부름꾼)으로서의 역할을 잘 이행하여야 할 것이다.


▲ 멀리서 바라본 백두산 전경 - 사진출처 조수범
▲ 한반도의 태조산인 백두산과 천지의 모습 - 사진출처 조수범
▲ 혈처에서 출토된 혈토의 모습 (비석비토로 윤기가 흐르고 색이 오색으로 창연함. 손으로 비비면 콩고물처럼 변함. 단단하고 질겨서 삽이 잘 들어가지 않아 깎아내야 함. 2014년 공주시 유구읍 추계리 금계산에서 출토) 사진출처 : 조수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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