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시를 잇는 나의 결론은 말하자면 이렇다. 김소형의 시에서 화자는 루소의 <릴 아담 숲속의 길>에 나오는 양들 옆에 하얀 모자, 파란치마의 소녀로 다가온다. 그림 속 소녀가 마치 관람자. 즉 독자를 향해 “꿈속이라 믿었던 숲이었습니다/어딜 가나 음악이고 어디서나 음성이던 숲”이라고 시를 낭송하는 모습이다. 그렇게 착각되는 그림으로 다가왔다. 그러니까 <릴 아담 숲속의 길>은 김소형의 시와 다름이나 또 닮음이다.

시인의 ‘숲’과 화가의 ‘숲’으로 초대

​국내를 대표하는 시집 전문 출판사로는 누가 뭐래도 창비(창작과비평사)와 문지(문학과지성사). 이렇듯 두 군데가 독보적이지 싶다. 창비시선의 특징을 말해볼까. 창비는 시인의 이름을 가지고서 반드시 한자로도 병기한다. 발문에 해당하는 해설은 당연히 있는데, 주로 시집을 펴낸 시인과 가까운 또 다른 시인이나 소설가, 아니면 가까운 문학평론가 몫이 된다. 또 시집의 뒷면에는 당대 유명한 문인의 추천사가 언제나 나온다. 그렇기에 나는-독자 입장에서-어쩌다, 창비시선 시집을 권수에서 더 많이 서재에 소장하게 되었다. ​

이에 반해, 문지는 시인의 이름에 한자를 표기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죽 그랬다. 그래서일까. 문지시선으로 시집을 펴내는 일련의 시인들의 한자 이름은 알 수 없다. 그렇게 되어 있다. 해설은 창비와 문지 비슷한 경향을 나타낸다. 또 시집의 뒷면에 문지는 추천사가 보이지 않는다. 유명인 추천사 ‘대신’에 시집 속 명문장으로 몇 줄 정도 채울 뿐이다. 그러니까 그림처럼 여백의 미를 강조한다. 문지 고유의 편집 스타일이다. 그렇다고 문지의 특별함이 없진 않다. 문지는 시인의 초상화-컷-가 표지 디자인으로 장식된다. 이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렇지만 창비시선 177권. 이 시집엔 도종환(1954~ )이라는 한글 이름만 보일 뿐. 한자 이름(都鍾煥)이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 걸까. 각설하고 시인 김소형(1984~ )의 숲, 부터 먼저 살펴보자. 시의 부분만 여기서 인용한다. 다음이 그것이다.

꿈속이라 믿었던 숲이었습니다

어딜 가나 음악이고 어디서나 음성이던 숲

저는 환한 잠을 따 광주리에 담았습니다

( ……)

숲을 두고 숲을 두고

그저 당신과 하루만 늙고 싶었습니다

빛이 주검이 되어 가라앉는 숲에서

나만 당신을 울리고 울고 싶었습니다

​_ 김소형, 「ㅅ ㅜ ㅍ」 부분

몇 번이나 나는, 김소형 시를 되풀이로 읽었다. 시가 너무 좋다. 특히 “꿈속이라 믿었던 숲이었습니다/어딜 가나 음악이고 어디서나 음성이던 숲”이라는 부분은 문득문득 화가들의 숲 그림이 연상됐다. 영화 속 장면처럼 빠르게 지나쳤다. (아, 뭐였더라) 이거 루소 그림이 시가 된 것이 아닌가.

테오도르 루소, 릴 아담 숲속의 길,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미술관
테오도르 루소, 릴 아담 숲속의 길,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미술관

이제 도종환의 시 「숲」의 세계로 놀러갈 차례이다. 산책해보자. 다음이 그것이다.

​산 발치에 있는 나무와

산 정상에 있는 나무가 함께 모여 있다

(……)

아주 아주 위태롭던 날 어둡고 슬프던 날

벼락을 대신 맞고 죽어간 나무가 있고

(……)

낙락장송 혼자 이루는 숲은 없다

첫서리 내리면 잎을 버리고 몸 사리는 나무와

한겨울 내내 푸른 빛을 잃지 않는 나무가

함께 모여 숲을 이룬다

작은 산 하나를 만든다

​_ 도종환, 「숲」 부분

이 시는 뭐랄까. 시인이 정치인으로서 품은 구상이 시적으로 묘사된 그런 작품이랄까. 첫 행부터 수직적인 민생관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산 발치에 있는 나무”는 서민의 나무 의인화이고, “산 정상에 있는 나무”의 존재는 정치인으로 나무 의인화가 아니겠는가. 이런 해석이 너무 도식적인가. 그럴 법하다.

​왜냐하면 전체적인 메시지는 숲처럼 인간 세상이 조화를 이루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때 시인이 강조한 것처럼 “아주 아주 위태롭던 날 어둡고 슬프던 날”이 지나갈 것이고 “벼락을 대신 맞고 죽어간 나무”의 희생도 있었다는 역사를 독자는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그 나무들 모여 숲을 이룬다/낙락장송 혼자 이루는 숲은 없다”는 구절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이다. 그래서 화자의 인식이 이상적으로 비춰진다. 다시 말해서 아름다운 숲과 같은 조화로운 정치 이상을 표방하는 시행의 대목이다. 따라서 독자는 여기서 짐작한다. 시인이 정치인으로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을.

​그렇다. 도종환의 숲은 나무에서 정치적인 ‘사람(人)’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안목으로 숲을 본 것이다. 그 나무들(인간들)의 생태를 자세히 관찰한다. 관찰은 관심이 없고는 내공이 될 수 없다. 관심의 성공 여부는 시대와 밀접한 관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문재인 정부 때 시인 도종환은 국회의원 그리고 정치인이 되어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 나는 그가 일찍이 ‘접시꽃 당신’에서 보여준 사랑꾼인 줄만 여태 알았었다. 이것은 괜한 편견이었다. 나의 선입견이었다. 뒤늦게 도종환 시편 「숲」의 전문을 자세히 바라봤다.

그가 시에서 말한 것처럼 산 정상에 있는 나무가 하루아침에 산 발치로 내려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게 세상사 이치이니까. 그래서 시인이 아닌 정치인으로서 도종환의 활동을 더 기대하게 되는지도 잘 모르겠다.

테오도르 루소, 퐁텐블로 숲,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테오도르 루소, 퐁텐블로 숲,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이명옥 사바나미술관장의 역작 《아침미술관 2》(1005쪽)에는 자연주의 화가 테오도르 루소(Théodore Rousseau, 1812~1867)의 그림 <퐁텐블로 숲>이 보인다. 책은 CEO를 위한 참신한 기획물이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다양한 화가들의 수많은 그림을 통해서 CEO에게는 책은 아이디어나 영감을 제공한다. 그렇기에 독자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좋은 책이다.

루소가 그린 <퐁텐블로 숲>의 배경을 두고 이명옥은 책에서 “파리 근교인 퐁텐블로 숲 근처에 위치한 작은 마을 바르비종”이라고 설명했다. 이윽고 화가는 “바르비종의 자연을 계절과 시간, 대기와 광선의 변화에 따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 하면서 덧붙여서 “그는 프랑스 자연주의 화파를 대표하는 화가”라고 짤막하게 소개했다(1006쪽). 그러니까 테오도르 루소가 무엇보다 현장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그림의 완성도를 높인 것처럼 이명옥은 기업의 CEO도 사장실 책상에만 앉아만 있지 말라는 교훈적인 메시지를 책에 전달한 것이다. 그런 셈이다.

​숲,

사람人의 꿈을 하나一같이 세워줌立

미술 전공자 고아라 작가의 저서 《그림과 수다와 속삭임》(247쪽)에도 루소의 그림이 보인다. 제목은 <릴 아담 숲속의 길>이다. 이 작품은 1849년 프랑스 살롱전 출품 당시에 ‘녹색 에비뉴’라 불리며 출품이 되었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전적으로 점으로만 그려진 매우 독특한 형태가 특징인데 화가 루소는 이 작품을 그릴 때 실제 나뭇잎과 나무를 관찰하고 드로잉 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 한 후, 작업실에서 다시 작업을 정리하곤 했다고 고아라는 책에서 말했다.

​그림과 시를 잇는 나의 결론은 말하자면 이렇다. 김소형의 시에서 화자는 루소의 <릴 아담 숲속의 길>에 나오는 양들 옆에 하얀 모자, 파란치마의 소녀로 다가온다. 그림 속 소녀가 마치 관람자. 즉 독자를 향해 “꿈속이라 믿었던 숲이었습니다/어딜 가나 음악이고 어디서나 음성이던 숲”이라고 시를 낭송하는 모습이다. 그렇게 착각되는 그림으로 다가왔다. 그러니까 <릴 아담 숲속의 길>은 김소형의 시와 다름이나 또 닮음이다.

​반면에 루소의 또 다른 작품 <퐁텐블로 숲>은 도종환의 시에서 화자가 그린 이상향과 시와 다름이지만 또 닮은 꼴이다. 산 발치에 나무만 보인다. 이 점이 뭐랄까. 조금은 아쉬웠다.

​도종환은 김소형과 다른 차원에서, 어떤 철학적인 숲으로 다가오는 시적 그림을 독자에게 보여준다. 때문에 ‘숲’은 시적 화자를 일으키는, 자극하는 정치적인 꿈의 공간이 부각된다. 이 점에서 '숲'은 한자로 해체된다. 해체는 이런 식이다. ‘사람 인(人)+한 일(一)+설 립(立)’으로 구상화가 된다. 구상화가 되어서 결국 ‘숲’이 한글이 아닌 한자로 세계를 독자에게 드러낸다.

​김소형의 ‘숲’은 또 어떠한가. 이 시도 하나의 도식을 보여준다. 따라서 '숲'은 한글 자음인 ‘ㅅ+ㅜ+ㅍ’의 세계로 진입한다. 다가온다. 먼저 시옷(ㅅ)은 무엇인가. 그것은 삶, 생활, 섹스, 스타일 등을 강조하는 숲의 나무의 시옷을 의미한다. 우(ㅜ)는 무언가. 이것은 “숲을 두고 숲을 두고/그저 당신과 하루만 늙고 싶”어 하는 나, 그리고 너를 하나로 합치려는 ‘우리’의 ‘ㅜ’의 의미로 새겨진다. 다시 말해 ‘우주’의 뜻 ‘ㅜ’로서 분절된 음소는 상상력을 확장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자음은 뭔가. 그것은 단지 ‘ㅍ’으로 감춰져 있다. 일견 생각하자면 ‘~ 싶’다의 받침으로 쓰인 것이다. 나는 ‘ㅍ’의 의미를 그렇게 해석했다. 그러니까 시적 화자의 위시리스트, 라고 분절된 음소를 살펴야 한다. 그렇기에 시적 화자는 숲에서 “빛이 주검이 되어 가라앉는 숲에서/나만 당신을 울리고 울고 싶”다고 소망을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김소형의 ㅅ은 사람을, ㅜ는 나무(숲)를, ㅍ에서는 땅에 내린 뿌리가 상상된다. 의미가 확장되며 깊어진다. 이런 도식을 통해서 시인은 미래까지 지금 꿈꾸려고 한다.

​한글 자음이 낱낱의 음소로 분절되고 낯설어지는 김소형의 「숲」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매력적인 시편이다. 재미가 생겨난다. 그래서 루소의 명화 <릴 아담 숲속의 길>에 내리쬐는 빛과 김소형의 시편 숲은 다르지만 닮아간다. 닮아가서 차라리 꿈속이라고 믿었던 숲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그림에서 숲은 관람자에게 느낌에서 친숙함을 부여한다. 이렇듯 시와 그림의 힘은 독자와 관람자를 작품 세계로 덥석 끌어당긴다.

​함께 모여 숲을 이룬다

작은 산 하나를 만든다

이렇듯 도종환의 숲은 정치적인 이상 세계를 갈망했다. 이에 반해 김소형의 숲은 “숲을 두고 숲을 두고/그저 당신과 하루만 늙고 싶”은 개인의 욕구와 사랑을 반영했다. 어느 '숲'으로 갈지는 이제 독자인 우리가 전적으로 감당해야 할 몫이 된다.

_ 빈센트 반 고흐, 나무와 수풀,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반 고흐 미술관
_ 빈센트 반 고흐, 나무와 수풀,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반 고흐 미술관

이도 저도 아니라면 나는 정희성 시인의 「숲」도 있다고 말하고 싶고 빈센트 반 고흐의 <나무와 수풀>이란 그림도 더 있는데, 라고 조그맣게 중얼댈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정희성 시인의 화자처럼 “낯선 그대와 만날 때/그대와 나는 왜/숲”(정희성, 「숲」부분)이 되지 못했는가, 하고 반문을 한다. 반성을 무작정 해본다.

_ 빈센트 반 고흐, <나무와 수풀>,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반 고흐 미술관

◆ 참고문헌

도종환, 《부드러운 직선》, 창작과비평사, 1998.

김소형, 《ㅅ ㅜ ㅍ》, 문학과지성사, 2015.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1978.

이명옥, 《아침미술관 2》, 21세기북스, 2010. 1006~1007쪽 참조.

고유라, 《그림과 수다와 속삭임》, 아이템하우스, 2021. 246~247쪽 참조.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ylmfa97@naver.com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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