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59)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웃는 것도 ‘나’이고, 우는 모습도 ‘나’인 것이다. 하물며 어떤 때는 내가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는 세상이 우리가 지금 사는 자본주의 세상이고 또 그래서 모순에 따른 분인이 관계에서 절실해지니 한마디로 도심 속 생활이란 피로사회인 것이다.

가을의 시/정희성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을은 얼마나 황홀한가

황홀 속에 맞는 가을은

잔고가 빈 통장처럼

또한 얼마나 쓸쓸한가

평생 달려왔지만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못하였네

가여운 내 사람아

이 황홀과 쓸쓸함 속에

그대와 나는 얼마나 오래

세상에 머물 수 있을까

크리스티안 크로그, (벨기에 빌라 브리타니아),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오스트리아, 빈 알베르티나미술관.
크리스티안 크로그, (벨기에 빌라 브리타니아),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오스트리아, 빈 알베르티나미술관.

이 시는 낯선 단어나 이미지를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슬픔의 본질을 고유한 질감으로 전달한다.” (박혜진,《언더스토리》, 60쪽 참조)

피곤함 ‘나’, 우아함도 ‘나’

십일월이 시작됐다. 해마다 달력이 ‘11’이란 숫자에 닿으면 맥없이 허기진다. 이 ‘허기지다’라는 낱말에는 ‘기운이 함몰되는 배고픔’이란 뜻도 있지만 허기져서 오히려 ‘간절히 바라거나 탐내는 마음이 생긴다’는 의미까지. 이 낱말의 의미는 포함한다.

한국인이 평생 간직하고픈 명시로 대중에게 손꼽히는 「저문 강에 삽을 씻고」로 유명한 시인 정희성(鄭喜成, 1945~ ). 고등학교 국어 교사 출신의 그가 쓴 「가을의 시」는 십일월에 읽어야지 제 맛이 끝까지 우러난다고 나는 확신한다. 여하튼 이 시는 정희성 시집 《흰 밤에 꿈꾸다》가 그 출처다.

문학평론가 박혜진의 첫 비평집 《언더스토리》를 최근 날마다 ‘슬로 리딩’ 중에 있다. 슬로 리딩이란 한자로 말하자면 ‘지독(遲讀)’인데 일찍이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렇게 하면 ‘지독(知讀)’의 경지에 우리가 닿을 수 있다고 유혹했다. 이 유혹이 나는 싫지 않다. 그래서 그랬던가. 속도가 붙지 않고 더디게 책상 위에 놓인 책들과 연애를 지독히 바란다. 그런 맥락에서 《언더스토리》를 보고 있는데, 허연 시인의 「슬픈 버릇」을 가지고서 시평을 한 그 대목(“이 시는 낯선 단어나 이미지를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슬픔의 본질을 고유한 질감으로 전달한다.”)이 내가 정희성의 「가을의 시」를 두고서 느낀 점을 말하는 것 같아서 끝내 고민하다 밑줄을 연필로 치고야 말았다. 아, 이런 것이 바로 절도이고 또 ‘단장취의(斷章取義)’가 아니던가.

앞의 시. 전문에서 각각 기승의 각운을 받쳐주는 ‘황홀한가’와 ‘쓸쓸한가’는 낯선 단어가 아니라서, 생경함 즉 부담스러움을 덜어준다. 대신에 익숙함이 되어, 거리감을 좁혀주는 상식으로 전이된다. 그리하여 독자(청자)는 화자에게 공감을 드러내기 쉬워진다. 따라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가을”이란 구절에 청자는 황홀지경, 감정이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그냥 이입된다.

그러면서 “황홀 속에 맞는 가을” 배경이 되는 숲이 그림처럼 독자에게 상상된다. 나는 숲을 차지하는 나무 중에서 유독 은행나무에 이끌린다. 은행나무의 푸른 잎들. 그것들이 십일월이면 모두 클림트의 물감처럼 아름다운 황금빛으로 도달한다. 오, 황금빛! 이 때문에 우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부자가 된 착각 속의 풍요로움을 만끽한다. 그러다가 막상 여행에서 돌아와서 내 집에서 소극적이나 확인할 수밖에 없는 내 계좌로 습관처럼 행동은 이어진다.

그렇다. 화자와 청자가 동시에 쓸쓸한 기분을 드러낸다. 시인은 이 부분을 “잔고가 빈 통장”으로 포착하고 묘사했다. 게다가 한시의 절구체에 있어서의 구성법을 취하는 정희성의 시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의 ‘절’에서 각운을 ‘사람아’로 ‘결’에서는 ‘있을까’로 각각 퇴고했다. 그러니까 시행 끝말인 압운(가, 가, 아, 까)이 몹시 한시적(漢詩的)이어서 절묘하다. 절창이기에 그 음악적 울림이 이 시는 녹아들어 간직된다.

평생 달려왔지만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못하였네

가여운 내 사람아

에서 ‘내 사람아’는 누구인가? 그것을 알려면 우리는 이어지는 결구에 다다라야 한다. 이를테면 “이 황홀과 쓸쓸함 속에/그대와 나는 얼마나 오래/세상에 머물 수 있을까”라는 구절까지 마저 읽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대와 나’는 둘이 아니고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가여운 내 사람아”는 ‘나’를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도 ‘나’이고 ‘나’도 ‘그대’가 되는 셈이니 결코 타인을 시사하고 의미하지 않는다. 바로 ‘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황홀을 느끼는 것도 나, 쓸쓸함을 겪는 것도 나가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나’의 정체성에 대해 넓게 사색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히라노 게이치로가 쓴 역작 《나란 무엇인가》에서 말한 ‘진정한 나’는 정희성의 「가을의 시」의 발화자 ‘나’로 확대되고 반영된다. 시적 주체가 그려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히라노 게이치로가 말한 ‘나’를 알기 위해 그가 주장한 ‘개인’의 뜻을 살필 필요가 있다. 히라노가 말하는 개인은 구체적으로 이렇다. 내 맘대로 그것들을 간추렸다. 다음이 그것이다.

‘개인’. 영어 individual의 어원은 직역하면 ‘불가분(不可分)’, 즉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는 의미이며, 이 말이 오늘날의 ‘개인’이라는 의미로 정착된 시기는 불과 얼마 안 된 근대에 접어든 후였다. (중략) 예를 들면 회사에서 일할 때와 가족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늘 한결같이 똑 같은 나일까? (중략) 인간은 분명 그 자리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표면적으로는 다양한 ‘가면’을 쓰고, ‘캐릭터’를 연기하고, 그때그때 다른, ‘페르소나’를 드러낸다. 그렇지만 그 핵심이 되는 ‘진정한 나’, 즉 자아는 하나다. 바로 여기에 한 인간의 본질이 있고, 주체성이 있고, 가치가 있다. (중략) 개인이라는 말의 어원은 ‘나눌 수 없다’는 의미라고 서두에서 썼다. 이 책에서는 이상과 같은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기 위해 ‘분인(dividual)’이라는 새로운 단위를 도입한다. 부정접두사 ‘in’을 떼어버리고, 인간을 ‘나눌 수 있는’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다. 분인이란 대인 관계마다 드러나는 다양한 자기를 의미한다. 애인과의 분인, 부모와의 분인, 직장에서의 분인, 취미 동아리의 분인…… 그것들이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는다. (같은 책, 10~14쪽 참조)

히라노 식으로 말하자. 그렇다면 정희성 시에서 ‘나’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의 ‘개인’이 아닌 것으로 수용된다. 따라서 화자는 ‘나눌 수 있는’ 분인의 존재로서 ‘그대와 나’로 관계에서 나눠진다. 그렇다. 시인이 말한 ‘그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생명에 감사하는 분인(황홀한 존재), 즉 ‘진정한 나’가 된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분인으로서 인생에 있어서의 가을로 접어든 시적 주체인 분인(쓸쓸한 존재), 이 캐릭터 또한 ‘진정한 나’라고 여겨야 한다. 기꺼이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존중해야지 마땅하다.

정희성의 시를, 문현미 시인은 《시를 사랑하는 동안 별은 빛나고》에서 이렇게 해석했다. 다음이 그것이다.

한 해를 돌아보면 잘한 일도 있겠지만 후회가 되는 일도 따르는 법이다. 어찌 늘 웃고만 살 수 있으며 그렇다고 울기만 할 수도 없다. 울고 웃으며 성과를 위해 질주하는 ‘피로사회’에 살고 있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에서 현대인 스스로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고 갈파했다.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그런 모순을 지니고 있다. 과잉을 향해 치달으며 나를 돌아볼 여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피로는 점점 쌓여간다. (중략) 이런 가운데 시인은 살아 있다는 것을 되짚어보며 가을이 얼마나 활홀한 계절인지 느낀다. 하지만 황홀 속에 맞는 가을을 제대로 감상하기도 전에 주머니가 비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만다. (같은 책, 188쪽 참조)

웃는 것도 ‘나’이고, 우는 모습도 ‘나’인 것이다. 하물며 어떤 때는 내가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는 세상이 우리가 지금 사는 자본주의 세상이고 또 그래서 모순에 따른 분인이 관계에서 절실해지니 한마디로 도심 속 생활이란 피로사회인 것이다.

나는 정희성의 「가을의 시」에서 한 화가의 두 그림이 문득 떠올랐다. 두 그림 모두, 화가가 1885년 그린 작품인데 어쩐지 그림 속 모델이 동일한 인물인지 확인하고 싶다. 하지만 이 몫은 미술사학자에게 고행을 맡기련다. 얄밉다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내가 거기까지 힘이 미치지 못하니 어쩌랴.

각설하고.

이제 화가를 소개한다. 이름은 ‘크리스티안 크로그(Christian Krohg, 1852~1925)’로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이다. 이 화가를 나는 최혜진 작가의 저서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책에는 <크리스티안 크로그와 대화를 나누는 칼레스 룬>, <경찰서장을 만나러 온 알베르티네>, <생존을 위한 분투>, 그리고 <피곤함>이란 제목을 단 그림까지. 총 네 점의 작품이 나온다.

크리스티안 크로그, (피곤함),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오스트리아, 빈 알베르티나미술관.
크리스티안 크로그, (피곤함),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오스트리아, 빈 알베르티나미술관.

그 중에 <피곤함>에 등장한 그림 속 모델이 나는 정희성 시인의 「가을의 시」에 보이는 화자인 것만 같아 애처롭다. 그래서 “잔고가 빈 통장”으로 인한 가난에 찌든 삶으로 그녀가 비춰진다. 그래서 그녀가 나날이 노동에 지쳐 피곤해진, 쓸쓸한 존재로서 의자에서 잠든 모습을 막상 대하자면 “가여운 내 사람아”라고 꼭 말문이 터진다. 그녀가 또한 나인 것만 같다. 이렇듯 감상된다. 그렇듯 그림에서 피로가 누적되고 체감된다. 요컨대 피곤함이 느껴졌다.

법학을 공부하고 엉뚱하게도 기자로도 작가로도 활동했던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의 집안은 상류층에 속한다. 그래서일까. 최혜진은 “할아버지가 노르웨이 수상을 지낸 지도층 집안 출신”(같은 책, 49쪽 참조)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화가의 시선은 대개 “여성, 빈민, 어부와 같은 육체 노동자, 소외된 사람들”을 모델로 그렸다고 설명했다.

어쨌든 가을! 가을은 독서하기 좋은 계절이다. 그림 <피곤함>도 어쩐지 계절에서 분위기가 가을처럼 성큼 다가온다. 나는 그림 속 이 소녀가 크리스티안 크로그가 같은 해(1885년)에 그린 작품 <벨기에 빌라 브리타니아>의 책 읽는 소녀와 겹치면서 동일시가 된다. 그러니까 지난 여름의 끝 무렵, 소녀는 난생 처음으로 고급 빌라 휴양지에서 호사를 누렸던 이력이 있었을 테다. 그 황홀했던 여름의 끝. 화가는 소녀에게 가을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넌지시 알려준다.

미루나무 가로수길, 주인 식구들이 외출하고 없는 사이, 검정색 원피스를 곱게 차려 입은 소녀(하인)는 고급 빌라 베란다에 놓인 의자 두 개를 이용해 하염없이 독서에 몰입한다. 책은 물론 주인집 아줌마가 읽었던 것일 테고. 무튼 소녀에게 이 시간은, 여름의 끝과 가을의 시작은, 순간이야 짧았지만 황홀했을 테다.

화가의 <벨기에 빌라 브리타니아>에는 왕자가 타는 백마가 보인다. 하지만 소녀에게서 백마는 등을 돌리고 풀을 뜯어 먹고 있다. 더군다나 왕자로 보이는 인물은 길 위에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니 차라리, 독서하다 소녀여! 어여 잠들라. 꿈속에서 왕자님 만나는 것도 ‘나’이고 현실에서 노동에 지쳐 피곤한 것도 ‘나’일 테니. 그렇다. 피곤하게 잠든 것도 ‘나’이고 우아하게 네가 본 것도 ‘나’이다. 그게 뭐 어때서. 나한테 뭐, 어쩌라고?

◆ 참고문헌

정희성, 《흰 밤에 꿈꾸다》, 창비, 2019. 문현미, 《시를 사랑하는 동안 별은 빛나고》, 황금알, 2021. 187~189 참조. 최혜진,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은행나무, 2016. 49~53쪽 참조. 박혜진, 《언더스토리》, 민음사, 2022. 60쪽 참조. 히라노 게이치로, 이영미 옮김 《나란 무엇인가》, 21세기북스, 2015. 10~14쪽 참조.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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