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58)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우리들의 헤어짐엔 작별이 있고 이별이 있다. 생각하면 작별은 나의 의지로 이뤄진다. 그러니 하나도 억울할 게 없다. 하지만 이별은 다른 문제이다. 나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청천벽력의 날벼락 같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내 삶은 폐쇄되기 전에 두 번 닫혔다/에밀리 디킨스

내 삶은 폐쇄되기 전에 두 번 닫혔다

그러나 두고 볼 일.

불멸이 나에게

세번째 사건을 보여줄지는.

내게 닥친 두 번의 일들처럼

너무 거대하고, 생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절망적일지는.

이별은 우리가 천국에 대해 아는 모든 것.

그리고 지옥이 필요로 하는 것.

아놀트 뵐크린, (죽음의 섬),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스위스, 바젤미술관.
아놀트 뵐크린, (죽음의 섬),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스위스, 바젤미술관.

작별이 아닌, 이별

이러구러 시월의 밤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 주말인 29일과 30일 이틀 동안 나는 방구석에 탈피 외출했다. 도시를 산책했다. 병점에 사는 친구를 약속 장소에서 만났다. 같이 화성과 팔달산, 광교저수지를 하염없이 걸었다. 어제와 오늘까지 합친 휴대폰의 만보기는 4만의 걸음을 나타냈다. 기록했다.

토요일은 수원 동문에서 시작해, 연무초등학교, 방화수류정, 장안문, 서문, 팔달산 억새밭, 수성약수터, 도청, 그리고 남문시장이 앞에 보이는 둘래길을 따라서 서문, 화홍문, 광교저수지, 연무시장, 동문으로 자연스레 발걸음의 코스가 이어졌다. 산책의 마지막에 우리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연무대를 찾아 ‘연무정’이란 간판을 단 커피숍, 2층에 올랐다.​

아래에 보이는 사진은 ‘연무정’에서 커피를 마시다 하늘이 문득 예뻐 순간을 참지 못하고 찍은 토요일 오후의 가을 풍경이다.

경기도 수원 연무대 활터. 시월의 마지막 주말 풍경.
경기도 수원 연무대 활터. 시월의 마지막 주말 풍경.

이렇게 토요일이 무사히 지난 줄만 난, 알았으니. 그런데 이게 아니었다. 일요일 아침, 뉴스를 통해 이태원 참사 소식을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태원 핼러윈 축제가 당최 뭐라고. 20대와 30대 젊은 남녀 154명(?)이 하루아침에 생명을 잃었다. 세월호 참사 못지않은 사건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들의 헤어짐엔 작별이 있고 이별이 있다. 생각하면 작별은 나의 의지로 이뤄진다. 그러니 하나도 억울할 게 없다. 하지만 이별은 다른 문제이다. 나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청천벽력의 날벼락 같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멀쩡했던 나의 애인을 말 같지도 않은 사고로 잃었다. 또 부모의 사랑이 아직은 필요한 나이의 자녀인데 청춘의 꽃을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한, 못다 핀 꽃 한 송이가 되었다. 억울하게도 축제에 참여한 것뿐인데 이태원 좁은 길 언덕에서 인파에 떠밀려 버티지 못하면서 압사를 당했다. 과잉의 행렬에 넘어지고 인파에 짓밟히며 한순간에 일이관지 심정지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 죽음을 과연 그 누가 원했단 말인가. 아무도 그런 사람 없었을 테다. 그런 주검, 개죽음 말이다.

​신형철의 최신작 《인생의 역사》를 나는 매일 조금씩 정독하고 있다. 오늘 내가 읽은 것들 에는 미국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스의 유명한 시가 있다. 그 시(「내 삶은 폐쇄되기 전에 두 번 닫혔다」)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두 줄에 특히 난, 이 씁쓸한 가을 저녁 오랫동안 멍하니 몰입한다. 다음이 그것이다.

이별은 우리가 천국에 대해 아는 모든 것.

그리고 지옥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

(앞에 인용한) 두 줄의 시를 가지고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책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이것은 세간의 기독교적 관념에 대한 도도한 반론이다. 천국이라는 말은 그를 위로하지 못한다”고 말이다. 말하자면 (내가/가족 등이) 사랑하는 사람이 천국으로 간다는 말은 단지 그 사람이 나를 떠난다는 것만을 의미할 뿐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뜨기만 하면 여기가 지옥”(같은 책, 50쪽 참조)으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신형철의 이러한 시 비평은 마치 이태원 참사자들. 그들의 남은 가족을 생각하며 쓴 글로 내겐 그렇듯 문장이 다가왔다. 또 다음과 같은 신형철의 문장에다 나는 멍하니 연필로 밑줄 치고 여러 번 이해에 도달하고자 오랫동안 곱씹어야만 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사람뿐이다.”(같은 책, 48쪽 참조)

신형철은 책에 강조했다. ‘슬픔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 할 시인’으로 죽은 뒤에야 유명해진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1830~1886)을 기억하라고. 그러면서 말하길, “디킨슨의 시를 읽으면 이 사람은 슬픔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나는, 디킨슨의 시를 읽으면서 무서운 그림이 하나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화가 아놀트 뵐크린(Arnold Bocklin, 1827~1901)이 그린 <죽음의 섬>(1880년 作)이다. 이를 두고 내가 존경하는 미술사학자 일본인 나카노 교코(中野京子) 와세다 대학 교수는 그림 설명을 특유의 해박한 지식으로 차근차근 묘사했다. 다음이 그것이다.

불안감이 깃든 군청색 하늘 아래 잔물결 하나 일렁이지 않는 바다는 끈적함이 느껴질 만큼 검고 끝없이 깊어 보인다.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고, 갯내음도 바람도 느껴지지 않는다. 화면에는 달이 보이지 않지만, 수면에는 달빛이 비쳐 어른거리는 듯하다. 적막한 바다의 고독하고도 환상적인 풍경, 그 가운데로 울퉁불퉁하고 불그르슴한 바위섬이 불쑥 솟아 있다. 섬 깊숙한 곳에 높다랗게 치솟은 몇 그루 사이프러스(삼나무)가 그림에 음산함을 더해 준다. (중략) <죽음의 섬>이라는 제목은 화가 뵈클린이 직접 붙인 게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눈앞의 섬 전체를 묘지라고 말한 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사이프러스, 관, 조각배, 흰옷, 그리고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암벽에 뚫어 놓은 몇 개의 묘혈까지, 갖가지 죽음의 모티브를 흩어 놓은 이 그림은 음울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나카노 교코, 《무서운 그림 2》, 104~105쪽 참조)

​용산 이태원(2022), 죽음의 섬

사실 <죽음의 섬>은 한 미망인이 남편 기일을 맞아 추모코자 화가에게 부탁해서 완성된 작품이라고 그런다. 이 친절한 화가는 의뢰자에게 “이 그림이라면 남편 분의 넋을 달랠 수 있겠습니까?”라고 편지를 썼다. 그리고 미망인은 답장에서 그림을 마음에 들어 했다.

여하튼 앞의 시와 그림을 대하면 나는 세월호 참사자 가족과 마찬가지로, 이번 용산 이태원 참사자 가족은 문득문득 떠올릴 것이다. 슬픔에 빠진 참사자의 가족들은 아마도 한동안(몇 년이 될지 잘 모르겠지만) 그 지옥에서 살아야만 한다. 지옥같은 삶 말이다. 거기에서 가족이라면 그 누구도 쉽게 빠져나오지는 차마 못할 것이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참사가 자꾸자꾸 되풀이, 대한민국에서 발생되는 것일까?

​윤석열 정부는 오늘 일요일, 정부 차원에서 서둘러 대책본부(본부장, 한덕수 국무총리)를 마련 애도기간(11월 5일 까지)을 전격 발표했다. 선언했다. 아울러 합동분향소를 설치하는 소식도 강조했다.

​하지만 뉴스를 바라보는 내 기분은 어딘가 썩 개운치가 않다. 오늘 내 친구가 아침 산책 중에 한 말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다.

​친구는 흥분하는 모습으로 정부의 재난 컨트롤 타워 기능을 문제로 파악하며 언급했다. 이를 요약하면 정부에 대한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만하다.

​태평성대. 그것은 사실 정부가 있는 줄 국민이 잘 모르고 사는 일상의 시대로부터 온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를 모르는 국민이 없다는 현실적인 사실은 거꾸로 말하자면 지금 우리 시대는 태평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이와 다름없다.

​컨트롤 타워.

​이를 옛말로 말하면 ‘입오구중(入吾彀中)’이 적절하다. 뜻은 ‘내 사정 거리로 들어오다’인데, 사자성어는 그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자성어는 태평성대, 이를테면 정관의 치를 이룩한 중국 당나라 2대 황제 이세민이 한 말에서 인용된 것이다. 황제는 치세 초기에 이런 말을 했다. 그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것은 “천하의 영웅들이 내 구중(彀中: 화살이 미치는 범위 안)으로 들어오는구나[天下英雄入吾彀中矣]”라는 말인데, 중국의 인문학자 위치우위는 《중국문화기행 1》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다음이 그것이다.

​당 태종이 궁궐 대문을 통해 새로 과거에 급제한 진사들이 줄지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천하영웅입오구중의)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같은 책, 295쪽 참조)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이 어느 날부터 가족들에게 여기가 생지옥이 되는 이태원 참사! 이런 황망한 대형참사 사고. 사건은 우리에게 세월호 참사에 이어서 얼마나 많아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 땅에서 끝이 언제나 보이고 또 재발되지 않게 될 것인가?

​안전한 대한민국! 그것은 천하 영웅에게서 비롯된다. 지금 대한민국의 영웅을 만드는 그 몫은 당최 누가 최상위 책임을 가지고 권한을 행사하는 것일까?

​아무튼 오늘, 윤석열 대통령은 참담하다는 말로 시작해서 이태원 사고 원인을 철저하게 조사하겠다고 뉴스에서 약속했다. 그다운 목소리다. 조사, 라니. 이 말이 아직도 검찰총장에 머문 대통령인 것 같다. 그래서 자꾸만 거슬린다. 영 찝찝하다.

​도대체 어느 누구한테 사고 책임의 소재를 따지며 떠넘기겠다고 저러는 것일까?

오늘은 2022년 11월 1일. 국가 애도기간(11월 5일 까지)이 전국에서 시작됐다. 여기 지옥에서 나는 여전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그 말 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면서 나는, 에밀리 디킨스의 시와 뵈클린의 그림을 같이 놓고 동시에 쳐다본다.

디킨스 시가 말하는 두 번이나 죽은 사람이 세월호 참사자의 가족인 것만 같고, 두고 볼 일이라는 식으로 안일했다가는 세 번째 (어이가 없는) 죽음이 없으란 법 없다. 이와 같은 컨트럴 타워의 부재에 우리는 절망으로 몸서리를 부르르 치고 떤다. 이제 국민들은 용산 이태원을 죽음의 섬으로 바라볼 것이다. 나아가서 희망은 박근혜 정부에 이어서 윤석열 정부에게 절망으로 두 번 닫히게 되었다. “지옥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 이것을 해방하는 권력이 나는 바로 정치라고 생각한다. 이쯤에서 지금, 내 말은 끝맺는다.  ylmfa97@naver.com

◆ 참고문헌

​신형철, 《인생의 역사》, 난다, 2022. 46~52쪽 참조. 위치우위, 심규호·유소영 옮김 《중국문화기행 1》, 미래인, 2007. 295쪽 참조. 나카노 교코, 최재혁 옮김 《무서운 그림 2》, 세미콜론, 2009. 102~104쪽 참조.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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