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

아내와 가까운 친구에게 정호승의 「문득」을 활용하여, 문자메시지나 SMS를 50자 이내로 써볼 일이다. 아니면 문득 보고 싶어서, 라고 전화를 내가 먼저 해 볼 일이다.

문득/정호승

문득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성산포 앞바다는 잘 있는지

그때처럼

수평선 위로

당신하고

걷고 싶었어요

라우리츠 아네르센 링, (철도 경비원),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스웨덴, 스톡홀름국립미술관.
라우리츠 아네르센 링, (철도 경비원),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스웨덴, 스톡홀름국립미술관.

“지혜와 명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뢰라는 것. 나를 잘 아는, 내 편인, 그런 사람만이 나를 진정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378쪽 참조)

문득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이 쓱쓱 바람처럼 다가와서 침음(沈吟)해도 좋을 한편의 시, 「문득」은 정호승(鄭浩承, 1950~ )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에 보인다. 방구석 미술관을 탈출해서―이건희 컬렉션 덕분에―언제든지 제주도 서귀포(이중섭미술관)에서 그림 감상이 가능해진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1951년 作)은 쿠르베의 사실주의 느낌이 강렬하다. 이중섭미술관 옥상에서 섶섬을 조망하면 얼마든 그것을 가늠하기에 더없이 좋기 때문이다.

이중섭,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20세기, 나무판에 유채,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이중섭,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20세기, 나무판에 유채,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박재삼 시인이 우리말로 옮긴 《이중섭-편지와 그림들》이란 책에도 화가 이중섭(李仲燮, 1916~1946)이 전쟁 중에 가족과 헤어지고 혼자 살던 중에 1951년에 그린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이 작게 나온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구불구불한 황톳길 산책로는 실은 화가가 미치도록 사랑하는 아내와 다정히 걷고 또 걷고 싶었던 그 길일 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화가는 두 번 다시 그곳에 가지 못했다. 1952년 제주도를 떠나 부산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문득

보고 싶어서

화가 이중섭이 쓴 편지와 수많은 그림들은 대개 아내(남덕)와 자식들이 “문득/보고 싶어서”가 그 창작의 배경이라고 나는 감히 억측한다. 그래서 불가피 떨어져 살아야만 했던 이 부부는 전화가 없던 시절에 “전화했어요” 대신에 “편지했어요”로 서른에서 마흔 사이, 사랑의 끈끈한 관계를 서로의 가족이 되어서 겨우 유지했다.

성산포 앞바다는 잘 있는지

와 같이, 더러는 뜬금없고도 생뚱맞고 간략하되 도무지 쓸데없는 말들이 편지에 밀물처럼 들어오고 그림의 물감으로 썰물처럼 스며들어 말라갔을 테다.

나는 덴마크의 화가 라우리츠 아네르센 링(Laurits Andersen Ring, 1746~1828)이 1884년에 완성한 <철도 경비원>이란 그림을 자주 쳐다본다. 핸드폰 사진으로 저장해뒀기 때문이다. 이 그림을 우지현 작가의 《혼자 있기 좋은 방》이란 책에서 처음 보았는데, 그게 벌써 작년이고 라일락꽃이 만발했던 때로 문득 기억난다.

증기 열차가 저 멀리서 들어온다. 뒷모습을 감상자에게 선보이는 철도 경비원은 화가의 시선이 되어서 열차가 곧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고 목격한다. 이 그림도 역시 정호승의 「문득」으로 그림이 시로 이어진다. 외롭게 그렇지만 어딘가 절제된 감정이 돋보이는 철도 경비원의 뒷모습에서 그가 만약 일을 마치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처럼 상상이 얼른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문득/보고 싶어서/전화했어요”라고 말할 것 같다.

우지현 작가의 그림 설명은 이렇다. 다음이 그것이다.

링은 솔직담백한 자세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은 절제된 단정함으로 화면을 조화롭게 묘사했고, 흔들림 없이 담백한 태도를 견지하며 인물을 정직하게 표현했다. <철도 경비원>에서 살펴볼 수 있듯, 극적인 연출이나 극화된 장치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 같은 화가의 시선은 너무도 담담해 우아하기까지 하다. 풍경에 속하지 않고 조금 떨어져서 상황을 바라보는 우회적인 접근 방식과 적극적인 개입 없이 관조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모습은 꽤 영리해 보인다. 그림은 상당 부분 연출되고 창조된 화면이지만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모습이 담긴 정교한 현실이다. 고의로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이지만 삶의 단면을 오롯이 비추는 한 편의 드라마다. 결국, 평범한 장면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화가의 몫이리라. (같은 책, 348쪽 참조)

우지현의 화가에 대한 해석은 내가 정호승 시를 두고 말하고픈 내용과 매우 일치한다. 정호승의 시는 링의 그림처럼 ‘솔직담백한 자세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었다’고 비평해도 좋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시적 주체인 화자가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은 절제된’ 감정으로 시의 완성도를 높이면서 독자를 향해 교묘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성산포 앞바다는 잘 있는지

그때처럼

수평선 위로

당신하고

걷고 싶었어요

이 부분까지 어느새 닿으면 나는 문득 한 그림이 돌연 떠오른다. 노르웨이 출신의 덴마크 화가 페데르 세베린 크뢰이어(Peder Severin Krøyer, 1851~1909)가 그린 작품 <스카겐 해변의 여름 저녁>(1893년 作)이 그것이다.

페데르 세버린 크뢰이어, (스카겐 해변의 여름 저녁),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덴마크, 스카겐미술관
페데르 세버린 크뢰이어, (스카겐 해변의 여름 저녁),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덴마크, 스카겐미술관

아름다운 한 폭의 명화. 이 명화 속에 지중해 푸른 바다와 모래사장을 배경으로 산책의 즐거움을 연출하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두 여성이 스카겐 해변을 걷고 있다. 두 여성의 뒷모습을 카메라 렌즈처럼 잡아당긴 화가의 시선이 포착한 찬란한 그림이다.

그림의 모델로서 왼쪽에 있는 여성은 아나 안셰르, 오른쪽의 여성은 화가의 부인 마리 크뢰이어다. 두 여성 모두, 교수 세버린에게 제자인 셈인데 아나 안셰르는 나중에 화가로도 화가의 부인으로도 성공적인 삶을 살면서 누린다. 하지만 더 재능이 많아 보였던 교수의 부인이 된 마리 크뢰이어는 유명한 화가의 부인은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친구처럼 성공적인 일상의 삶을 누리지는 못했다. 도중에 그녀는 이혼까지 불사하며 뮤즈가 아닌 자기 이름을 건 화가로 거듭나고자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영화 <마리 크뢰이어>(2012년 作)는 참고할 만하다.

하여간 이 그림을 가지고서 정호승의 시를 내가 다시 읽자면 성공한 친구가 된 아나 안셰르에게 마리 크뢰이어가 부러운 나머지 이런 내용이 담긴 짤막한 편지를 시처럼 쓸 것만 같이 느껴진다. 이를테면 “문득/보고 싶어서/편지했어요/스카겐 해변은 잘 있나요/그때처럼/스카겐 해변을/당신하고/하염없이 걷고 싶어요”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와 관련, 최혜진 작가는 책에 마리의 친구 아나 안셰르의 성공 원인이 어디인지를 날카롭게 분석한다 이렇듯 적었다. 다음이 그것이다.

덴마크 국립미술관은 175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 덴마크 대표 화가들을 촘촘히 소개하는데, 이 컬렉션에 대거 자신의 작품을 포함시킨 유일한 여성 화가가 바로 아나 안셰르다. 아나 역시 마리 크뢰에르처럼 재능이 뛰어난 화가를 남편으로 두었다. 당시 여성들의 교육 수준은 극히 낮았다. 여학생을 받아주는 학교 자체가 드물었다. 아나는 여학생을 받아주는 사립 미술 학교를 찾아 고향 스카겐을 떠나 코파하겐으로 와 1875년부터 빌헬름 퀸의 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이 퀸 교수조차 1880년, 결혼을 앞둔 아나에게 해변에 화구를 가져가 모두 버리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결혼한 여성은 예술가가 아니라 가정주부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나 안셰르는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예술가로서 자의식이 확고했다. 남편 미카엘 안셰르와 고향 스카겐으로 돌아가 아틀리에를 나눠 쓰며 평생 그림을 그렸다. 부부의 작업실은 덴마크 미술 황금기를 상징하는 스카겐 박물관 부속 기관으로 재탄생했고, 덴마크 왕실은 아나 안셰르의 작품을 사들였으며, 후대에 아나 안셰르는 남편과 함께 나란히 덴마크 지폐에 얼굴을 올렸다. (최혜진,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59쪽 참조)

김원중 교수가 고전에서 찾은 《서른의 성공 마흔의 지혜》라는 책엔 이런 글이 나온다. ‘자기의 모든 것을 알아주는 친구를 만들어라’가 그 제목인데 내용인즉 고전(열자) 탕문 편을 인용했다. 다음이 그 간추린 내용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알아주는 친구를 만들어라

백아가 줄을 끊은 것은 친구의 도리를 증명한 것이다.

伯牙絶絃(백아절현), 但證知音之道(단증지음지도).

전국시대에 진의 대부로 거문고의 명인인 유백아(愈伯牙)라는 이가 있었다. 백아에겐 종자기(鐘子期)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종자기는 백아의 거문고 타는 소리를 좋아했다. 게다가 종자기는 백아가 거문고를 탈 때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내는데 슬프든 기쁘든 괴롭든 언제나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감상하는 것이었다. (중략) 하루는 백아가 태산 북쪽으로 놀러 갔다가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바위 아래에서 비를 피하게 됐다. 그는 문득 마음이 슬퍼져서 거문고를 당겨 이것을 노래했다. 처음에는 비가 내리는 곡조로 하고, 다음에는 산이 무너지는 소리를 만들었다. 곡조를 연주할 때마다 종자기는 마치 백아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 그의 심경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같은 책, 173~174쪽 참조)

오늘의 결론은 이렇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다. 마리 크뢰이어의 화가로서 실패는 친구 같은 남편을 만들지 못한 것이 그 원인이고, 아나 안셰르는 친구 같은 남편을 만들었다는 것이 사소하지만 극명한 차이점이다.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 맥락에서,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지혜와 명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뢰라는 것. 나를 잘 아는, 내 편인, 그런 사람만이 나를 진정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 결혼을 앞둔 서른에겐 성공 포인트가 과연 무엇인지를 예리하게 시사한다. 또한 마흔이 지난 인생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알아주는 친구를 만들어라’에서 곁에 있는 아내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할 것이고, 무엇보다 주변 친구와의 관계를 다시금 깊이 되돌아보고 세밀하게 살필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그에 앞서, 아내와 가까운 친구에게 정호승의 「문득」을 활용하여, 문자메시지나 SMS를 50자 이내로 써볼 일이다. 아니면 문득 보고 싶어서, 라고 전화를 내가 먼저 해 볼 일이다.

내가 나를 잘 아는 것이 자존감의 ‘믿음’이라고 말한다면, 남이 나를 잘 알아주는 것을 일러서 우리는 ‘신뢰’라고 말하면서 그를 구별하고 우러르며 쳐다본다.

◆ 참고문헌

정호승,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열림원, 1998. 이중섭, 박재삼 옮김 《이중섭-편지와 그림들》, 다빈치, 2000. 18~19쪽 참조. 김원중, 《서른의 성공, 마흔의 지혜》, 위즈덤하우스, 2010. 173~174쪽 참조.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2018. 378쪽 참조. 우지현, 《혼자 있기 좋은 방》, 위즈덤하우스, 2018. 347~348쪽 참조. 최혜진,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은행나무, 2019. 59~60쪽 참조. ylmfa97@naver.com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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