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시어로 쓰인 “저렇게”라는 부사가 돌올하다. 무려 두 번이나 시로 점령하고 등장한다. “이렇게”와 달리 “저렇게”는 물리적인 거리감을 부여한다. 상당한 심리적 간격도 유지한다. 또 “이렇게”라는 부사가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라면 “저렇게”라는 부사는 비자발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라고 분석할 수 있다.

아흔아홉골 단풍/양진건

아흔아홉 골

단풍 보고 있자니

아, 억장이 무너져

나도

언제 한번이라도 저렇게

제 몸 온전히

불사를 수나 있을지.

저렇게

비탈 구르며 달려 와

제 몸 기꺼이

내어줄 수나 있을지.

찬란해라, 절정이여.

서러움이여.

제임스 티소, (요양),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영국, 셰필드미술관.
제임스 티소, (요양),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영국, 셰필드미술관.

“공간적인 차원에서의 위대함은 기세(氣勢)라 하고, 시간적인 차원에서의 위대함을 운치(韻致)라고 한다.” (위치우위, 《사색의 즐거움》, 16쪽 참조)

단풍 여행, 하처추심호?

중국의 석학 위치우위(余秋雨, 1946~ )의 역작 《사색의 즐거움》을 독서하다가 문득 “저렇게”라는 시 한 구절이 입가에 차오른다. 이른바 가을이면 인기리에 회자되는 「아흔아홉 골 단풍」이 그것이다. 명시는 제주도 출신 양진건(1957~ )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귀한 매혹》에 나온다. 앞서 필자가 위치우위의 심오한 문장을 굳이 인용한 까닭은 단순하다. 시인이 말한 “아흔아홉 골/단풍”의 그 아름다움을 위치우이는 ‘위대함’으로 은유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시어로 쓰인 “저렇게”라는 부사가 돌올하다. 무려 두 번이나 시로 점령하고 등장한다. “이렇게”와 달리 “저렇게”는 물리적인 거리감을 부여한다. 상당한 심리적 간격도 유지한다. 또 “이렇게”라는 부사가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라면 “저렇게”라는 부사는 비자발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라고 분석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의 말 “저렇게”라는 부사의 빈번한 사용은 정상인이 아닌 병자 환자로서 화자가 취하는 수수방관자적 관조자로 시에서 암약하고 나타난다. 그렇기에 행동력은 없고 애오라지 의지(意志)에만 집중한다. 그러니까 화자로서 마음만 담담하게 진술하는 서정적인 생각만을 펜 끝으로 또박또박 드러낼 뿐이다.

아흔아홉 골

단풍 보고 있자니

아, 억장이 무너져

나도

언제 한번이라도 저렇게

제 몸 온전히

불사를 수나 있을지.

이 부분에서 나는 병실 창밖, 정원 마당에서 보이는 노랗고 빨간 나뭇잎의 그림이 펼쳐지는 한라산의 스산한 늦가을 풍경이 하염없이 상상된다. “아, 억장이 무너져”는 가서 직접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처지의 “나”도 얼마든지 건강을 한순간에 잃어버릴 수 있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그러면서 시인은 독자(너도)를 생략하되 행간에 몰래 끌어당긴다. 노랗고 빨간 단풍의 나뭇잎처럼 “언제 한번이라도 저렇게/제 몸 온전히/불사”르며 치열하게 열심히 살았는가를 되묻는다. 그러나 이 되물음은 정작 발화자에 치우치지 않고 독자를 향해 깊은 산속 골짝의 나무에서 떨어진 이파리 단풍처럼 철든 사색이 되어 떠다닌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윽고 시인에게 화응한다. 단풍의 나뭇잎처럼 “저렇게/비탈 구르며 달려 와/제 몸 기꺼이/내어”주는 내리 사랑을 온전히 해봤냐고? 자문자답하는 성찰의 시간을 불쑥 갖게 된다. 이것이 이 시가 지니는 고유한 매력이다.

찬란해라, 절정이여.

서러움이여.

이 두 줄의 시는 본문의 대미로 장식된다. “찬란해라, 절정이여.”는 두 말할 나위 없는 늦가을 단풍의 위대함이 강조된다. 문제는 마지막 한 문장이다. 이를테면 “서러움이여.”가 그것인데 이 다섯 글자가 함축하고 자아내는 서정(抒情)은 시의 화자가 병자라는 사실을 더해가고 장소로서 무대가 요양을 위한 건축물(집·병원·요양원)인 것이 뚜렷하다. 하여, 양진건의 시는 화가 제임스 티소(James Tissot, 1836~1902)가 1878년에 완성한 작품 <요양>과 나란히 놓고 감상하고 바라봄에서 맥락이 상통하고 그 맛이 은은하다. 그 냄새가 노골적으로 진하지 않고 그윽한 기세와 운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요양>이란 제목이 붙은 제임스 티소의 그림에 대해 미술평론가 이주헌은 저서 《그리다, 너를-화가가 사랑한 모델》에서 이렇듯 상세하게 설명한 바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티소의 런던 집 정원을 무대로 삼아 그린 그림이다. 그림은 정원의 일부만 보여주지만, 티소가 영국에서 얼마나 크게 성공했는가를 선명히 드러낸다. 티소로서는 멋진 정원이 딸린 이 크고 아름다운 집에 가장 필요했던 안주인이 들어와 매우 행복했을 것이다. 언니에게 얹혀살다 이렇듯 근사한 둥지에서 사랑하는 이와 새 삶을 시작하게 된 캐슬린 역시 참 행복했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 행복이 오래갈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림의 모델이 누군인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캐슬린이라는 주장도 있고, 직업 모델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캐슬린의 운명을 암시하듯 그림은 병으로 고생하는 젊은 여인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 그림은 티소가 캐슬린을 만난 해에 그려졌다. (같은 책, 115쪽 참조)

영국 셰필드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요양>이란 그림은 미술 전문 작가 우지현의 《혼자 있기 좋은 방》에도 보인다. 우지현의 그림 해석은 시적이다. 다음이 그것이다.

정원에 가을이 찾아왔다. 나뭇잎이 초록색에서 노란색으로 물들고, 바람이 불자 연못 위로 잔물결이 일렁인다. 꽃, 나무, 화분, 낙엽, 연못, 기둥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날씨가 꽤 쌀쌀한 것일까? 어깨에 도톰한 숄을 두른 모녀가 의자에 앉아 있다. 근사한 다과상이 차려져 있고 어머니의 손에는 책이 들려 있지만, 왠지 분위기가 무거워 보인다. 어머니의 신경은 온통 딸에게 쏠려 있다. 그녀가 많이 아프기 때문이다. 딸이 병약한 것이 괜히 죄스럽고 안쓰러운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살핀다. 딸 역시 건강을 회복해서 기운을 차리고 싶지만 심신이 너무 지쳐있다. 파리하게 시들고 야윈 모습이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지 아예 등을 돌리고 앉았다. (같은 책, 237쪽 참조)

그림의 모델인 어머니의 손에 보이는 책은 정체가 소설이나 시집, 에세이 중에 하나일 것이다. 만약 그것이 명시가 실린 시집이라면 인용한 양진건의 시 한편도 오롯이 있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시가 요양하는 딸에게 정신적인 치유에서 만족감을 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시를 읽고 그림을 보는 까닭은 의외로 단순하다. 시간이나 노동에서 아주 짧은 수고를 독자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감나무가 있는 단풍의 절정 가을 풍경을 차마 잊거나 놓칠 수가 없다. 서울대 이종묵 교수가 쓴 역작 《한시 마중》에는 이런 글이 등장한다. 다음이 그것이다.

감나무가

있는 풍경

감나무는 가을이 가장 아름답다. 붉게 타는 단풍나무의 잎도 곱지만, 붉은빛과 노란빛이 자연스럽게 흩어진 단풍이 든 감잎은 그에 못지않게 아름답다. 조선 초기의 문인 강희맹(姜希孟)의 시 중에 명구로 회자되는 “감잎이 막 떨어지자 붉은빛이 온 성에 가득한데, 뽕나무 그늘 드리워지자 푸른빛이 집을 숨겨놓았네[柹葉初稀紅滿城 桑陰重合綠藏屋]도 붉은 감잎의 아름다움을 말한 것이다. 이런 감나무가 있는 풍경을 방외(方外)의 시인 김시습(金時習)이 멋지게 그려놓았다.

어디에 가을이 깊으면 좋은가

예닐곱 인가가 있는 어촌이라네.

맑은 서리에 감나무 잎은 훤한데

푸른 물결에 갈대꽃이 일렁인다네.

구불구불한 대 울타리 아래에

비뚤비뚤한 이끼 낀 길이 멀어라.

가을바람에 낚싯배 한 척 띄우고

안개와 노을을 따라 돌아가리라.

何處秋深好 하처추심호

漁村八九家 어촌팔구가

淸霜明柿葉 청상명시엽

綠水漾蘆花 녹수양로화

曲曲竹籬下 곡곡죽리하

斜斜苔徑賖 사사태경사

西風一釣艇 서풍일조정

歸去逐煙霞 귀거축연하

김시습은 흰 갈대꽃 피고, 감나무 잎 붉게 물든 어촌을 그렸다. 대울타리 아래 고불고불 길 하나 뻗어 있다. 앞개울에 작은 배 한 척 띄우고 낚시를 즐긴다. 꿈에 그리는 낙원이 이런 곳이 아닐까. (같은 책, 51~52쪽 참조)

방외지사 김시습의 한시를 깊이 음미하며 읽노라면, 한눈에 관광지 삼척 죽서루가 그림으로 세워진다. 또한 죽서루 마루에 양반자세로 앉노라면, 오십천 개울가를 새처럼 스치는 한 척의 낚싯배가 느긋하게 연상된다.

하처추심호(何處秋深好)?

어디에 가을이 깊으면 좋은가? 하고 가까운 친구나 주변의 지인이 묻는다면 가장 먼저, 문경새재 도립공원 드라마 세트장 한옥에 가보라고 답할 것이다. 그곳 한옥 마당엔 감나무가 주렁주렁 즐비하니까 말이다. 다른 곳은 또 어디? 이렇게 누군가 묻는다면 영주 무섬마을 외나무다리에 한 번쯤 서 보라고 권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경주 대릉원 주변 마을을 추천할 것이고 마지막엔 강원도 삼척이나 강릉 선교장 주변의 마을까지도 추천하고 싶다. 그곳은 하나같이 상강(霜降) 무렵이 단풍의 늦가을로 치닫는 ‘감나무가 있는 풍경’으로 더없이 좋은 여행지가 될 거라고. 이렇듯 감히 소개할 것이다.

시에서 화자는 갑작스런 발병으로 고만 발이 묶였다. 그렇기 때문에 “저렇게”라고 우리 산하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그림에서 모델은 또 어떠한가. 젊은 처자가 아프고 병들어서 요양을 한다. 그것도 노란 단풍이 가득한 정원이 보이는 저택에서. 아픈 딸을 요양하기 위해서 늙은 어머니는 옴짝달싹 함부로 외출하지 못한다.

위치우위의 글 중에 이런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다음이 그것인데 오늘의 시와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도움을 받고자 여기에 그대로 소개한다.

길을 떠나 낯선 세상을 만나고 좁은 좌표에서 벗어나는 일. 이를 거부하는 이들은 날이 갈수록 삭막해지고 고집을 부리며, 더욱 보수적이고 이기적인 인물이 되고 만다. 이와 달리 아무 말 없이 산천을 누비고 고독과 함께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은 인류의 생태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폭 넓은 시야로 세상을 관찰하며 동정심을 가지게 된다. 그들은 차가운 현실을 파고드는 난류가 되어 거시적인 공평함을 실현한다.

여행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람과 자연을 더 친밀하게 하고, 고독한 생명에 드넓은 공간을 제공하며, 젊은이들에겐 인생의 굴곡 앞에서도 언제나 희망이 있음을 일깨워주며, 노인들에겐 한동안 살아왔던 세상에 당당하게 작별을 고할 수 있는 권리를 준다. (위치우위, 《사색의 즐거움》, 94쪽 참조).   ylmfa97@naver.com

◆ 참고문헌

양진건, 《귀한 매혹》, 문학과지성사, 2008.  위치우위, 《사색의 즐거움》, 이다미디어, 2010. 16쪽, 94쪽 참조.  이종묵, 《한시 마중》, 태학사, 2012. 51~52쪽 참조.  이주헌, 《그리다, 너를-화가가 사랑한 모델》, 아트북스, 2015. 115쪽 참조.  우지현, 《혼자 있기 좋은 방》, 위즈덤하우스, 2018. 236~237쪽 참조.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저작권자 © 스페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