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높이’는 수직상승의 출세에 대한 현재의 욕망을 간직한다. 하지만 이 간직은 양질의 전화로 ‘깊이‘로 사고(思考)가 전환되며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치는 미래의 자화상으로 간직된다. 이는 시적 주체가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고통의 목소리, 이를테면 ’자성(自省)‘이라고 할 수 있다.

속리산에서/나희덕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먹고 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주었다

빈센트 반 고흐, (생폴 병원 정원의 소나무와 민들레),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 국립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생폴 병원 정원의 소나무와 민들레),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 국립미술관.

“시인은 언어를 통해 단순히 삶을 되비추고 돌아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돌아봄 속에서 작고 사소한 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현실을 기존과는 다르게 조직해나가는 것이다.” (문광훈, 《예술과 나날의 마음》, 148쪽 참조)

산 속에 갇히는 시간, ‘나’를 돌아봄

지난 주말, 커피숍에서 친구들하고 곧 오는 시월이면 속리산 단풍여행을 떠나기로 별안간 약속했다. 약속하고 보니 불현듯 시제목이 솟구친다. 시인 나희덕(羅喜德, 1966년~ )의 명시 「속리산에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시는 나희덕의 세 번째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에 나온다.

청수재(淸受齋). 내 안방 서재의 이름이다. 서재엔 시집이 약 300권 꽂혀있다. 그 중에 정호승, 안도현, 문태준 시집이 가장 많이 보이고, 다음으로 천양희, 나희덕 시집이 나오며 순위 다툼을 옥신각신 차지한다. 그밖에 시인들이 나머지를 차지하는 시집들로 놓인 서가의 그림이다. 내가 소장한 나희덕의 《그곳이 멀지 않다》는 2022년 개정판이다. ‘개정판 시인의 말’에 이런 글귀가 첫 줄로 홀연 등장한다. 다음이 그것이다.

“1997년에 나왔던 시집을 옛집에 돌아온 듯 다시 읽으며 서른 살 무렵의 나를 만났습니다.” (같은 책, 7쪽 참조)

1997년. 이 해의 나는 우리나이로 서른넷(34세)이었고 시인은 서른하고 둘(32세)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도 서른둘(1995년)에 속리산을 찾아갔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여태 두 번 다시 그 산에 가보진 못한 셈인데 함께 이번 여행을 떠날 친구들에게도 물으니까 그들도 고등학생 때 수학여행 이후로는 아직까지 한 번도 속리산을 찾지 못했다고 푸념했다. 내년이면 나이가 육십 줄인데…….

작년 초. 2월의 어느 겨울밤. 서점에서 사자마자 하루에 몰아서 추운 줄 모르고 다 읽었던 책, 나무 인문학자 강판권 교수가 쓴 《숲과 상상력》이란 도서에는 ‘속리산’과 관련, 이런 주옥같은 글이 등장한다. 다음이 그것이다.

속세와 속리 사이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속세라 부른다. 속세는 평범한 곳이고 고상하지 못한 곳이다. 그러나 인간은 속세에 살면서 끊임없이 고상한 어떤 곳을 찾아 나선다. 이같이 속세에서 벗어나는 것을 속리(俗離)라 하므로, 속리산으로 가는 길은 속세를 떠나는 여정인 셈이다. 그러나 속세와 속리는 애초부터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속리산으로 간다고 해서 속세와 이별하는 것도 아니고, 속리산으로 가지 않는다고 해서 꼭 속세에 사는 것도 아니다. 떠나다는 뜻의 ‘리(離)’에는 ‘만나다’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속리산도 속세에서 떠난다는 것이 아니라 속세에 산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일지도 모른다. (같은 책, 28쪽 참조)

여기까지 읽었다면, 다시 나희덕의 시로 되돌아가서 처음부터 꼼꼼하게 필사하는 마음으로 읽어볼 일이다. 그러면 고작 나이 서른으로 시적 주체인 ‘나’를 따라하는, 속리산 산행 법주사 가는 길이 마냥 힘든 “가파른 비탈만이”이 아닌 것이 된다. 그렇다. 세조의 정이품송 소나무를 지나, 호서제일가람 일주문에서 법주사로 들어가는 그 길은 십리도 아니고 고작 오리의 평탄한 숲길인 것이다. 이러니 천만다행이란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서른의 시인이 말했던 “순하디순한 길”을 가리켜서 속리산을 찾는 관광객은 강조하길 흔히 ‘세조길’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니까 세조길은 법주사 주차장부터 세심정, 저수지와 계곡을 따라 법주사 경내로 이어지는 완만한 높이의 산책코스로 작은 풀과 고풍스런 나무가 잘 조화되고 구성된 멋진 숲길일 것이다. 아무튼 그 숲길을 시인은 이렇게 묘사한다. 더불어서 그림처럼 우리에게 안내한다.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고 단순하게 보여준다.

시인은 시작(詩作) 전문을 통해 구두점을, 즉 쉼표를 딱 두 군데만 배치했다. 먼저 하나는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에서 쉼표가 분명히 확인된다. 이는 독자를 위한 섬세한 배려이다. 그러니까 독자인 우리는 산 속에 갇힌 시간의 장소로 상상되는, 예컨대 법주사 경내 아무 곳에서나 잠시 앉아 머물고 쉬어가면 된다. 그러니까 이 첫 번째 쉼표는 속세와의 완전한 이별인 셈이고 내가 속리산에 더 깊이 들어가는 물아일체(物我一體) 느낌을 절로 자아낸다. 다시 말해서 “가파른 비탈만이”로 시작되는 산행은 “산 속에 갇힌 시간”에서 자성(自省)의 절정과 휴식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따라서 하산은 첫 번째 쉼표로부터 거꾸로 이어지는 문장의 호흡에서 문득 만져진다.

첫 번째 쉼표까지가 ‘속리’의 산행이라면 두 번째 쉼표가 드러나는 시의 석 줄 부분인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먹고 살던/그 하루하루가/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는 ‘속세’와 만나는 속리산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단지 세 줄로 요약하며 속리산의 정체성을 한 눈에 파악한 것이다.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주었다

라고 속리산에서 첫인상을 독백한 것이다. 여기서 ‘높이’는 수직상승의 출세에 대한 현재의 욕망을 간직한다. 하지만 이 간직은 양질의 전화로 ‘깊이‘로 사고(思考)가 전환되며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치는 미래의 자화상으로 간직된다. 이는 시적 주체가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고통의 목소리, 이를테면 ’자성(自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이 자신을 소인이 아니라 군자가 되길 바라면서 채찍질하고 단속하는 절제를 속리산 산행을 통해 성찰하고 주재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우리가 제때 배우고 제때에 익혀야 되는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우리는 고전 《논어》에 등장하는 명문장에 다시 주목해서 천천히 읽을 필요가 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저서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에 등장하는 논어 에세이(안연)를 여기에 그대로 인용코자 한다. 다음이 그것이다.

사마우가 군자에 대해서 물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걱정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마우가 말하기를, “걱정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를 군자라고 이를 수 있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안으로 반성하여 거리끼지 않으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랴?”[司馬牛問君子. 子曰, 君子不憂不懼. 曰, 不憂不懼, 斯謂之君子矣乎. 子曰, 內省不疚 夫何憂何懼] (같은 책, 173쪽 참조)

이 명문장을 나는,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과 함께 공유할 것이다. 그것도 나희덕의 명시와 더불어서 말이다. 말하자면 한 편의 시와 논어 에세이 한 구절과 랑데부인 셈인데 이왕이면 내가 최근에 본 한 책에서 발견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그림 <생폴 병원 정원의 소나무와 민들레>(1890년 作)도 동시다발로 보여주려고 한다.

이 그림에 대한 미술사학자 정하윤 작가의 작품 설명 짤막한 글 중에는 인상적인 구절이 나온다. 다음이 그것이다.

“커다란 소나무와 그 아래 핀 수많은 민들레를 보면, 자신도 민들레였으면서 또 다른 민들레들에게 소나무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정하윤, 《꽃 피는 미술관》, 196쪽 참조)

여기에서 ‘높이’는 그림에선 ‘소나무’로 비유되고 시에선 ‘비탈’로 시작되고, ‘깊이(넓이)’는 그림에선 수없는 ‘민들레꽃’으로 비유되고 시에선 ‘순하디순한 길’로 끼쳐온다. 화가 빈센트가 생레미 정신병원 겸 요양원 시절에 그린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하자면, 일부러 높이를 자르고 근경에 소나무 밑의 평면에 온통 민들레꽃을 최대한 넓게 그린 것이 파악되고 목격된다. 이는 나희덕의 시선과 같은 연장선상에 화가의 시선이 닿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 아파보니까 인생은 ‘높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깊이’가 더 중요함을 알리고자 소나무의 높이가 전혀 보이지 않는 병원 정원의 민들레들 모습만을 오로지 거의 그린 것일 테다.

강판권 교수에 따르면, 속리산 법주산 오리숲 산책로에는 갈참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등 참나무 종류가 많다고 한다. 그중 갈참나무의 모습이 아주 웅장하다고 그런다. 이 갈참나무의 넓은 잎들이 알고 보면 울긋불긋 속리산 단풍의 아름다움을 최고조로 장식하는 그 주인공인 셈이다. 건강을 잃으면 병원 밖 정원을 서성이고 쳐다보는 것이 일상이 된다. 심할 경우, 친구도 멀어지고 가족도 찾지 않는다. 더 늦기 전에,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면 충북 보은에 위치한 속리산을 한번쯤은 찾아볼 일이다. 속세를 하루쯤은 무작정 떠나볼 일이다. 이 가을 예쁜 단풍이 다 떨어지기 전에. 이 말을 친구들에게 꼭 하고 싶었다.

여하튼 돌봄은 ‘높이’를 말하고 돌아봄은 ‘깊이’를 강조한다. 그래서 돌아봄의 ‘아’는 나를 뜻하는 ‘我’ 자로 인식된다. 그러니 ‘돌我봄’으로 지나온 내 삶을 다시 비춰보는 반성(反省)을 자극하는 시와 그림을 어찌 찾지 않고 또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 참고문헌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문학동네, 2022.  정하윤, 《꽃 피는 미술관》, 이봄, 2022. 196쪽 참조. 문광훈, 《예술과 나날의 마음》, 한길사, 2020. 148쪽 참조.  김영민,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사회평론, 2019. 197쪽 참조.  강판권, 《숲과 상상력》, 문학동네, 2018. 28~30쪽 참조.  ylmfa97@naver.com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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