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연애의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는 인생의 시기는 “꽃 같은” 서른 즈음이다. 그렇다면 결혼은 현실이기에 돈이 많이 필요하고 사귐의 정이 활발해져야 하는 시기이니 비유하자면 우정이 돈독해져야 하는 “잎 같은” 마흔으로 세워진다. 나머지 “뿌리 같은”은 나이가 오십이 되어야 비로소 바닥이 보이는 가족이라는 인연을 생각으로 강화한다.

귀가 서럽다/이대흠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

문득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네

사랑했던가 아팠던가

목숨을 걸고 고백했던 시절도 지나고

지금은 다만

세상으로 내가 아픈 시절

저녁은 빨리 오고

슬픔을 아는 자는 황혼을 보네

울혈 든 데 많은 하늘에서

가는 실 같은 바람이 불어오느니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어리고

향기는 번져 노을이 스네

꽃 같은 잎 같은 뿌리 같은

인연들을 생각하거니

귀가 서럽네

이인상, (병국도(病菊圖)), 18세기, 종이에 수묵, 국립중앙박물관
이인상, (병국도(病菊圖)), 18세기, 종이에 수묵, 국립중앙박물관

“시는 시인이 사물과 만나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풀어놓는 마당이다. (중략) 시는 우리의 주변을, 소리와 빛과 거리와 바람과 나무와 장소를 다시금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문광훈, 《미학 수업》, 226~227쪽 참조)

병든 국화, 그리고 나의 시절 인연들

한 번 보고, 두 번 혹은 자꾸만 손이 가는 그런 책이 있긴 하다. 미술사학자 이선옥 전남대 교수가 쓴 《사군자-매란국죽으로 피어난 선비의 마음》을 올해 들어서 두 차례나 완독했다. 책 속(제4부)에 등장하는 ‘서리를 이긴 은은한 향취의 국화 그림’ 편을 읽다가 능호관 이인상의 <병국도> 그림에서 퍼뜩 이대흠(李戴欽, 1968~ )의 시 「귀가 서럽다」의 한 구절이 묻어났다. 이를테면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어리고”가 그것이다. 여기서 문득 시적 주체가 되어 상상의 경험으로 창밖의 마당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그랬다. 거의 생명이 죽어가는, 시들어 마른 그리하여 병든 국화 몇 송이가 그림 <병국도>처럼 눈앞에서 얼씬대며 나타났다.

문인화가 이인상이 그린 <병국도>를 가까이 바라보자. 이 그림에는 이른바 화제가 허전해 질 여백을 채우면서 먹 선으로 녹아든다. 여덟 글자다. “남계동일우사병국(南溪冬日偶寫病菊)”이란 내용이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감을 맞추면서 쓰윽 비집고 들어온다. 남계(南溪)는 서울 ‘남산 개울가’라는 뜻으로 그가 말년에 살던 집 근처를 의미한다. 또한 동일(冬日)은 ‘겨울의 어느 날’이라는 말일 테다. 그러니 늦가을에 남산 시냇가로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바위에 기대어 병든 국화꽃(病菊)을 쳐다본 것을, 차마 못 잊어 붓을 든 나날은 겨울이 되어서야가 맞다. 물기 빠진 갈필(渴筆)로 얼른 스케치를 하듯이 그렸다(寫). 화제가 그것을 감상자인 우리에게 설명한다.

이선옥 교수의 <병국도> 그림 설명은 이러하다. 다음이 그것이다.

국화는 시드는 것이 안타까웠던 주인이 세워 준 가는 대나무 가지에 간신히 몸을 의지하고 있다. 마른 붓으로 끊어질 듯 이어지게 그린 줄기와 꽃은 찬바람에 몸을 맡긴 채 고개를 떨구고 의지하고 있다. 옛 시인도 바람 앞에 떨어지는 국화 꽃잎을 상심하여 차마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국화를 받쳐 주고 있는 바위도 마른 붓으로 겹겹이 그려 병든 국화의 형상과 다를 바 없다. 이처럼 말라빠진 국화 한 그루는 마치 자신의 처지를 나타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인상은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서출이었기 때문에 높은 벼슬은 할 수가 없어 현감 벼슬을 끝으로 나이 마흔에 은퇴하여 글씨와 그림으로 일생을 보냈기 때문이다. (같은 책, 220~221쪽 참조)

이대흠 시인의 그림 같은 시 「귀가 서럽다」의 시적 완성은 그 시기가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이라는 구절로 미루어서 짐작컨대 겨울날(冬日) 완성작으로 여겨진다. 하물며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로 꺼내드는 발화(發話)는 또 어떠한가. 그 목소리가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생각하며 그린 그림 <귀거래도>의 뱃전에서 아스라이 퍼지면서 가물가물 들리는 듯하다. 이렇듯 작은 배에 앉아 머리에 두건 쓴 도연명은 이미 지나친 강물을 한참 바라보며 집 앞에서 절로 찬탄했을 테다. 참고로 여기에 소개하는 <귀거래도>는 19세기 중인화가 고람 전기(田琪, 1825~1854)가 그린 작품으로 유명하다.

전기, (귀거래도(歸去來圖))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삼성미술관 리움
전기, (귀거래도(歸去來圖))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삼성미술관 리움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

문득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네

사랑했던가 아팠던가

목숨을 걸고 고백했던 시절도 지나고

지금은 다만

세상으로 내가 아픈 시절

누구나 서른이 지나 마흔이 닥치고 쉰에 이르면 ‘그럴 때’를 한두 번쯤 우연하게 마주친다. 그런 거다. 이것이 우리네 인생살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를 이대흠 시인은 “지금은 다만/세상으로 내가 아픈 시절”이라고 마른 붓으로 압축해서 적어내며 시어로 묘사했다. 사실상 ‘세상으로’의 ‘로’는 ‘路’로서 밟아야 되는 피하지 못하는 길이 되어 우리네의 인생살이 세태의 아픈 과정을 드러낸다.

“문득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시기로는 대략 서른 즈음이 얼추 맞을 테다. 그래서 우리는 가수 김광석이 부른 「서른 즈음」에 탐닉해 사랑하게 되고, 또 가슴앓이로 아파하는 것이다. 연애와 결혼, 그리고 첫 출산에 이르는 과정은 정말 “목숨을 걸고 고백”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수반한다. 이 과정이 끝나면 우리는 어느새 마흔이 되어 있고 꽃 같은 “시절도 지”나감을 간신히 간수하고 인정한다. 그리하여 나이 오십, 쉰에 다다르면 “세상으로 내가 아픈 시절”을 몸소 겪게 된다. ‘몸소’에는 ‘연인’ ‘친구’ ‘가족’ 등이 나무의 나이테처럼 무늬로 생겨나고 얼룩지며 함축된다.

이와 관련, 사마천이 쓴 《사기》‘급정열전’엔 좋은 글이 보인다. 이 기막히고 날카로운 글은 시인이 앞에서 언급한 ‘세상으로’에 속속 집결한다. 콕콕 박히면서 개인의 상처로 이어지고 병으로 맞닿는다. 다음이 그것이다.

“한번 죽고 한번 살아봐야 비로소 사귐의 정을 알게 되고, 한번 가난해지고 한번 부귀해봐야 비로소 사귐의 양태를 알게 되며, 한번 귀해지고 한번 천해지면 이내 사귐의 정이 드러난다.” [一死一生, 乃知交情. 一貧一富, 乃知交態. 一貴一賤, 交情乃見.]

세상의 인심이 자고로 그렇다. 시인이 묘사한 “세상으로 내가 아픈 시절”에는 각종 사교에서 빚어지는 인정이 드러나고 심지어 뒤늦은 후회와 뼈아픈 성찰이 인생살이로 잔뜩 웅크리며 도사린다. 그렇기 때문에 서른이 지나고 마흔의 나이가 된 시적 주체인 ‘나’는 사계로 비유하자면 ‘가을’인 국화꽃 피는 ‘시월쯤’을 문득 맞이한다. 이 나이쯤 되어 보면 비로소 알게 된다. 왜 그렇게~

저녁은 빨리 오고

슬픔을 아는 자는 황혼을 보네

울혈 든 데 많은 하늘에서

가는 실 같은 바람이 불어오느니

를 저절로 연상케 하는 한 그림.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작품 <절규>(1893년 作)가 그저 남들 얘기 같진 않고 꼭 나 같은 것 같아서 아연 정체가 불분명한 감동의 뭉클함으로 내부 시선이 차서 가까스로 ‘나’를 일으키며 창가로 인도한다. 그리하여 지금껏 보지 않았던 창밖으로 먼 곳을 향해 내다보게 시선을 들이댄다.

에두바르트 뭉크, (절규),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오슬로 뭉크미술관.
에두바르트 뭉크, (절규),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오슬로 뭉크미술관.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어리고

향기는 번져 노을이 스네

꽃 같은 잎 같은 뿌리 같은

인연들을 생각하거니

연애의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는 인생의 시기는 “꽃 같은” 서른 즈음이다. 그렇다면 결혼은 현실이기에 돈이 많이 필요하고 사귐의 정이 활발해져야 하는 시기이니 비유하자면 우정이 돈독해져야 하는 “잎 같은” 마흔으로 세워진다. 나머지 “뿌리 같은”은 나이가 오십이 되어야 비로소 바닥이 보이는 가족이라는 인연을 생각으로 강화한다.

아무튼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어리”는 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도연명의 그 유명한 시구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까지 하염없이 차오른다. 문제는 ‘유연(悠然)’에 대한 해석이다. 다시 말해서 「귀가 서럽다」의 시적 화자가 취하는 시선이 나는 도연명스럽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 그런 얘기이다. 이와 과련, 미술사학자 고연희가 책에서 설명한 ‘유연(悠然)’을 인용, 여기에 소개한다. 다음이 그것이다.

국화를 들고 남산을 바라볼 때 도연명은 ‘유연’히 바라보았다. 한시 번역을 배울 때 해석하기 어려운 표현의 좋은 예가 ‘悠然’이었다. 생각 없이, 그러나 멍청하지 않게, 아니 좀 그윽하게? 아무튼 ‘유연’은 바라보려고 계획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는 것이다. ‘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 두 구절을 만고의 명구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단어가 ‘유연’이었다. (고연희, 《고전과 경영》, 197쪽 참조)

이제 오늘의 시와 그림 이야기를 이쯤에서 정리해 나는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대흠 시인의 마지막 문장 “귀가 서럽네”는 따로 한 줄로 1연과 달리 2연을 독차지해서 시적 완성으로 귀결되며 끝맺는다. 이 시적 문장의 품격은 상당한 퇴고가 화가의 최종 붓질처럼 여러 번에 걸친 쾌거라고 나는 읽었고 유추한다. ‘귀’는 이목구비에서 첫 번째로 시비(是非)가 닿아지는 경계이고 지점이다. 이 절규(“귀가 서럽네”)를 완결로 끝내 말하고자 시인은 절치부심 2연을 따로 시의 형식으로 마련해 독자에게 배치했다. 이 점이 백미이다.

문광훈 교수의 말마따나 우리는 이제 “시는 시인이 사물과 만나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풀어놓는 마당이다. 그러므로 시를 읽는다는 것은 우리(독자)가 이 만남의 광장에 들어 산다는 것이고, 사물과 만나는 시인의 감정을 우리가 다시 나눈다.”(문광훈, 《미학 수업》, 226쪽 참조)는 측면에서 시절-꽃 같은 잎 같은 뿌리 같은-인연을 그림과 함께 차근차근 경험해 보는 것이다. 나는 이대흠의 시에서 서른과 마흔, 쉰의 나이에 해당하는 ‘나’를 만났고 이인상의 <병국도>와 전기의 <귀거래도>, 그리고 뭉크의 <절규>를 그림으로 연상했다. 당신은 이 시를 읽고 어떤 그림이 불쑥 떠올랐는지 진지하게 묻고 싶은 지금은 내겐 그런 가을이다.

◆ 참고문헌

이대흠, 《귀가 서럽다》, 창비, 2010. 문광훈, 《미학 수업》, 흐름출판, 2019. 226~227쪽 참조. 이선옥, 《사군자-매란국죽으로 피어난 선비의 마음》, 돌베개, 2011. 220~221쪽 참조. 고연희, 《고전과 경영》, 아트북스, 2020. 197쪽 참조.  ylmfa97@naver.com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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