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가을 엽서」는 빈센트의 그림들과 썩 잘 어울린다. 그림 속 가로수길을 독자가 되어 어렴풋이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혼자 걷는 외로움은 사라지고, 문득 나란히 둘이 걷는 낙엽이 쌓인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포플러 거리의 가을 풍경>은 사랑을 잃은 사람에게 위안이 되고, <알리스강의 풍경>은 사랑하지만 생활은 가난한 부부에게 치유가 되리라고 짐작되며 기대된다.

가을 엽서/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빈센트 반 고흐, (포플러 거리의 가을 풍경(Avenue of Poplars Autumn)),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포플러 거리의 가을 풍경(Avenue of Poplars Autumn)),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시를 읽는다는 것은 독자가 자유로운 꿈을 꾸는 일이다. 시인의 손을 떠난 작품은 전적으로 독자의 상상력 속에 만들어진다. ” (금은돌, 《한 칸의 시선》, 228쪽 참조)

낙엽,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가

인용한 한 편의 시를 비평하자면 뭐랄까. “평범한 듯이 보이면서도 가장 기발하고, 쉽게 지은 것 같으면서도 매우 고심하였다(看似尋常最奇崛, 成如容易却艱辛)”라는 말로 무릇 경청 할까나. 이렇듯 중국 송나라 때 왕안석은 한 편의 시를 읽는 맛을 우려내고 지적했다. 여기서 시는 당나라 시인 장적의 「가을 생각(秋思)」을 두고서 말함이다. 내친김에 그 유명한 당시 한 편을 여기에 옮겨 소개한다. 다음과 같다.

가을 생각(秋思)/장적(張籍)

洛陽城裏見秋風 낙양성리견추풍

欲作家書意萬重 욕작가서의만중

復恐匆匆說不盡 부공총총설부진

行人臨發又開封 행인임발우개봉

낙양성에서 가을 바람을 보고

집으로 보낼 편지를 쓰려 하니 생각이 첩첩하다

그런데도 총총히 쓰느라, 할말을 못다한 듯하여,

가는 사람이 떠나려 하는데 다시 뜯어본다.

바람이 분다. 그것도 9월 우리 명절 추석(秋夕)을 앞두고서. 추석이 좋은 이유는 역시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이 제사 지내는 한 집에 모두 오붓하게 모임을 들 수 있다. 모처럼 슬하에 자녀들이 “한 잎 두 잎 나뭇잎이/낮은 곳으로/자꾸 내려앉”는 그 이치처럼 하나 둘 모일 것이고, 다 늙은 부모는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음식을 바리바리 장만하고, 덩달아 이웃에 사는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추석은 그야말로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그대여/가을 저녁 한때/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사랑은 왜/낮은 곳에 있는지”에 대해서 질의응답의 사유를 건설한다.

그림엽서. 뒷면엔 예쁜 그림이나 계절 사진이 인쇄되고 앞면엔 내 글씨로 삐둘빼둘 줄 맞춰서, 내가 사모하는 그대에게 안부를 총총(匆匆·급한 모양) 묻는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적었던 청춘의 시절이 상상되는, 한편의 시 「가을 엽서」는 안도현(安度眩, 1961~ )의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에 나온다.

나는 시 속에서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그림 <포플러 거리의 가을 풍경>(1884년 作)이 연상된다. 자구 생각나서 지난 추억이 부대낀다. 여하튼 이 그림을 엽서 뒷면에 채우고 앞면에는 안도현의 시로 반쪽을 박아 나머지 여백에 그대를 위해 펜으로 직접 몇 자 쓰고 싶다. 아마도 내용은 두 줄 자리가 될 것이다. 이렇게 말이다.

가을 저녁 한때, 빈센트의 그림처럼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황금빛으로 물들거든 그대를 만나고 싶다.

라고 적는다면 그대에게서 답장이 그림엽서로 돌아올까, 이것이 궁금하다. 어쩌면 그대는 나처럼 빈센트의 또 다른 그림 <알리스강의 풍경>(1888년 作)이 뒷면에 새겨진 그림엽서를 각별히 선택하는 센스를 발휘할지도. 그러면서 이왕이면 다홍치마 격으로 고은 시인의 시 「가을편지」의 일부를 혹여 인용할지도. 다음과 같이 말이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_ (고은, 가을편지, 부분)

우리 만나요, 라고. 여하튼 그림 <알리스강의 풍경>과 관련, 인문학자 이택광의 저서 《반 고흐와 고갱의 유토피아》에는 자세하고 풍부한 설명이 등장한다. 다음이 그것이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알리스강은 아를에 있던 고대 로마의 유적이다. 이 유적은 포플러가 길게 늘어선 길로 유명했다.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날, 고갱과 반 고흐는 알리스강의 풍경을 함께 그리기로 의기투합한다. 고갱은 앞에, 반 고흐는 뒤에 앉아서 각각 같은 풍경을 그리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고갱의 <알리스강의 풍경>이다. 반 고흐도 같은 풍경을 담은 연작을 그렸다. (같은 책, 135쪽 참조)

고갱과 반 고흐처럼, 고은 시인과 안도현 시인은 1971년과 1991년의 20년 격차를 두고 주옥같은 가을 생각을 캔버스가 아닌 편지와 엽서의 형식을 빌린 대중친화적인 시를 전격 발표한 바 있다. 참고로 고은의 시는 서울대생 김민기(당시 20세) 작곡에 의해 대중가요로 지금까지 크게 사랑받고 있어 주목된다. 마찬가지로 안도현의 「가을 엽서」또한 노래가 된 바 있긴 하나 대중화되는 데엔 실패한 듯하다. 이 점이 못내 안타깝다. 대중가요가 아니라 2021년 성악의 장르로서 잔잔하게 불렸기 때문이다.

빈센트 반 고흐, (알리스강의 풍경),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빈센트 반 고흐, (알리스강의 풍경),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 엽서」는 빈센트의 그림들과 썩 잘 어울린다. 그림 속 가로수길을 독자가 되어 어렴풋이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혼자 걷는 외로움은 사라지고, 문득 나란히 둘이 걷는 낙엽이 쌓인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포플러 거리의 가을 풍경>은 사랑을 잃은 사람에게 위안이 되고, <알리스강의 풍경>은 사랑하지만 생활은 가난한 부부에게 치유가 되리라고 짐작되며 기대된다.

도시 계획자이자 건축가이며 대학교수인 랄프 스키가 지은 책 《반 고흐가 그린 사람들》에 따르자면,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한 집(<노란집>)에서 동거할 만큼 가까웠던 친구 사이가 확실하다. 그런데 이 두 친구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가 어려웠다. 90일 동안 같은 집에서 밥 먹고 잠을 자는 생활을 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프레너미(Frienemy) 관계였다. 다시 말해서, 겉친속적(겉으로는 친구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경쟁 관계의 친구를 말함)의 우정을 드러냈다. 이에 대해, 랄프 스키는 책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다음이 그것이다.

1888년 9월, 빈센트는 그가 살고 있던 카페 겸 레스토랑을 떠나 반쯤 버려진, 사용하지 않는 농가로 이사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노란 집’이다. 그가 갖고 있던 많지 않은 돈으로 내부를 수리해서 두 개의 침실을 마련하고 2개의 손님용 예비 침실, 스튜디오와 부엌을 만들었다. (중략) 빈센트는 폴 고갱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아를에서 함께 지내며 작업하자고 초대했다. 이렇게 하면 예술가들 간의 형제애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려는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폴 고갱은 마지못해 승낙하고 1888년 10월 23일 아를에 도착했다. (같은 책, 72~73쪽 참조)

빈센트의 유명한 명화 작품 <노란 집>과 <밤의 카페테라스>, <알리스강의 가로수길> 등은 모두 1888년에 그려진 그림들이다. 그림들을 다소곳이 감상하자면, 붓끝에서 노랑 빛깔이 완연하게 스며든다. 가을 바람을 홀연 안겨준다. 이 바람은 그래서 “한 잎 두 잎 나뭇잎”을 헤아리는 시간을 촉발한다. 더욱이 <알리스강의 풍경>에서와 같이, 그림 속 남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발맘발맘 행복의 속도를 제어한다. 발맘발맘이란 ‘한 발씩 또는 한 걸음씩 길이나 거리를 가늠하며 걷는 모양’의 우리말로 산책을 의미한다.

그렇다. 그림 속 남녀처럼 시선을 위만 꼿꼿하게 쳐다보지 말고 아래도 조심스레 지켜볼 것을 우리에게 당부한다. 그러니까 안도현 식으로 말하자면, 이제 너와 나의 시선을 “낮은 곳으로/자꾸 내려앉”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직도 내게는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이 남아 있음을 스스로 지각하게 유도한다. 게다가 궁극적으로 그동안 잃어버렸던 놓쳤던 사랑을 찾아가게 놓아둔다. 여기서 사랑의 정체는 황금빛 낙엽을 점차 닮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쉽게 좌절하지 않게 된다.

나와 함께 언제나 곁에서 나란히 어깨를 기대며 산책할 수 있는 “그대여/가을 저녁 한때/낙엽이 지거든 물어보”고 싶다. 시인이 “사랑은 왜/낮은 곳에 있”다고 얘기한 걸까? 또 ‘그대’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시인은 ‘그대’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다음 명시가 그것이다.

그대/안도현

한 번은 만났고

그 언제 어느 길목에서 만날 듯한

내 사랑을

그대라고 부른다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홀연히 떠나는 강물을

들녘에도 앉지 못하고 떠다니는 눈송이를

고향 등진 잡놈을 용서하는 밤 불빛을

찬물 먹으며 바라보는 새벽 거리를

그대라고 부른다

지금은 반쪼가리 땅

나의 별 나의 조국을

그대라고 부른다

이 세상을 이루는

보잘것없어 소중한 모든 이름들을

입 맞추며 쓰러지고 싶은

나 자신까지를

그대라고 부른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와 마찬가지로 시인 안도현의 시선은 일이관지 “한 번은 만났고/그 언제 어느 길목에서 만날 듯한” 사람들의 초상에 집중한다. 아마도 가을 밤, 추석은 “고향 등진 잡놈을 용서하는 밤 불빛을” 많이 닮아서 그대, 사람들에게 한사코 명절로 각인되고 기억되는 것일 테다. 시인과 화가의 공통점은 “돌아오지 못한 먼 길을/홀연히 떠나는 강물을/들녘에도 앉지 못하고 떠다니는 눈송이를” 예사롭지 않게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시로 쓰고 그림을 그려내는 것에 자부심이 있을 테다. 그래서 우리는, 뛰어난 시인과 화가를 우연히 만나게 되면 언제나 존경할 것이다.

◆ 참고문헌

안도현, 《그대에게 가고 싶다》, 푸른숲, 1991. 임창순, 《당시정해(唐詩精解》, 소나무, 1999. 178~179쪽 참조. 금은돌, 《한 칸의 시선》, 천년의시작, 2018. 228쪽 참조. 이택광, 《반 고흐와 고갱의 유토피아》, 아트북스, 2014. 134~135쪽 참조. 랄프 스키, 《반 고흐가 그린 사람들》, 이종, 2019. 72~73쪽 참조. ​ ylmfa97@naver.com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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