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김사인 시의 1연은 영화처럼, 또 뮤지컬처럼, 또한 그림처럼 술술술 읽힌다. 그런 점에서 시의 2연과 3연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 빛나는 김사인 시인의 위안과 독백으로 여겨진다. 영화에서 양조위와 장만옥의 위험천만한 사랑을 나누기 위한 관계. 그 비밀스럽고 불륜일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만남도 어찌 보면 그들 인생을 찬란하게 물들였던 화양연화가 아니었을까?

화양연화(花樣年華)/김사인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

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

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

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

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

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

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걷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빅토르 가브리엘 질베르, (꽃시장(The Flower Market)),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빅토르 가브리엘 질베르, (꽃시장(The Flower Market)),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인간의 내부에는 여러 마리의 짐승이 산다. 진화심리학은 그 중 하나를 본능(instinct)이라 부르고, 프로이트는 다른 하나를 충동(drive)이라 부르며, 라캉은 또 다른 하나를 욕망(desire)이라 부른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본능과 충동과 욕망이 어떤 법칙을 갖고 있는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다.”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64쪽 참조)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인가, 화양연화

김사인(金思寅, 1956~ ) 시인의 명시 화양연화(花樣年華)는 그의 세 번째 시집인 어린 당나귀 곁에서에 홀연 등장한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화양연화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간을 두고 정의한다. 그런 맥락에서 시적 주체인 발화자의 목소리는 성인 남/녀의 목소리로 마치 뮤지컬배우처럼 시 낭송할 것을 우리에게 주문한다. 이 시에 끌림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나뉘어져 노래할 수 있다.

먼저 여인이 노래한다.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말처럼이나 속절없이.”에서 소프라노는 입을 그만 다문다. 다음이 남성이다. 바리톤으로 노래할 차례이기 때문이다.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까지 부르고 나면, 곧장 남/녀는 한 목소리가 되어서 시를 노래한다. 그것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가 되겠다.

이 의미심장한 클로징 멘트에서 나는 수차례나 시와 동일한 제목을 가진 영화,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2000년 개봉작)의 영화 속 남녀주인공인 양조위와 장만옥을 차마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김사인 시의 1연은 영화처럼, 또 뮤지컬처럼, 또한 그림처럼 술술술 읽힌다. 그런 점에서 시의 2연과 3연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 빛나는 김사인 시인의 위안과 독백으로 여겨진다. 영화에서 양조위와 장만옥의 위험천만한 사랑을 나누기 위한 관계. 그 비밀스럽고 불륜일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만남도 어찌 보면 그들 인생을 찬란하게 물들였던 화양연화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남녀의 바람, 짐승 같은 정분이 각자 본능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순간적인 충동에서 어느날부터 불륜을 저지른 것인지, 이도 아니면 꼭꼭 감춰둔 욕망의 터짐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 속 남녀주인공 양조위와 장만옥은 각자 인생에서 아름다웠던 한 시절을 뼈저리게 경험한다. 아름다워 보였다. 이것은 어쨌거나 관객의 입장에선 차마 부정할 수 없는 고백이며 진심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를 보고는 감정이 고조되어 애달프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는 먹어야지 산다. 시인은 친절하다. 이렇게 우리의 격한 감정을 추스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이 그것이다.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

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라고 부연했기 때문이다. 젊음의 소멸과 노화(老化)를 가지고서 이성에 대한 구애와 사랑을 해방시킨다. 무장해제다. 게다가 시인은 젊은 날의 아름다웠던 사랑을 두고 구체적으로 3연을 통해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라고 찬탄한다. 그렇게 말하면서 마치 영화 감상자의 후기를 토로하듯 또 예언하듯 시행을 기록한다. 내친김에 시의 3연을 바라보자. 다음이 그것이다.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걷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걷고라거나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라는 식의 김사인의 시적 어법은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게 되는 사후(死後) 세계로, 곧 죽어서 우리가 닿는 천국을 은유한다. 연애중인 남녀가 느닷없이 오누이 관계에 처하게 되면 이성 관계에서 닥치는 운명적인 사랑 따윈 더 이상 고통의 나날이 되지 않거니와 사랑의 구속에 대한 해방 투쟁을 더 신랄하게 이생에선 벌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런 노화가 가지는 덕이고 자명한 이치이다.

이제 앞의 그림 <꽃시장>으로 돌아가자. <꽃시장>을 그린 이는 프랑스 벨 에포크 시대의 서정을 담아낸 화가 빅토르 가브리엘 질베르(Victor Gabriel Gilbert, 1847~1933). 화가가 1880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나는 처음, 잡지사 기자 출신의 미술 전문 작가 최혜진의 저서 명화가 내게 묻다에서 우연히 찾아봤다. 그러면서 이 명화는 내게 있어서 김사인의 명시 화양연화로 그림 제목을 고치고픈 본능, 충동, 욕망의 감정을 여과없이 자아냈다.

그림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어느 날, 공터에 꽃시장이 열리고 우르르 구경꾼들이 장사꾼들이 한데 뒤섞인다. 그 중에서도 화면 중앙을 오롯이 차지한 두 여인에게 나의 시선은 집중된다. 감정이 몰입한다. 검정 원피스 차림의 여인은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걷어들인 상태이고, 그 옆에 바짝 서 있는 또 다른 빨강 벨트의 여인은 패션의 완성은 우산(양산)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듯 꽃만 보는 친구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무심코 지켜보고 있다.

빨강 벨트와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지점엔 이들보다 연상으로 보이는 꽃 판매원이 멀찌감치 떨어져서 팔짱을 끼고 두 명의 젊은 여인을 지켜본다. 지켜보는 눈빛에서 너희들, 좋은 때다라고 이윽고 중얼거릴 것만 같은 그런 그림이다. 그렇다. 이 그림은 두 젊은 여인의 아름다운 시절, 화양연화를 화가의 시선이 놓치지 않고 잡아서 그려낸 것이다. 누가 꽃이고 누가 여인인가?

아무튼 그림 감상자가 남자라면 두 명의 젊은 여인의 치마속이 몹시 궁금할 테다. 그게 자연스러운 남자의 성적 본능이니까. 나도 예외는 아니다. 문정희 시인이 그랬던가. 치마라는 제목을 단 시에서 말하길,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있다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팬티 색깔은 두 여인이 어떻게 다를까? 검정 원피스는 같은 검정 속옷, 아니면 흰 속옷을 입었을 것이고, 빨강 벨트는 빨강 속옷의 팬티, 아니면 원피스 계열의 베이지 색의 치마속이 아니었을까. 또한 두 젊은 여인 중에서 우산을 거두고 꽃을 구경하는 여인이 정상적인 아내의 모습이고, 빨강 우산, 빨강 허리 벨트, 빨강 속치마를 드러내는 여인은 영화처럼 지금 장만옥 같은 불륜의 당사자가 혹 아니었을까. 이 그림을 보면서 펼쳐진 내 상상력의 한계는 말하자면 딱 여기까지다.

홍콩 영화, (화양연화) 여주인공 장만옥의 치파오.
홍콩 영화, (화양연화) 여주인공 장만옥의 치파오.

홍콩 영화 <화영연화>의 여주인공 장만옥이 입었던 중국식 치마, 치파오 속을 나는 또 얼마나 들여다보고 싶었던가. 꽃무늬 치파오에서 꽃무늬 속옷을 상상하는 시간은 정말이지 철몰랐던 삼십대 후반의 나이의 과거로 찾아든다. 그때는 내게도 분명코 화양연화였을 텐데…….

여기, 내가 잘 나갔던 과거의 한때를.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간, 즉 화양연화를 추억하는 옛 시인이 있다.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가 쓴 칠언절구 강남봉이구년(江南逢李龜年을 읽자면, 김사인 시인의 화양연화중국판이라고 하겠다. 그 한시를 여기에 소개한다.

江南逢李龜年/杜甫

岐王宅裏尋常見 기왕댁리심상견

崔九堂前幾度聞 최구당전기도문

正是江南好風景 정시강남호풍경

落花時節又逢君 낙화시절우봉군

기왕의 집에서 늘 만났지요

최구의 집에서도 몇 번이나 들었지요

지금 한창 강남은 풍경이 좋다고 합니다

화양연화가 끝났는데도 또 그대 노래를 만날 수 있을까요?

김성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에 따르면, “이 시는 대력 5년 늦봄 담주에서 유명한 궁중 음악가였던 이구년을 만난 감회를 적은 것이다”(김성곤, 두보 근체시 명편, 370쪽 참조)라고 설명한다. ‘대력은 당 황제의 연호를 가리킨다. 이로 보아 현종, 숙종의 뒤를 이어 대종이 중국 당나라 황제로 치세하던 시기에 두보가 한시를 적은 것으로 여겨지며 짐작된다. 한시에서 만남을 의미하는 이란 한자는 현재 시점을 강조하는 것에 반해 만남을 의미하는 또 다른 한자 이란 낱말은 과거 시점을 말하는 데에 주로 사용한다. 그러니까 ()’ 자는 지금 만나다는 뜻이고, ‘()’ 자는 과거 만났다는 의미로서 문장 해석을 도와준다. 두보 칠언절구 본문에 등장하는 기왕이나 최구는 황제의 동생과 최상류층 벼슬아치 권력자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를 김사인 식으로 말하자면,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의 그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말이 있긴 하다. 인생에서 성공하는 프로가 되려면, 요컨대 진정한 의미에서 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재능의 도 있어야 하고, 용기를 내는 도 있어야 하겠지만, 보다 잘 나가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보다도 인맥의 촘촘함을 의미하는 이 탄탄해야지 으로서 성공할 수 있다는 설(). 그렇기 때문에 ()’이란 한자는 그럴 듯해서 달리 ()’라고 읽혀진다. 그 설로 인하여 너나없이 유세(誘說)를 쉬이 당하기 때문이다. 기실 ()’이란 한자의 낱말은 만남을 잇는 의 기능을 전적으로 발휘한다. 한 사람과 연결되는 으로 인하여 물리적인 시간을 단축할 수도 있으니 어찌 소홀할 수 있으랴. 그래서 그랬던가. 옛 사람들은 이렇듯 통찰력이 빛나는 명언을 남긴 바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그대와의 하룻밤 이야기가 십 년의 독서보다 낫다(共君一夜話, 勝讀十年書).” (문화재청 엮음, 옛 사람들의 삶과 꿈, 89쪽 참조)

조선의 대유학자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글에서도 발견된다. 퇴계선생문집별집1에는 기꺼운 마음으로 한 방 안에서 옛일과 지금 일을 이야기 나누니 풍화가 가득하여 가히 사모할 만하고 격렬하게 어둡고 거친 것을 일으키니 십 년 독서에 비하여 낫다[欣然一室內, 座談雜今古, 風華盡可慕, 激烈起昏莽, 勝讀十年書]라고 했다. (같은 책, 90쪽 참조)

아무튼 나의 결론은 이렇다. 시인의 화양연화를 지금 만나든, 왕가위 감독의 홍콩 영화 <화양연화>를 과거에 만났든, 그 기억이 머릿속에서 여적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프랑스 벨 에포크 시대의 서정을 담아낸 화가 빅토르 가브리엘 질베르의 명화 <꽃시장>에 내 시선의 을 은근 대보는 것이다. 그리한다면 십 년의 혼자 공부보다 나은 식견이 내공에서 갈무리되어 쌓여지고 쓸데없는 물리적인 내 시간도 덩달아서 줄어드니 일석이조다. 그 시간이 있는, 세월이 바로 내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지 싶어진다ylmfa97@naver.com

참고문헌김사인,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 2015.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64쪽 참조최혜진, 명화가 내게 묻다, 북라이프, 2016. 264~277쪽 참조이영주 외, 두보 근체시 명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8. 379쪽 참조문화재청 엮음, 옛 사람들의 삶과 꿈, 눌와, 2010. 89~90쪽 참조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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