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

우리에게 ‘기대’의 시간이 오려면, 반드시 나부터 타자를 그리워하고 기다려야하는 ‘대기’의 타이밍이 필수로 준비에서 갖춰져야 한다. 인생 노년에 이르러서 내가 만나는 지인들은 모두 “헤어지긴 쉬워도 만나보긴 어려”운 귀한 사람이니 어쩌겠는가. 친할수록 예의를 지키고 정성을 다해 사랑하고 그리워해야 뒤늦게 뼈아픈 후회가 다소 적어질 듯하다.

혼자 가는 먼집/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

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

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

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갈 당신……, 킥킥거리며 세

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

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

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

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

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로렌스 알마 타데마, (기대(Expectations)), 19세기, 패널에 유화, 개인소장.
로렌스 알마 타데마, (기대(Expectations)), 19세기, 패널에 유화, 개인소장.

“이 작품은 이 삶이 불러낸 것이다.” ― 메를로 퐁티

내 삶이 기대는 것들

앞의 시는 허수경(1964~2018)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에 보인다. 타자일 밖에 없는 ‘너’라는 존재는 언제나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없는, 무를 수도 없는” 관계의 애인이라서 비참하고 끔찍한(慘酷) 이별의 상처를 줬지만, 시적 주체에게 있어서 “그러나 킥킥 당신”으로 끝맺는다. 살면서 느닷없이 닥친 황망한 이별을 경험한다. 이때에 사람이 너무 슬퍼지면 곡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하물며 이 슬픔은, 울음은 종종 킥킥 냉소가 되어 입가에 샘처럼 괴고 우물처럼 눈가에 찰랑찰랑 스며든다. 그렇기 때문에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의 모습이 되어서 혼자 가게 된다. 지금은 너무 멀어진, 그의 먼 집을 찾아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라고 뽕짝 같은 시가 한껏 발화되고 고조된 것이다. 참고로 시인이 말한 ‘당신’은 본문에서 10회 등장한다. 어차피 산 사람은 곧 죽게 된다. 살아있기에 기대(期待)하는 것이 많아지는 것이고, 곡 썩어서 문드러질 육체이기에 항시 죽음 앞에서 우리는 대기(待期)한다. 그래서 저 개망초 우거진 풀밭 샛길에 밟힌 ‘풀’이 되거나 죽어서 육신은 “풀의 흙으로 돌아감”이 뻔해진다. 이 불교적인 윤회의 굴레는 시적 주체인 내가 사랑했던 연애시적 어법인 된 ‘당신’도 예외가 아니고 그렇긴 마찬가지다. 시집의 해설을 단 박해현 기자는 허수경 시인을 이렇게 포착했다. 다음 말이 그것이다.

“허수경은 젊어서 이미 늙어버린 시인이다.” (박해현, 《혼자 가는 먼 집》, 105쪽 참조)

시인과 나는 사실 동갑이다. 용띠이고 갑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집이 출간 된 해 1992년, 둘 다 우리 나이로 스물아홉이었는데, 그녀는 너무 일찍 철이 들었고, 나는 아직도 뭣도 모르는 철부지가 된 것만 같아서, 이를 두고 생각하자면 나잇살이 결핍 자체이다. 몽땅 내던지고 싶어진다. 그래서 지금까지 헛살았다는 느낌이 허수경 시집을 볼 때마다 요동친다. 매스껍다. 비위가 거슬려서 파도처럼 일렁인다.

허수경의 명시 「혼자 가는 먼 집」을 다시 보니, 우리에게 익숙하고 잘 알려진 명화 한 점이 문득 떠오른다. 영국에서 성공한 낭만주의 화가 네덜란드 출신의 로렌스 알마 타데마(Lawrence Alma Tadema, 1836~1912)가 그린 <기대(Expectations)>(1885년 作)가 그것이다. 이 명화를 나는 처음 한 책을 통해서 우연히 감상했다. 그때가 2020년 가을이었다. 아무튼 <기대>는 미술을 전공한 김선현 작가의 저서 《그림의 힘》에 나온다. 김 작가는 책에서 “이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기대하는 기쁨’을 다시 느끼게 해줍니다.”라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바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여인은 기대에 들떠 보이지만 그렇다고 자기 자신에게 소홀한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거나 머리가 부스스하지 않고, 단정한 옷과 장신구, 머리 모양을 갖췄습니다. 이렇게 준비를 참 잘했기에 이 사람 자체에도 기대가 되는 것입니다. (중략) ‘분홍’은 무조건 ‘행복’한 색입니다.” (같은 책, 218~219쪽 참조)

<기대>라는 그림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여인의 시선이 바닷가 마을의 먼 집을 향한 것을. 지금 감상자는 여인의 두 팔 동작을 자세히 보라. 여인은 멀리 보고자 양팔을 눈썹 위에 머리까지 올렸다. 흰 대리석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예쁜 여인이 머문 장소는 휴식의 공터이고 누각의 기능을 갖춘 전망대 역할을 드러낸다.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는 옆으로 밀쳐두고 언뜻 앞의 꽃나무(등나무)를 바라보는 것 같은 포즈이지만 자세히 살피자면 여인의 시선이 바닷가 마을의 언덕, 그러니까 먼 집을 집요하게 향하고 있음을 화가의 붓질은 이미 옆모습 미인의 얼굴로 암시하며 강조한다. 그렇다. 그 마을엔 여인의 남자(애인)가 사는 집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림 속 젊은 여인은 허수경 시인의 「혼자 가는 먼 집」의 행로를 고스란히 우리에게 보여주는 셈이다. 다문 입술이 곧 벌어지고 동공이 풀린 여인은 상상컨대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을 터이다. 시처럼 “당신……,”이라고.

미술에 해박한 지식인이자 미국의 유명 시인이고 철학자이자 박물학자, 정원사이기도 한 다이앤 애커먼이 쓴 《감각의 박물학》에는 이런 글이 펼쳐진다. 다음이 그것이다.

미인의 얼굴

남자들에게 예쁜 여자의 사진 여러 장을 보여준 결과, 남자들은 동공이 풀려 있는 여자들의 사진을 크게 선호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 여인의 사진을 본 남자들의 눈동자는 약 30퍼센트 가량 확대되었다. (중략) 인간의 동공은 자극받거나 흥분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확대된다. 그래서 동공이 풀려 있는 예쁜 여성의 모습은 남자들에게, 그녀가 자신을 매력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신호가 되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남자들 자신의 눈동자도 풀리게 된다. (중략) 타인의 시선을 제일 먼저 받는 것은 얼굴, 그 중에도 마음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반짝거리는 눈이다. (다이앤 애커먼, 《감각의 박물학》, 397~403쪽 참조)

<기대>의 그림 속 여인을 부러 화가 로렌스 알마 타데마는 옆모습으로 그려냈다. 감상자가 너무 쉽게 여인의 속내를 눈동자를 통해서 헤아려내지 못하도록 구도를 취했기에 이 그림은 명화로서 가치를 드높이는 것에 어렵지 않게 성공한다. 다만 그림에서 독자가 볼 만한 것으로 분홍의 꽃나무 등장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현혹한다. 꽃나무를 두고, 친한 친구와 통화했다. 나는 화가인 로렌스 알마 타데마 그림에 등나무가 소재로 많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등나무의 꽃이라고 우겼다. 다행이 친구는 가지를 보니까 그런 것도 같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저 굵은 나무 등걸의 정체는 무엇일까. 칡이 혹 아닐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칡과 등나무가 서로 엉켜 갈등(葛藤)의 분홍빛 꽃을 흐드러지게 여인 앞에 와서 피운 것인데, 그렇다면 이 그림에서 젊고 예쁜 여인은 잠시 숨을 고르면서 혼자 먼 집까지 갈까 말까를 고민하는 그림의 재미를 독자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하여 좋은 그림이다.

어쨌든 꽃핀 나무 아래 그림 속 여인은 한참을 앉아 쉬고 있다. 허수경은 “한때 연분홍의 시절/시절을 기억하는 고약함이여”(「꽃핀 나무 아래」, 부분)라고 시를 처연히 노래했다. 그런 가하면 사방이 확 트인 공터에 앉아 이렇듯 주옥같은 시를 쓴 적도 있다.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썩었는가 사랑아//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환하고 아프다//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공터의 사랑」, 부분)를 기대하며 바라본다.

여기서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의 명언을 다시 한 번 더 복기하지 않을 수 없다. 허수경의 시와 로렌스 알마 타데마의 그림의 세계는 이렇게 평가함이 마땅하다. “이 작품은 이 삶이 불러낸 것이다.”라고 비평해야 맞는 얘기이다.

누구든지 인생에서 혼자 가는 먼 집(목적지이자 종착지)이 별안 눈에 보일 때가 있다. 단숨에 갈 필요가 없다. 시처럼 그림처럼 공터를 찾아 앉거나 꽃핀 나무 아래도 잠시 서성여야 그게 사람답다. 푸른 바다를 옆에 두고 전망대 흰 대리석에 앉아 갈등을 일으키는 혼자의 시간도 가끔가다 내가 살면서 어쩌다 필요한 법이다. 항시 바쁘게 ‘ON’만 있고, 이따금 ‘OFF’하는 시간이 없다고 한다면 그 삶은 충전되지 않고 이윽고 방전되기 십상이다.

중국사 5대 10국 때에, 남당의 마지막 황제 이욱(李煜)이 적에게 포로가 되어 고국을 떠나면서「낭도사(浪渡詞」를 지었는데 곱씹으며 낭송할수록 그 한시가 참으로 명언이지 싶다. 다음이 그것이다.

獨自莫憑欄 독자막빙란

無限江山 무한강산

別時容易見時難 별시용이견시난

홀로 난간엘랑 기대지 마오.

끝없는 강산,

헤어지긴 쉬워도 만나보긴 어렵나니. (정 민, 《한시미학산책》, 135쪽 참조)

우리에게 ‘기대’의 시간이 오려면, 반드시 나부터 타자를 그리워하고 기다려야하는 ‘대기’의 타이밍이 필수로 준비에서 갖춰져야 한다. 인생 노년에 이르러서 내가 만나는 지인들은 모두 “헤어지긴 쉬워도 만나보긴 어려”운 귀한 사람이니 어쩌겠는가. 친할수록 예의를 지키고 정성을 다해 사랑하고 그리워해야 뒤늦게 뼈아픈 후회가 다소 적어질 듯하다. 곧 있으면 우리 명절 추석이 다가온다. 그동안 그리운 사람들-가족, 애인, 친구-과 만나서 함께 오붓하게 점심이나 저녁을 꼭 챙겨야겠다. 이왕이면 혼자 가는 먼 집은 나중으로 미뤄보자. ylmfa97@naver.com

◆ 참고문헌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 105쪽 참조.  다이앤 애커먼, 백영미 옮김 《감각의 박물학》, 작가정신, 2004. 397~403쪽 참조.  김선현, 《그림의 힘》, 에이트포인트, 2020년, 215~218쪽 참조. 정 민, 《한시미학산책》, 휴머니스트, 135쪽 참조.​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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