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에게 어제와 다른 오늘의 새로 생긴 저녁이 있다는 것은 참말로 기쁜 일이다. 내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남자라면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혜원의 그림처럼 그림 속 남자 서방이 되어 약한 여자(?)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결과론적으로 계집질하는 행위(끌림쏠림꼴림흘림)로 이어지는 성적 폭력으로 변한다면 인간은 말종이 되는 것도 순식간이 되기 때문이다.

새로 생긴 저녁/장석남

보고 싶어도 참는 것 

내밀고 싶어도

그저 손으로 손가락들을 만지작이고 있는 것

그런 게 바위도 되고

바위 밑의 꽃도 되고 도 되고 하는 걸까?

아니면 웅덩이가 되어서

지나는 구름 같은 걸 둘둘 말아

가슴에 넣어두는 걸까?

빠져나갈 자리 마땅찮은 구름떼 바쁜

새로 생긴 저녁

신윤복, (소년전홍(少年剪紅)), 18세기, 종이에 담채, 간송미술관.
신윤복, (소년전홍(少年剪紅)), 18세기, 종이에 담채, 간송미술관.

그림은 보는 것이고 읽는 것이다. 그리고 느끼는 것이다. 이 경우 느낌이란 우리의 마음으로 공감해 얻는 감정이다. 그림에 다가간다는 것은 일종의 교감 행위다. 그래서 그림을 볼 때는 혼자만의 느낌에 침잠하는 것도 좋지만, 다른 이와 느낌을 교환하고 공유하는 것도 좋다. 다른 이가 남다른 감식안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주헌, , 그림이다, 추천사 중에서)

끌림과 사랑, 새로 생긴 저녁

시인 장석남(張錫南, 1965~ )의 시는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758~ ? )의 그림으로 펼쳐진다. 우선 그림부터 감상하자. 그림 <소년전홍(少年剪紅)>에 대해, 남다른 감식안을 가진 미술평론가 손철주는 이렇듯 설명한다. 다음이 그것이다.

힘은 남자의 매력이고 매력은 여자의 힘이라 하지요. 여자는 매력을 유혹의 수단으로 쓴다고 책에서 읽었습니다. 여자가 육체의 매력을 강조하는 짓은 문명사적 사태라기보다 비교행동학적 전략으로 보입니다. 가슴을 도드라지게 하고, 엉덩이의 움직임이 고스란한 옷을 걸치고, 입술을 강렬하게 칠하고, 눈꺼풀에 색을 입히는 치장들이 여성의 육체에 이끌리는 남성의 시선을 자극합니다. 아름답습니다. 여성의 몸은요. 거기에 비해 연애 시장에서 상품가치를 높이려는 남성의 씀씀이는 치졸하지요. 권력과 재력 같은 사회적 지위로 뽐내는데, 기껏 해봤자 살풍경한 과시가 고작입니다. 식스팩도 힘의 원천은 커녕 제 눈에 속 빈 거푸집처럼 보입니다. (중략) 완력이 남자의 유혹으로 쓰인 예가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 있습니다. <소년전홍>입니다.

젊은 서방이 벌건 대낮에 계집질하는 장면입니다. 밑동이 짧은 도련 아래 살짝 드러난 가슴이 통통한 걸 보면, 이 여자 몸종은 집주인인 서방보다 낫살이 들었습니다. 물어보나 마납니다. 사내는 마침 마나님이 집을 비우자 음심이 솟는 바람에 엄청 조급해졌습니다. 팔목을 잡아끄는 품새에 우악한 완력이 들어있습니다. 힘이 남자의 매력이긴 해도 힘을 오로지 매력으로 삼는 남자는 성희롱이 잦습니다. (중략) 유혹에도 점층적인 단계가 있지요. 먼저 끌림입니다. 저절로 눈이 가는 거지요. 다음이 쏠림입니다. 마음이 얹혀 갑니다. 그리고 꼴림입니다. 가닿고 싶은 욕구죠. 마지막이 흘림입니다. 넋이 나간 상태지요. <소년전홍>은 유혹의 세 번째 정황입니다. 순우리말이 어째 민망합니다만, 꼴림은 마음을 따라간 몸이 불시에 반응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허겁지겁한 유혹입니다. (손철주,, 그림이다, 56~58쪽 참조)

하지만 꼴림으로 치닫는 화가의 그림 같은 장면을 마주하고도 시인의 우연한 시선은 성욕을 억제하라고 우리에게 당부한다. 끌림과 달리, 사랑이란 보고 싶어도 참는 것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배움이다. 배움에 익숙해지면 곧 우리는 끌림 앞에 손 내밀고 싶어도/그저 손으로 손가락들을 만지작이고 있는 것에 성정이 인내로 다다른다. 그리하여 마침내 배움은 채움이 되고 인격을 형성한다. 그래서 시인은 말한다. “그런 게 바위도 되고/바위 밑의 꽃도 되고 도 되고 하는거라고. 바위 밑의 꽃은 혜원의 그림에선 배롱나무 꽃으로 뜰에 나타난다. 부잣집 후원 마당을 차지하는 가산(假山)의 괴석과 세 그루 배롱나무 밑에는 난초가 꽃을 피우지 못했으니 그것들은 잡초와 다를 바 없음이다. 그러니까 화가의 시선과 달리, 시인의 시선은 아니면 웅덩이가 되어서/지나는 구름 같은 걸 둘둘 말아/가슴에 넣어두라고 했으니 이는 비움의 종용이다. 그렇다. 언제나 배움이란 것은 채움과 비움의 반복 과정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세움이다. ‘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이 물음에 시인을 이렇게 답을 두 줄의 시로 적어 제시한다.

빠져나갈 자리 마땅찮은 구름떼 바쁜

새로 생긴 저녁

에게 어제와 다른 오늘의 새로 생긴 저녁이 있다는 것은 참말로 기쁜 일이다. 내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남자라면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혜원의 그림처럼 그림 속 남자 서방이 되어 약한 여자(?)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결과론적으로 계집질하는 행위(끌림쏠림꼴림흘림)로 이어지는 성적 폭력으로 변한다면 인간은 말종이 되는 것도 순식간이 되기 때문이다.

끌림에 대해 철학자 강신주는 사랑으로 꽃필 수 없어 아련하기만 한 두근거림이라고 독자에게 정의한 바 있다. 그러면서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인용하면서 상세히 설명한다. 다음이 그것이다.

끌림(Propensio)이란 우연에 의해 기쁨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그 어떤 사물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사랑의 감정은 타자와 마주쳤을 때 발생하는 기쁨으로 설명된다. 그렇지만 타자로부터 유래한 기쁨은 꽃으로 만개할 수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만개하지 못할 수도 있다. 전자가 사랑이라는 감정이라면, 후자가 끌림이라는 감정이다. 스피노자의 영민함은 이 두 종류의 기쁨을 구별한다는 데 있다. 사랑과 끌림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우연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겠다.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발생하는 기쁨이 우연적일 때, 우리는 그것을 끌림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다. 사랑은 내게 필연적인 기쁨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게 사랑을 가져다주는 그 사람만이 나의 기쁨을 지속시켜 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필연적인 기쁨이다. (강신주, 강신주의 감정수업, 401쪽 참조)

그림 속 붉게 보이는 꽃 핀 나무는 배롱나무다. 이로써 그림 속 장소의 계절은 벌써 한여름인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한 팔에 장죽 들고 또 한 팔로는 성숙한 몸종 여인의 팔목을 붙들고 있는 팔자걸음으로 엉거주춤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은 영락없는 부잣집 2세 도련님 난봉꾼의 전형적인 그 모습이다. 돈과 권력으로 언제든 제멋대로 음심(淫心)을 채우려는 저 못된 성적 욕구를 꼬집고자 헤원은 그림의 우측 상단에 화제를 써 빼곡하게 채웠다. 모두 열 글자다. 다음이 그것이다.

密葉濃堆綠 밀엽농퇴록

繁枝碎剪紅 번지쇄전홍

빽빽한 잎새로 푸르름은 농염하게 쌓이고,

수북한 가지에 찬 붉은 꽃 부서지며 꺾이는구나.

그러니까 성숙한 여인, 몸종을 두고 화가인 신윤복도 끌림이 있긴 있었던 것 같다. 다행이 3인칭 관찰자 시선이다. 이러한 끌림은 봄부터 시작해서 여름까지 이어졌다. 문제는 쏠림과 꼴림을 감상자에게 자극한다. 여기서 그저 멈췄을 뿐이다. 쏠림과 꼴림으로만 멈췄을 뿐이다. 다행이도 흘림의 행동은 화면 밖에서 걷어낸다. 화가의 시선이 붓만 들고서 내버려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 속 남자, 서방의 성적 욕구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그림 속 남녀상열지사는 이미 배롱나무에 잎이 나기 시작하는 봄부터 시작됐다. 또한 붉은 꽃이 피고 부서지는 그 여름의 끝까지 수차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감식안이 있다면 그것을 눈치로 알 수 있다. 그림 속 남녀의 표정을 살펴보자. 그러자면 서로 싫지 않다는 표정이다. 끌림의 익숙함이 노골적으로 화가의 화면으로 드러난다. 도색적인 한계가 엿보인다.

그림의 제목 <소년전홍(少年剪紅)>소년은 옛 문헌에서 성인 남자에 대한 일반적인 통칭이지 미성년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홍꽃을 꺾다라는 성적인 은유를 함유한다. 그런 의미이다. 서방과 화가의 시선은 똑같이 봄부터 몸종 여인에 가닿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자인 화가는 보고 싶어도 참는 것/손 내밀고 싶어도/그저 손으로 손가락들을 만지작이고 있는 것에서 행동(끌림)을 제약한다. 그 정도에서 차마 지나치지 않았기에 그림의 힘은 성적 묘사를 노골적이지 않게 에두르고 감추는 것에 성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적인 욕망에 대한 절제가 부잣집 정원인 후원 마당에서 괴석인 바위가 되고/바위 밑의 꽃도 되고 도 되고 하는 행위로 통제된다. 이 덕분에 그림 감상자는 음심이 비워진다. 꼴림은 있어도 흘림은 없어진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 (더 묻지 마세요),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로렌스 알마 타데마, (더 묻지 마세요),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장석남의 뛰어난 명시 새로 생긴 저녁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로렌스 알마 타데마(Lawrence Alma Tadema, 1836~1912)의 그림인 <더 묻지 마세요>를 감상해야 한다. 신윤복의 그림에서 화가의 시선은 3인칭으로 화면 밖으로 달아났다면 이 그림에서 화가의 시선은 여인의 손등과 반지에 집중하는 한 남자로 집착한다. 그림은 오랜 연애 끝에 드디어 상대인 여자로부터 결혼 약속을 받아낸 것을 그려냈다. 배경이 되는 바다와 흰 대리석, 프러포즈로 쓰인 꽃다발이 안정감과 차분함을 더해준다. 그러니까 순결함을 그림은 자아낸다. 게다가 사랑의 설렘과 커플의 행복감이 화면에 잔뜩 색채로 번져든다. 이 점이 신윤복의 그림에서는 우리가 찾을 수 없는 또 다른 매력이다.

아무튼 내 결론은 이렇다. 신윤복의 그림이 끌림이라는 감정을 다룬다면 로렌스 알마 타데마의 그림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적으로 다루고 돋아준다. 이 점이 그림 보는 재미를 독자에게 선물한다. 시와 그림의 독자인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남녀상열지사에서 끌림사랑에 대해서 쉽게 혼동하기 때문이다.

빠져나갈 자리 마땅찮은 구름떼 바쁜

새로 생긴 저녁

이 두 줄의 시와 더 잘 어울리는 그림은 신윤복의 그림보다는 로렌스 알마 타데마의 그림이 제격이다. 자격을 더 갖추었다. 어쨌거나 이성에 대한 끌림이나 사랑에 대한 고민이 오는 날이면 장석남의 새로 생긴 저녁을 두 점의 그림과 함께 찾고 비교할 일이다. 이 여름의 끝이 다하기 전에. 목백일홍, 배롱나무 꽃이 다 사라지기 전에. 목백일홍은 백일초로 불리는 국화과 한해살이풀을 가리키지 않는다. 부처꽃과에 속하는 낙엽활엽소교목으로 배롱나무 꽃으로 구분한다. 꽃말에 부귀(富貴)’가 있다. 부잣집 몸종 신분에서 첩살이로 신분 상승과 부귀를 탐하려는가. <소년전홍>에서 엉덩이를 살짝 뒤로 뺀 앳된 모습의 성숙한 아낙이 그저 애처롭고 안쓰럽다ylmfa97@naver.com

참고문헌

장석남,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문학과지성사, 2005.  손철주·이주은,, 그림이다, 이봄, 2020. 56~58쪽 참조강신주, 강신주의 감정수업, 민음사, 2013. 401쪽 참조박상진, 우리 나무의 세계 1, 김영사, 2011. 103~106쪽 참조 ‘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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