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18세기 조선의 그림, 화제(畵題)에서 아회(雅會)’란 말이 더러 목격된다. 말의 뜻은 아름다운 모임을 주로 일컫는다. 다른 말로 아집(雅集)’이 작품명에 간혹 대체된다. ‘가 정기적인 만남을 의미한다면, ‘은 오늘날 번개 모임에 해당하는 즉흥성을 내포한다. 이 점이 차별화되는 그 경계이다.

아버지의 빈 밥상/고두현

정독도서관 회화나무

 가지 끝에 까치집 하나

삼십 년 전에도 그랬지

 남해 금산 보리암 아래

토담집 까치둥지

 어머니는 일하러 가고

집에 남은 아버지 물메기국 끓이셨지

겨우내 몸 말린 메기들 꼬득꼬득 맛 좋지만

밍밍한 껍질이 싫어 오물오물 눈치 보다

그릇 아래 슬그머니 뱉어 놓곤 했는데

잠깐씩 한눈팔 때 감쪽같이 없어졌지

얘야 어른되면 껍질이 더 좋단다

맑은 물에 통무 한쪽

속 다 비치는 국그릇 헹구며

평생 겉돌다 온 메기 껍질처럼

몸보다 마음 더 불편했을 아버지

나무 아래 둥그렇게 앉은 밥상

간간히 숟가락 사이로 먼 바다 소리 왔다 가고

늦은 점심, 물메기국 넘어가는 소리에

목이 메기도 하던 그런 풍경이 있었네

해 질 녘까지 그 모습 지켜봤을

까치집 때문인가, 정독도서관 앞길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여름 한낮.

강희언, (사인시음도(士人詩吟圖)), 18세기, 종이에 담채, 개인 소장
강희언, (사인시음도(士人詩吟圖)), 18세기, 종이에 담채, 개인 소장

“‘실경(實境)’은 글자 그대로 진실한 경지이다. 거짓이나 허구의 풍경도 아니고, 들뜨고 과장된 감정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의 풍경과 감정을 가리킨다. (중략) 옛사람의 시 가운데 눈에 보이는 대로 쓴 시와 즉사시는 모두 실경에 속한다(古人詩, 卽目·卽事, 皆實境也).” (안대회, 궁극의 시학-스물네 개의 시적 풍경, 479~493쪽 참조)

회화나무, 곁에 서성이는 여름 한낮

고두현(1963~ ) 시인의 시는 그 시적 풍경이, 진솔하다. 2020년에 출간 된 고두현 남해 시 전집 남해, 바다를 걷다에 대한 내 생각이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과 즉흥의 미학 실경에 근접해서 아주 돋보인다. 특히 이 시집에 등장하는 한 편의 시, 아버지의 빈 밥상을 마주치면 느낌이 조선의 18세기 화가 강희언(姜熙彦, 1710~1784?)이 그렸다는 <사인시음도(士人詩吟圖)>가 문득 내 눈앞에 가로 놓이면서 사무사(思無邪)’의 감동으로 펼쳐진다.

인문학자 문광훈 교수의 저서 사무사에서 시적 풍경 실경을 논한 것 같은, 좋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여기에 소개한다. 다음이 그것이다.

글에서는 그 글을 쓴 사람의 현존presence이 느껴질 수 있어야 하고, 글은 그 필자의 실존existence을 육화한 것이어야 한다. 글의 진실성은 바로 여기에서 나오고, 인문적 삶의 기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말한 대로 행하고 행한 대로 글을 쓰며, 삶은 이런 글의 축적이자 경로이고 역사로 자리해야 한다. 글이 삶과 분리된 것이라면, 그래서 학문이 생활과 무관한 것이라면, 그 글은 누구를 위해 있는 것이고, 도대체 어디다 쓸 것인가? 그것은 지금 여기의 좁고 비루한 삶으로부터 그 너머를 희구하고, 이 희구로부터 현재적 삶의 빈약성을 다시 반성하는 데 존재 이유를 갖는다. (같은 책, 19~20쪽 참조)

문광훈 교수의 문장에서 을 지우고 대신에 시와 그림을 넣어 읽어도 전체적인 주장이나 의미하는 바는 상통하니 무방하다. 하여 시인과 화가의 삶과 분리되지 않은 것으로써 나는 시 읽는 맛, 그림 보는 재미로 책상 앞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서성이는 여름 한낮에 산책이 그만 깊어진 것이리라.

시인은 서울 종로 회동에 위치한 정독도서관 회화나무/가지 끝에 까치집 하나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초등학생 시절인 삼십 년 전을 물끄러미 회상하며 하염없이 추억한다. 덕분에 독자는 시인의 고향이 남해 금산 보리암 아래/토담집인 것을 눈치 채고 대면한다. 회화나무와 까치둥지를 매개로 타임머신 타고 마흔의 서울에서 십대의 남해로 순간 이동한다.

부모의 보살핌이 절실한 나이에 해당하는 시적 화자의 어머니는 일하러 가고/집에 남은 아버지는 직장을 구하지 못해 엄마 대신에 잠깐 살림하는 처지이고 입장이다. 어린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엄마처럼 부엌에서 물메기국 끓이고 있다. 그것도 겨우내 몸 말린 메기들 꼬득꼬득 맛 좋지만/밍밍한 껍질이 싫어 오물오물 눈치 보다/그릇 아래 슬그머니 뱉어 놓고 했던 유년 시절의 물메기국을 말이다. 말하자면 입맛의 변천사로 초등 입맛과 성인 입맛이 서로 다름을 되돌아보고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그랬던가. 시인은 친절하게 아버지의 목소리를 빌려서 한 줄의 시를 툭 내놓는다. 다음이 그 부분이다.

얘야 어른되면 껍질이 더 좋단다

하지만 껍질의 맛을 유년 시절에는 어린이가 도무지 알리 만무하다. 이제 시적 화자는 물메기국을 끓이시던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고 성장했다. 어른의 시선이 되어서 정독도서관 회화나무 가지 끝을 바라보며 맑은 물에 통무 한쪽/속 다 비치는 국그릇 헹구며/평생 겉돌다 온 메기 껍질처럼/몸 보다 마음 더 불편했을 아버지와의 갈등과 화해하며 끝내 반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회화 나무 아래 둥그렇게 앉은 밥상/간간이 숟가락사이로 먼 바다 소리 왔다 가고/늦은 점심, 물메기국 넘어가는 소리에/목이 메기도 하던 그런 풍경이 아름다운 아버지와의 추억으로 소환되고 시인의 마음에도 그려진 것이리라.

시적 화자는 실경의 시를 쓰고 완성하는 해 질 녘까지 그 모습 지켜봤을/까치집이 있는 회화나무가 어렴풋이 보이는, “정독도서관 앞길에서/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서성이는아름다운 유년 시절의 내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여름 한낮으로 환기시키며 독자에게 선물한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의 좁고 비루한 삶으로부터 그 너머를 희구하라고 삶에 지친 독자를 지금 토닥토닥 어깨와 가슴을 가볍게 다독이며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것이다. 시가 어른이 된 우리에게 현재적 삶의 빈약성을 다시 반성하는 데 존재이유를 찾고 치유할 것을 주문한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수많은 나무들 중에서 하필 회화나무를 굳이 언급한 것일까? 여기에는 숨은 뜻이 몇몇 차오르며 쌓여간다. 우리는 여름 한낮, 정독도서관 회화나무에서 시인의 시작(詩作)이 기필(起筆)이 된 것을 모두 기억한다. 기필(起筆)은 기필(期必)의 나무를 지켜보며 꿈을 키운다. 참고로 회화나무의 는 원래 ()’로 발음해야 한자로는 맞는 이치이다. 그럼에도 로 발음되는 까닭은 중국 발음 때문이다. ()의 중국 발음이 이므로 여름 철 꽃이 피는 나무 괴화(槐花)’회화로 조선 시대에 받아들인 것 같다. 아무튼 회화나무에 대해서 나무 박사 박상진 교수는 책에 이렇듯 적은 바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회화나무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 나비모양의 연노랑 꽃을 나무 가득히 피운다. 일제히 피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시간차를 두고 한쪽은 꽃이 피어나고 있고, 일부는 살랑바람에도 후드득후드득 떨어져 나무 아래에 두툼한 꽃덥개로 만들어놓는다. (중략) 중국이 고향인 회화나무는 상서로운 나무로 생각하여 중국인들도 매우 귀하게 여겼다. 회화나무를 문 앞에 심어두면 잡귀신의 접근을 막아 그 집안이 내내 평안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중략) 다른 이름으로 학자수(학자學者樹)’가 있으며, 영어 이름도 같은 의미인 스칼러 트리(scholar tree)’. (중략) 어쨌든 옛 선비들이 이사를 가면 마을 입구에 먼저 회화나무를 심어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는 선비가 사는 곳임을 만천하에 천명했다. (박상진, 우리 나무의 세계 2, 153~157쪽 참조)

시인의 아버지가 회화 나무 아래 둥그렇게 앉은 밥상으로 시적 화자인 아들을 자주 앉힌 까닭은 배우지 못한 자신보다 아들이 더 잘 나가고 훌륭하게 많이 배우며 살 것을 바라는 본능적인 욕구이다. 이는 자녀를 둔 모든 아버지의 마음이다. , 진정성과 별반 다를 바 없게 다가오는 애틋한 부정(父情)으로 만져지고 느껴진다.

이제, 강희언의 그림 <사인시음도(士人詩吟圖)>를 살피자. 이 그림은 박상진 교수의 책에도 등장한다. 박상진 교수는 강희언의 사인삼경도(士人三景圖) 중 아회도의 하나다라고 그림을 소개하면서 여섯 명의 선비가 모여 사색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다른 선비를 구경하면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덧붙인다. 그러면서 화면 중앙을 차지하는 커다란 나무를 일러 회화나무라고 설명했다.

18세기 조선의 그림, 화제(畵題)에서 아회(雅會)’란 말이 더러 목격된다. 말의 뜻은 아름다운 모임을 주로 일컫는다. 다른 말로 아집(雅集)’이 작품명에 간혹 대체된다. ‘가 정기적인 만남을 의미한다면, ‘은 오늘날 번개 모임에 해당하는 즉흥성을 내포한다. 이 점이 차별화되는 그 경계이다. 따라서 강희언의 <사인시음도>는 아회가 아닌, 아집에서 모임의 성격을 드러낸다. 요컨대 정기적인 만남이 아닌, 즉흥적인 만남의 성사로 감상자는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이 자아내는 진솔함은 고두현의 시와 마찬가지로 실경(實境)의 풍격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질적인 묘사를 감상자에게 일러주고 전해준다. 화가가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의 풍속(風俗)을 붓을 들어 화면에 담아냈기 때문이다.

그림 속을 차지하는 인물, 즉 여섯 명의 선비는 사전에 약속하고 회화나무에 모인 것이 아니다. 그냥저냥 하릴없는 백수로서, 과거급제에 실패한 공통점을 가진 사인(士人)으로 인물 설정이 나타난다. 돗자리를 차지한 네 명의 사인은 심우(心友)로 암시되고, 그들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인지, 시를 쓰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뒷모습을 드러내는 선비는 면우(面友)에 불과하다. 이들 다섯 명은 진사(進士)가 되어 출사하는 꿈을 거의 포기한 것처럼 파악된다. 왜냐하면 공부에 게을러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화나무를 등지고 유학자의 두건을 머리에 쓰고 먼 곳을 응시하는 한 선비는 5명과 좀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사람에 난 주목한다. 이 사람만이 수염을 꼬면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회화가 필 무렵에 과거시험이 열리는 진사시에 만이 왠지 모르지만 합격할 듯하다. 그림의 숨은 장치이다. 그림 속의 만이 아마도 회화나무 아래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서성이는 여름 한낮을 가장 늦게까지 머물지 않았을까.

벗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심우(心友)와 면우(面友). 심우는 선한 일을 하면 기뻐하고 과실이 있으면 타이르되, 귀천을 불문하며 어려움을 당해도 늘 한결같고 분함과 욕심을 자제할 줄 아는 마음의 친구다. 반면 얼굴로 사귄 친구, 즉 면우란 나보다 똑똑하면 시기하고 과실을 발견하면 크게 드러내며 술자리에서는 형제처럼 하지만 이해타산에서는 지극히 냉담한 데다 귀하면 후대하고 천해지면 홀대하는 사람이다.” (홍인희, 우리 산하에 인문학을 입히다, 124쪽 참조)

강희언의 <사인시음도> 회화나무에 모인 여섯 명의 선비들의 관계는 심우(心友)일까? 아니면 면우(面友)에 지나지 않을까? 나는 그들의 관계를 넷은 서로가 심우이고, 나머지 둘은 네 사람과는 그저 면우 관계일 뿐이라고. 필자는 그림을 보면서 단정하고 체감한다ylmfa97@naver.com

참고문헌고두현, 남해, 바다를 걷다, 민음사, 2020. 안대회, 궁극의 시학-스물네 개의 시적 풍경, 문학동네, 2013. 479~493쪽 참조문광훈, 사무사(思無邪), 현암사, 2012. 19~20쪽 참조박상진, 우리 나무의 세계 2, 김영사, 2011. 153~157쪽 참조홍인희, 우리 산하에 인문학을 입히다, 교보문고, 2011. 124쪽 참조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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