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연인서로 돕는 두 사람이라고 정의하자. ‘연인부부가 되려면 서로 평소 일상에서 돕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연인/원재훈

그대의 손을 잡으면

우리의 몸은 길이 된다

그 길은

너무 멀어서 갈 수 없을 것 같았던

나와 너의 마음속으로 이어져 있다

그대의 손을 잡으니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그대와 눈동자를 마주하면

우리는 큰 창문 앞에 선다

건너편 신성한 숲이 보이고

여태 보지 못했던 별들이, 단 하나의 별만이 빛난다

상처인 줄 알았던

별의 슬픔이 환한 빛이 되어 내려온다

그것 역시 길이다

그대의 몸과 나의 몸이 겹쳐지면

우리는 우주가 된다

신비한 생명의 울음소리 들려오고

내 속에서 잠들었던 영혼이 꼬리를 달고

그대에게 달려간다

그 은밀하고 좁은 길 안에서 우리가 손을 잡는다

그대의 손을 잡으면

우리의 몸은 긴 뱀처럼 늘어지고 늘어져

아프지만, 치욕스럽지만.

누군가가 밟고 갈 길이 된다

앙리 마르탱, (연인),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앙리 마르탱, (연인),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그리스어에는 사랑을 네 가지의 유형으로 분류합니다. ‘에로스는 남녀의 성적인 사랑과 열정을 의미하고, ‘필리아는 친구의 사랑과 우정을 의미합니다. ‘스트로게는 가족의 사랑과 부모와 자식의 사랑, 특히 자식을 향한 부모의 무조건 사랑을 의미합니다. ‘아카페는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숭고한 마음입니다. 아가페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무조건적인 사랑, 즉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으로 에로스와 대비됩니다. 에로스와 아카페는 크게 구분되어 보이지만, 더 넓게 생각하면 결국 합일(남녀의 합일, 신과 인간의 합일)이라는 점에서 공동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원재훈, 시의 쓸모, 254~255쪽 참조)

서로 돕는 두 사람, 연인

어떤 그림은 한 편의 시와 잘 연계된다. 그렇기에 한 장의 그림에서 우리는 어떤 시를 문득 마주침에 감사하며 안도한다. 이를테면 프랑스 화가 앙리 마르탱(Henri Martin, 1860~1943)<연인>(1903)에서 나는 시인 원재훈(1961~ )연인이 앙리 그림과 같은 장면으로 머릿속에 각인되며 떠올랐다. 아무튼 그림 같은 시, 연인은 원재훈 시집 딸기가 그 출처이다.

시를 소개하면서, 문학평론가 박철화는 책에 이렇게 적은 바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가족과 함께, 자연과 교감하고 경탄하며 깨달으면서, 생명의 신비가 숨쉬고 있는 곳을 찾아 나서는 것, 그것이 시인이 그리는 사랑의 세계다. 이 사랑은 그래서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마치 싹을 틔우는 씨앗처럼 자신은 사라지면서 자기와 관계를 맺고 있는 타자(他者)들을 부각시킨다. (박철화, 문학적 지성, 141쪽 참조)

박철화의 이 비평은 <연인>을 그린 화가 앙리 마르탱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화가의 작품 세계에서 유독 돋보이는 점이 부인(마리)에 대한 애틋한 사랑으로 붓끝에서 초지일관 그려지며 에로스와 아카페로 가족이란 관계를 맺고 모델로서 마리를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화가는 모자가게 점원 출신의 아내와 처음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에 골인했는데 1930년 마리가 죽을 때까지 아내가 모델이 되는 사랑스런 그림들을 많이 작품으로 그려 낸 바 있다. 예컨대 <부부가 있는 풍경>(1930)이 그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된다.

앙리 마르탱, (부부가 있는 풍경),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앙리 마르탱, (부부가 있는 풍경),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앙리 마르탱의 작품에 대해 기상청 기상캐스터 출신의 이세라 작가는 미술관에서는 언제나 맨얼굴이 된다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다음이 그것이다.

앙리는 결코 두 연인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멈춰 선 채 마주보든, 함께 길을 걷든 그들은 서로의 손을 붙든다. 사랑한다는, 행복하다는 말을 건네는 대신 그렇게 한다. 그들이 거닐고 있는 장소는 더없이 따스하다. 봄에 핀다는 사과꽃이 흐드러지고 양들은 햇살 아래에서 풀을 뜯는다. (중략) 작품 활동 초반에는 신화 속 주인공을 그리기도 하고 다분히 상징적인 작품을 남기지만 나이 마흔을 기점으로 그의 화풍은 변화한다. 앙리는 밝은 색조에 빛의 효과를 중시하는 야외 풍경에 천착하기 시작한다. 상징주의를 등지고 인상주의를 택한 것이다. (중략) 1881년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에 아내 마리와 결혼한 이후 평생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았으며 그녀를 모델로 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중략)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의 화풍과 연인, 사랑이라는 주제가 잘 어울린다. 앙리의 그림은 사랑을 믿는 이, 사랑을 꿈꾸는 이를 위한 그림이다. 그의 그림에는 일상을 바라보는 긍정의 시선이 넘쳐난다. (같은 책, 291~292쪽 참조)

이쯤에서, 우리는 원재훈의 연인전문을 다시 읽어야 한다. 시를 낭송하다 보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은 느낌으로 를 세우면서 몰아간다. 부지불식 그것에 는 말려든다. 시를 그림처럼 읽는, 내 눈빛은 차츰 변화의 소용돌이, 흉중에 파란을 금세 일으킨다. 처음엔 에로스로 혀끝이 달달하다 곧 끈적댄다. 그러다가 아카페로 사랑은 경건함에 종내 가닿는다. “아프지만, 치욕스럽지만,/누군가가 밟고 갈 길이 생겨난다. 이는 기도의 자세로, 결국 합일의 경지를 이룩한다. 하여 시를 읽는 내 마음을 앙리의 그림처럼 다독인다. 이내 연인을 생각하고 바라보는 시선은 분홍(에로스)에서 파랑(아카페)으로 비워지고 간수된다. 그러니까 시적 자아는 시인이 말한 네 가지의 유형에서 사랑의 길을 오래 걷도록 탐색한다.

그대의 손을 잡으면

우리의 몸은 길이 된다

그 길은

너무 멀어서 갈 수 없을 것 같았던

나와 너의 마음속으로 이어져 있다

그대의 손을 잡으니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그대는 내가 사모하는 대상을 구체화로 가리킨다. 사모는 사랑으로 세상에서 회자된다. 그것들은 남녀의 성적인 사랑으로 나타나고 그 길을 우리에게 가라고 안내한다. 어디 그뿐인가. “그 길은 애정만이 아닌 친구와의 우정도 종종 살면서 불러온다. 그리고 성적인 사랑을 희구하던 남녀가 부모로서 나이가 되면, 자식 사랑으로 그것은 또 변질되고 부각된다. 그렇다. 원재훈의 연인과 앙리 마르탱의 <연인>은 존재의 합일을 독자가 희망토록 선명하게 다다른다. 연시연화(戀詩戀畵)의 작품 세계인 길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구축한다. 또 그림자는 나이로서 를 불현듯 불혹(不惑)과 부록(附錄)의 경계로 차지하며 깨우친다. 그렇기 때문에 을 의미하는 한자 ()’는 마흔 이전의 로 인도한다. 마흔 이전의 를 만나보자. 그러면 머리() 싸움에 골몰했던 과거가 이력으로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마흔 이후의 를 직면하면 세상에서 말하는 불혹의 길에 내가 들어선 것인지, 아니면 나는 없고 종과 머슴의 모습만 남은 부록의 길에 내가 진입한 것인지를 주목하고 반성하며 바라보는 그 길에 절로 응시한다. 이를 한자 ()’로 옛 사람들은 표현했다. 한시에 곧잘 적어냈다.

원재훈의 시와 앙리 마르탱의 그림은 작가의 나이, 마흔 이후로 세상에 발표된 작품이라는 점이 그 공통점이다. 시인과 화가는 부록의 길을 경계한다. 각자 불혹의 길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의 1연이 남녀의 성적인 사랑을 차지한다면, 시의 2연은 친구와의 우정이 엿보인다. 친구인 그대와 눈동자를 마주하면/우리는 큰 창문 앞에 선다라는 구절은 고전예기학기편에 등장하는 독학이무우, 즉고루이과문(獨學而無友, 則孤陋而寡聞)”이란 명문장을 연상케 촉발한다. “홀로 배우기만 하고 친구가 없다면, 즉 고루해지고 견문이 적어진다라는 뜻이다. 때문에 건너편 신성한 숲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태 보지 못했던 별들이, 단 하나의 별만이 빛난다라는 진리에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시의 3연은 부모의 무조건적인 자식 사랑으로 다가온다. 물론 남녀의 성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그대의 몸과 나의 몸이 겹쳐지면/우리는 우주가 된다라는 구절도 있지만, 이를 통해서 신비한 생명의 울음소리 들려오고/내 속에서 잠들었던 영혼이 꼬리를 달고/그대에게 달려간다/그 은밀하고 좁은 길 안에서 우리가 손을 잡는다라는 나머지 구절을 통해서 이것이 바로 가족의 사랑 스트로게의 진입임을 알 수 있다.

시의 4연에서 그대는 아카페 사랑, 즉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숭고한 마음으로 으로 보여준다. 마흔 이후의 부부의 삶이 단적으로 압축된다. 구체적으로 그 나이가 되면 우리의 몸은 긴 뱀처럼 늘어지고 늘어져/아프지만, 치욕스럽지만,”의 경계에 진입한다. 이 경계의 길을 통해서 우리는 아름다운 부부 생활을 이룩한 바 있는 선배, -모델인 누군가가 밟고 갈 길을 찾아가기에 도착한다. 이때부터 불혹으로 승리하기도 하고, ‘부록이 되어서 패배하기도 한다. 이것이 사람들 사는 세상사의 이치이다.

연인서로 돕는 두 사람이라고 정의하자. ‘연인부부가 되려면 서로 평소 일상에서 돕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연인 같은 친구, 친구 같은 부부, 서로를 당신이라고 존경하며 부르는 부부가 그림처럼, 시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행복해 보이는 까닭은 자기()를 마흔 이후에도 잃지 않고 그 길을 잘 걸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기필코 생각한다. 그게 원재훈의 시와 앙리 마르탱의 그림을 보면서 든 내 느낌이고 인상이다. 하여간 내 주변에 내가 사랑하는 그대가 있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인생의 남은 길을 그대의 손을 잡으니/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라고 고백하고 싶다.

참고문헌

원재훈, 딸기, 문학동네, 2003. 원재훈, 시의 쓸모, 사무사책방, 2021. 254~255쪽 참조박철화, 문학적 지성, 이룸, 2004. 141쪽 참조이세라, 미술관에서는 언제나 맨얼굴이 된다, 나무의철학, 2020, 291~292쪽 참조. ylmfa97@naver.com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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