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소설가
언론인, 소설가

조선 제2대 왕. 세종이 새 임금으로 권좌에 오르자 상왕이된 태종은 왜 아들인 세종의 장인이며 며느리 소헌왕후의 친정 아버지를 죽이고 장모를 노비로 만들었을까?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 나면서 모든 권한을 세종에게 넘긴 것이 아니라 병권만은 자기가 행사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병권에 흠집을 낸 것 같은 사소한 사건이 있었다.

병조 참판인 강상인이 왕궁의 시위(경호) 문제를 놓고, 시위 갑사(병졸)를 증원하지 않고 두 패로 갈라 상왕 태종이 있는 수강궁과 세종이 있는 경복궁을 경호 하게 했다. 이것은 병권에 속하는 일인데 왜 마음대로 했느냐 하는 트집이다. 이 사건이 번져 군권은 한 곳에서 나와야 한다는 이론에 심온 영의정이 동의를 했다는 것이 첫째 죄목이다.

이는 태종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병권 장악에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고 확대 해석 했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심온의 세력이 커져 장차 왕권이 외척에게 휘둘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온은 본래 무반 집안으로 명문가였다. 거기다가 딸이 왕비가 되고 심온 자신은 영의정이 되었으니 이보다 막강한 권력이 있겠는가? 세종이 즉위하자마자 심온 영의정은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를 방문한다. 심온이 명나라로 떠나던 날 광화문에는 환송인사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전송비 명목으로 받친 뇌물이 산더미였다.

태종은 이런 꼴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주변에서 우쭐대거나 돈이나 받아먹으면 뜨거운 맛을 보게 된다.

태종은 외척이 실세가 되기 전에 싹을 도려내야한다고 생각했다.

심온 영의정이 명나라에 있는 동안 꼬투리가 잡힌 강상인과 병조 고위층으로 있던 세종 임금의 처남은 참형을 당했다.

상왕(태종)은 심온 영의정이 명나라에서 돌아올 때 의주 땅에 들어서거든 즉시 체포해서 한양으로 압송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영문도 모르고 잡혀온 심온 대감은 경복궁에서 추국(심문 및 고문)을 당하고 조작된 역적 누명을 쓴 채 수원으로 끌려가 강제로 자결한다. 왕비의 어머니는 변두리 관아의 종으로 끌려가며 집안이 풍비박산된다. 그러나 사위인 세종 임금이나 딸인 소헌 왕후는 통곡만하고 아무 힘도 쓰지 못한다.

태종의 이러한 모습은 뒤에 수양대군한테서 복사하듯이 되풀이된다. 전대 왕비의 묘를 파헤쳐 복수하는 것도 똑같이 되풀이된다.

태종은 왕실과 관련 있는 인척을 도륙(屠戮) 내는 일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부왕인 태조가 역성(易姓)혁명을 일으켜 조선국을 세울 때부터 태종은 칼에 피를 묻히며 혁명을 함께 하던 사람이었다.

비록 수하의 손을 빌리기는 했으나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타살한 것부터 시작하여 무수한 목숨을 희생 시키고 부왕을 왕좌에 오르게 한 강철 같은 무인이 태종이다. 정원대군 시절 당대의 실권자 정도전을 비롯해 남 은 등의 반대파를 모조리 칼로 베었다. 그뿐 아니라 비록 배다른 아우이긴 하지만 세자 방석의 형제까지 죽이고 스스로 용상에 앉은 불굴의 혁명가 태종이다.

그러나 태종이 휘두른 칼은 정치 보복의 성격이 강하다. 심온 영상을 벤 것은 세종 임금 처족의 권세를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자신의 안위를 지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새로운 권력이 등장하면 기강을 세우기 위해 서릿발 같은 사정의 칼날을 휘두른다. 과거 정권의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정적의 세력을 잘라내는 작업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새 정권 기강 세우기 사정 작업은 자칫하면 정치보복의 오해를 받기 때문에 특별히 조심하고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정말 국민의 적인가를 잘 가려서 해야 할 것이다. myswoo@nate.com

이상우

언론인이며 소설가.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일간스포츠, 스포츠서울, 굿데이 등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일간신문을 창간한 언론인. 역사, 추리 소설가인 저자는 세종대왕 이도, 신의 불꽃 등 4백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저작권자 © 스페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