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새해가 시작됐다. 임인년(2022)이 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웃음은 언제나 울음과 정비례 관계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음이 부족했다. 늘 정량을 채우지 못하고 미달로 모자랐던 것 같다. 이 때문일까, 누군가 내게 너 행복했니? 하고 물으면 자신 있게 행복했다고 답하지 못한 것만 같다.

고쳐 쓰는 묘비/김선우

태어날 때의 울음을 기억할 것

웃음은 울음 뒤에 배우는 것

축하한다 삶의 완성자여

장렬한 사랑의 노동자여

베르트 모리조, (요람),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 미술관.
베르트 모리조, (요람),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 미술관.

“시와 그림은 캔버스와 물감과도 같은 관계입니다. 어떤 시를 읽으면 그림이 남고, 어떤 그림을 보면 시가 읽힙니다.” (원재훈, 《시의 쓸모》, 294쪽 참조)

나이가 든다는 것, 일체개고

김선우(金宣佑, 1970~ ) 시인의 「고쳐 쓰는 묘비」를 읽으면 인상주의 화가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1841~1895)의 그림 <요람>(1872년 作)이 먼저 희미하게 연상되고 아른거리며 남는다. 그러다가 문득 또 하나 그림이 겹쳐지는데, 예를 들자면 밀레 모작으로 유명한 고흐의 <첫걸음>(1890년 作)이 그 좋은 예에 속한다. 다시 김선우의 두 줄 시를 가만히 읽어보자.

빈센트 반 고흐, (첫걸음),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첫걸음),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태어날 때의 울음을 기억할 것

웃음은 울음 뒤에 배우는 것

모리조의 <요람>에 등장하는 검은 옷의 여인은 잠든 아기의 엄마이다. 모녀의 애정이 쌍방향으로 전송됨이 부드러운 요람을 덮은 사선을 경계로 보여진다. 왼손으로 턱을 괸 채 다정하게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는 눈빛은 어쩌면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혹 모를 일이다. 이를테면 “넌, 태어날 때의 울음을 기억하니?”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시의 화자는 엄마 목소리로 1행 “태어날 때의 울음을 기억할 것”까지만 낭송한다. 반면에 2행을 차지하는 “웃음은 울음 뒤에 배우는 것”은 시의 화자로 아빠 목소리가 어울린다.

아빠를 향해 뒤뚱뒤뚱 막 첫걸음을 떼고자 엄마의 품을 처음으로 떠나면서 걷는 아가를 아주 대견하고 기특하게 쳐다보며 두 팔을 활짝 뻗으며 포옹하려는 부성애란 바로 이런 모습이지 싶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자 강신주의 최근작,《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에 등장하는 시 해설은 여간 귀하고 깊이 있는 철학자의 날카로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강신주는 책에 이렇게 적고 있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행복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는 한 고통, 불행, 불만족의 상태에 있어도 우리 삶은 계속된다. 삶에서 고통이 1차적이고, 행복이 2차적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김선우 시인이 「고쳐 쓰는 묘비」라는 시에서 간파한 것도 바로 이것이다. (중략) 울음은 고통의 표현이고 웃음은 행복의 표현이다. 중요한 것은 울음이 먼저이고 웃음은 그 다음이라는 시인의 통찰이다. 웃으니까 우는 것 아니냐는 말장난이나 사유 실험은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이제 탄생했던 순간으로 돌아가보자. (같은 책, 20~21쪽 참조)

나는 1964년 4월 19일(양력)에 이 땅에 처음 태어났다. 다 기억을 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나 자신도 엄마 자궁에서 나오면서 울면서 탯줄을 끊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라는 이유로 그동안 잘 울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난 세월을 하염없이 되돌아보자면 그렇다.

어쨌건 또 새해가 시작됐다. 임인년(2022)이 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웃음은 언제나 울음과 정비례 관계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음이 부족했다. 늘 정량을 채우지 못하고 미달로 모자랐던 것 같다. 이 때문일까, 누군가 내게 너 행복했니? 하고 물으면 자신 있게 행복했다고 답하지 못한 것만 같다. 그렇기에 시인처럼 나 자신을 위해 '고쳐 쓰는 묘비'를 이제는 차마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

축하한다 삶의 완성자여

축하를 받기 위해서는 더 많이 울어야만 한다. 더 많이 사랑할 줄 알아야만 한다. 우리 시대의 뛰어난 철학자 강신주는 책에서 불교 경전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교의 가르침은 고(苦), 즉 고통의 자각 혹은 고통의 느낌에서 출발한다. ‘일체개고(一切皆苦)’는 ‘일체 모두가 고통이다’라는 싯다르타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모든 것이 고통이라니, 얼마나 당혹스러운 가르침인가? 보통 종교라면 희망과 낙관적인 미래를 이야기하기 마련인데, 불교는 애초부터 모든 것이 고통이라고 말한다. 불교 경전에는 ‘타타나(tathata)’라는 산스크리스트어가 자주 반복된다. ‘있는 그대로’라는 뜻의 타타타는 한자어로 진여(眞如), 여실(如實), 혹은 여여(如如)라고 번역된다. 마음 속에 어떤 선입견도 갖지 않고 외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일체개고’는 타타타한 진실, 여실한 진리, 혹은 여여한 현상이다. (같은 책, 25쪽 참조)

나이가 든다는 것. 이것은 내가 아기 때처럼, 혹은 어린 유아 시절처럼 ‘있는 그대로’의 삶을 쉽게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맥락이 통한다. 막상 성인이 되면, 더 많이 속내를 감추게 된다. 드러내면 손해니까. 또한 더 많이 울려고 하지 않는다. 자꾸만 타인 앞에서 애써 웃으려고 노력한다. 웃어야만 세상은 처세가 되니까. 이제 김선우 시인이 고친 마지막 묘비에 적힌 시 한 줄을 보자. 다음과 같다.

장렬한 사랑의 노동자여

사랑이 무언가. 그것에 대해 철학자 강신주는 “사랑은 타인의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다시 말해 타인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의지이자 감정”이라고 했다. 이 사랑의 의지와 감정이 ‘나’를 계속 울도록 견인한다. 울어야만 가짜가 아닌, 진짜 웃음이 내게로 찾아든다. 그러니까 나이가 든다는 것, 이것은 내 웃음 뒤로 울음을 참고 산다는 말이다. 이 행복하지 못한 고통은 있는 그대로 울어야만 해방이 된다. 

ylmfa97@naver.com

◆ 참고문헌

김선우, 《녹턴》, 문학과지성사, 2016. 강신주,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이비에스북스, 2020. 19~52쪽 참조. 원재훈, 《시의 쓸모》, 사무사책방, 2021. 294쪽 참조.최혜진, 《명화가 내게 묻다》, 북라이프, 2016. 나카노 교코, 이연식 옮김 《미술관 옆 카페에서 읽는 인상주의》, 이봄, 2015, 163~169쪽 참조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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