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18)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제비꽃은 매년 4월이 오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 오면 봄()을 우리에게 허락한다. 그리스어로는 비올라(Viola)로 부르고, 유럽은 바이올렛(Violet)으로 표기한다. 꽃말에 성실’, ‘겸손이란 뜻이 보인다. 다르게는 순진한 사랑혹은 나를 생각해 주오라고 나오는데, 그 까닭이 비단 심상치 않다.

한 사람을 사랑했네 3/이정하

오늘 또 그의 집 앞을 서성거리고 말았다.

나는 그를 잊었는데

내 발걸음은……, 그를 잊지 않았나 보다.

에두아르 마네, (제비꽃 다발),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에두아르 마네, (제비꽃 다발),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 라는 명칭은 남송(南宋) 때에 비로소 사용되었고, (오대(五代)와 북송 초기에는 곡자사(曲子詞)라고 했다. 곡자사라는 말을 분석해보면, 곡자(曲子)는 곡조라는 뜻이고 사()는 가사라는 뜻으로, 곡조에 맞추어 부르는 가사(歌詞), 즉 노랫말이라는 뜻이다.” (이동향, ()란 무엇인가부분)

제비꽃, “나를 기억해 주세요.”

노랫말. 그 가사가 매우 시적이다. 가수 조동진, 하덕규 등의 노랫말은 차라리 한 편의 사()! ()라고 말해도 좋을 테다.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멀리 새처럼 날으고 싶어.” 이 노랫말이 가리키는 소녀는 유부남 마네에게 있어서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1841~1895)일 테다.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는 모리조를 위해서 1872<제비꽃 다발>을 그렸고, <제비꽃 장식을 한 베르트 모리조>를 완성한 바 있다.

그러니까 조동진(趙東振, 1947~2017) 작사·작곡·노래, 예컨대 제비꽃이 실은 한 편의 명화(名畵)와 관련된다. 속궁합이 찰떡이다.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마네는 제비꽃 다발과 편지, 사선 방향으로 접은 부채를 모리조에게 선물로 보냈던 것일까.

스테디셀러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라는 책에서, 미술평론가 이주은 교수가 남긴 해설을 들어보자. 다음이 그것이다.

마네에게 있어 모리조는 정말로 여리고 귀여운 제비꽃 같은 여자였다. 스승과 제자였고, 마네의 그림 속 화사한 모델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앙증맞은 여자친구이기도 했다. 마네를 무척이나 따르고 존경했던, 그리고 이미 결혼한 마네의 곁에 어떤 방식으로든 머물고 싶었던 소녀는, 결국엔 마네의 모습이 느껴지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마네 동생의 부인이 된 것이다. (같은 책, 240쪽 참조)

제비꽃은 매년 4월이 오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 오면 봄()을 우리에게 허락한다. 그리스어로는 비올라(Viola)로 부르고, 유럽은 바이올렛(Violet)으로 표기한다. 꽃말에 성실’, ‘겸손이란 뜻이 보인다. 다르게는 순진한 사랑혹은 나를 생각해 주오라고 나오는데, 그 까닭이 비단 심상치 않다. 그리스 신화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아라는 예쁜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아티스라는 양치기 소년을 사랑했다. 이를 시기한 비너스가 아들 큐피드를 시켜서 이아에겐 사랑의 화살을 맞게 하고, 아티스에게 사랑을 까맣게 잊는 납 화살을 맞게 했다고 한다. 그러니 그 결과가 뻔하다. 비극이다. 한쪽은 기억하는데 한쪽은 전혀 기억할 수 없으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결말로 남게 된 것이다.

그런 전설을 모를 일 없는, 유부남이었던 마네는 <제비꽃 다발>을 모리조를 위해 그린 것이지 싶다. 다시 말해, 우리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니 그만 잊어달라는 메시지가 그림이 되어 화폭 가득 세 가지 사물로 담겨진 것이다. 제비꽃, 접힌 부채, 편지지를 굳이 넣은 이유가 무엇인가. 한마디로 단념(斷念)해 달라, 기억하지 말라는 그런 부탁인 셈이다. 이것은 또한 마네가 모르조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마음이 보여진다.

앞에서 소개한 이정하(1962~ )38자의 시는 편지에 등장한다. 시집에 수록된 시가 모두 연인에게 쓴 편지투로 다가오고 새겨진다. 연인을 지금은 잃어버린 심정을 어쩌면 이렇게 절묘하고 짤막하게 압축해 놓았을까. 읽으면 또 읽을수록 유명한 송사 한 편이 살포시 포개진다. 중국 북송사의 대표적 사인 주방언(周邦彦, 1056~1121)의 노랫말(배성월만) 일부와 분위기가 흡사하다.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怎柰向, 一縷相思 즘내향, 일루상사

隔溪山不斷 격계산부단

어이할까나 이 한 가닥 그리는 정은

산과 물이 막아도 끊어지질 않으니

누구든 예외가 될 수 없다. 큐피드가 쏜 사랑의 화살을 맞으면 이성이 있더라도 물불을 가리지 못하게 된다. 그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된다. 그런 사랑의 열정을 가리켜, 우리말로 눈에 콩깍지가 쓰였다고들 말한다. 말하자면 산과 강, 바다에 가로막혀도 기어이 내 발걸음은……, 그를 잊지 않았기에 오늘 또 그의 집 앞을 서성거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한 사람을 사랑하는 정을 끊어버리는 것이 쉽지가 않다. 몹시 어렵다.

여기 눈에 콩깍지가 낀 한 서양 여인이 있다. 그녀는 산을 건너고, 지금 바다를 가로지르는 배의 갑판 위에 외따로 서 있다.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 애벗 풀러 그레이브스가 그린 <갑판 위에서>가 그것이다. 우리는 모델에게서 눈에 콩깍지가 낀 것을 금세 눈치로 알아채게 된다.

애벗 풀러 그레이브스, (갑판 위에서),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애벗 풀러 그레이브스, (갑판 위에서),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넘실대는 바닷가 파도의 색깔이 제비꽃과 닮았고, 화살을 대신하는 여인의 모자 장식 묶음 매듭이 동일한 색깔로 바람에 나풀나풀 휘날리고 있다. 다행히 이와 관련, 우지현 작가의 혼자 있기 좋은 방(위즈덤하우스, 2018)에 좋은 설명이 있어 여기에 그대로 인용한다. 다음이 그것이다.

한 여자가 배 난간에 기대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하늘에 먹구름이 짙게 드리웠고 쪽빛 바다에는 거센 풍랑이 일고 있다. 여자의 모자 장식이 왼쪽에서 오른쪽을 향해 휘날리고, 치맛자락은 반대 방향으로 펄럭이는 것으로 보아 사방에서 정신없이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찬 바람이 휘몰아쳐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다. 아직 비는 내리지 않지만 당장 폭우가 쏟아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날씨다. 한마디로 을씨년스럽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같은 책, 269쪽 참조)

그녀가 지금 가는 곳이야 아주 뻔하다. ‘가 사는 집 앞이 목적지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길한 기운을 감출 수 없는 까닭은 그가 까맣게 그녀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몇 번 씩이나 보낸 편지에 아무런 답장이 없는 이유를 모르는 그녀만 발걸음이 급할 뿐이다. 먼저 제비꽃 다발과 편지도 같이 보냈어야 했는데…….ylmfa97@naver.com

참고문헌

이정하, 편지, 책만드는집, 2012. 주조모, 이동향 역주 송사삼백수(宋詞三百首, 문학과지성사, 2011. 235, 340쪽 참조.이주은,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 이봄, 2013. 238~240쪽 참조우지현, 혼자 있기 좋은 방, 위즈덤하우스, 2018, 269쪽 참조.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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