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17)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여름엔 갈잎이 드리우는 그늘로 넉넉한 즐거움()을 주는 나무()라서, 늦가을까지 먹을 것 못 찾는 가난한 이웃에게 구하면() 먹을거리를 나눠주는 나무()라서, 심지어는 봄부터 가을까지. 나뭇가지에 공짜로 집을 짓고 사는 누에가 날개()를 다는 변신의 공간인 나무()

상수리나무/안현미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날 배봉산 근린공원에 갔지 사는 게 바빠 지척에 두고도 십 년 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그곳 상수리나무라는 직립의 고독을 만나러 갔지 고독인지 낙엽인지 죽음인지 삶인지 오래 묵은 냄새가 푸근했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날 죽음이 다음이어야 하는지를 묻기 위해 배봉산 근린공원에 갔지 바퀴 달린 신발을 신은 아이는 바퀴를 굴리며 혼자 놀고 있었지 어차피 잠시 동안만 그렇게 함께 있는 거지 백 년 후에는 아이도 나도 없지 상수리나무만 홀로 남아 오래전 먼저 저를 안아버렸던 여자의 젖가슴을 기억해 줄 테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날 그곳에 갔지 직립의 고독을 만나러 갔지 죽음이 다음이어야 하는지를 묻기 위해 상수리나무를 만나러 갔지

끝내기 위해서는 시작해야만 한다. 끝날 줄 알면서도 시작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안현미, 이별수리센터부분)

상수리나무, 한자의 비밀

서른이 지나고 아마도 마흔 무렵, 부터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날이 여드름처럼 생겨났다. 마흔은 그렇게, 속수무책 지났다. ! 고비와 만났다. 사막에 처한 삶을 살았다. 겨우 사막을 빠져 나왔다. 그러나 길은 점입가경, 어두운 터널로 계속 이어졌다.

이 가을! 산책 중에 걷다가 지는 꽃 만나 길게 탄식함(行逢落花長歎息)”이 무시로 잦아졌다. “올해 꽃 지면 얼굴 변함(今年花落顔色改)”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나이, 육십이 곧 낼 모레이기 때문이다. 올해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 봄이 오는 내년 꽃필 때면 누가 또 건재할까?(明年花開復誰在)”라는 유명한 시구를 절로 기억하며 나직이 가까이로 읊조리게 된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날 배봉산 근린공원에 갔지 사는 게 바빠 지척에 두고도 십 년 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그곳 상수리나무라는 직립의 고독을 만나러 갔지 고독인지 낙엽인지 죽음인지 삶인지 오래 묵은 냄새가 푸근했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날

안현미(1972~ ) 시인의 상수리나무는 그녀의 세 번째 시집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창비, 2014)에 나온다. 시에서 화자는 왜 하필이면 상수리나무를 만나러 갔던 걸까? 상수리나무를 뜻하는 한자를 찾아보자. 대표적으로 ()’이란 낱말이 있고 ()’ 자도 쓰인다. ()’ 자가 있긴 하다. 알다시피 상수리나무는 참나뭇과에서 가장 흔히 보게 되는 나무다. 도토리묵이 되는 열매 도토리를 해마다 가을이면 나무가 토해낸다.

한여름엔 갈잎이 드리우는 그늘로 넉넉한 즐거움()을 주는 나무()라서, 늦가을까지 먹을 것 못 찾는 가난한 이웃에게 구하면() 먹을거리를 나눠주는 나무()라서, 심지어는 봄부터 가을까지. 나뭇가지에 공짜로 집을 짓고 사는 누에가 날개()를 다는 변신의 공간인 나무()라서는 의미부여를 그렇게 한자로 만들었던 것일까.

배봉산 근린공원. 그곳에 있는 상수리나무. 서 있는 한 그루 상수리나무, 직립의 고독을 만나러 갔다는 시인은 낙엽을 통해서는 그늘()의 평안함과 안식을 얻는다. “죽음인지 삶인지 오래 묵은 냄새는 도토리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생계()를 도모함이 목적이다. 또한 죽음이 다음이어야 하는지를 묻기 위한 과정을 통해서 누에고치가 번데기를 지나서 날개를 얻기 까지. 즉 한 마리 나방으로 탈바꿈해 변신()을 욕망한다.

이와 관련, 중국의 석학, 이중톈(易中天, 1947~ ) 교수가 쓴 백가쟁명에는 상수리나무()가 등장하는 기막힌 글이 보인다. 다음이 그것이다.

<제물론>에 나오는 장자의 나비 꿈을 예로 들어보자. (중략) 꿈속에서 나비로 변해 자유롭게 날 때는 자신이 정말 나비인 것 같았다. 두 날개를 팔랑이며 꽃무리 속에 날아다니며 기뻐하는 모습을 장자는 허허연栩栩然이란 세 글자로 남김없이 표현했다. 이후 문득 잠에서 깨어 자신이 나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상실감을 느꼈을 때는 거거연蘧蘧然이란 세 글자로 자신의 느낌을 압축했다. 과연 장자답다! (같은 책, 337쪽 참조)

따라서 안현미의 시세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상수리나무는 장자가 말한 호접몽胡蝶夢과 비슷하다. 상수리나무가 화자와 동일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바퀴달린 신발을/신은 아이를 관찰하는 존재가 나무인지 인간인지 애매모호와 의미심장으로 처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백 년 후에는 아이도 나도 없지 상수리나무만 홀로 남아 오래전 먼저 저를 안아버렸던 여자의 젖가슴을 기억해 줄 테지

특히 이 부분에서 그렇다. “바퀴 달린 신발을 신은 아이혼자그리고 상수리나무” “(: 상수리나무)” “여자의 젖가슴의 표현은 다시 봐도 화자가 장자처럼 꿈에서 나비가 되어 펄펄 날아다닌 것도 이고 갑자기 꿈에서 깬 장주도 라는 일인칭으로 드러난다.

어쨌건 안현미의 시는 스위스 출신의 프랑스 화가 펠릭스 에두아르 발로통(Fellix Vallotton, 1865~1925)의 명화 <>(1899)을 떠올리게 부추긴다. 빨간 공을 잡고자 달려가는 그림 속의 아이가 약 100년이 지난 후엔 둥근 바퀴 달린 신발을 신은 아이로 바뀐 것뿐이다. 멀찌감치 상수리나무로 우거진 숲가에 서 있는 두 여인의 시선은 수다로 이어져 아이를 방관하고 있다.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무튼 나도 상수리나무가 있는 숲으로 곧 떠나고자 한다. 끝내기 위해서는 시작해야만 한다. 공처럼 둥근 바퀴 달린 것을 타고…….

<>에는 두 가지 세계가 존재한다. 이 그림에서 펠릭스 발로통은 화면을 대각선으로 양분했다. (중략) 어른들은 담소를 나누고, 아이는 공을 쫓아 걸어간다. (중략) 공을 쫓는 아이를 따라가면 어린 시절의 추억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 발로통은 현실적인 감각으로 어른과 아이의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했다. 이미 성인이 된 우리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아이의 세계에 닿을 수 있을까? (명화 큐레이션 북여름의 축제, 9쪽 참조)

 ylmfa97@naver.com

참고문헌

안현미,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창비, 2014. 이중톈, 심규호 옮김 백가쟁명, 에버리치홀딩스, 2010. 337, 340쪽 참조미술문화, 명화 큐레이션 북여름의 축제, 미술문화, 2020, 8~9쪽 참조강판권, 나무사전, 글항아리, 2010, 737~739쪽 참조.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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