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16)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그림, <수향산방 전경>(1944)은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 1904~1967)이 해방 전에 그린 것이다. 그림 속 마당에 키 큰 남자는 수화 김환기 화가이고, 의자에 앉은 이는 아내 김향안이다. 처마와 감나무 사이, 조붓한 마당에 괴석가 등이 보이는 일본식 집은 오늘날 환기미술관이 되어 서울 종로구 부암동 산꼭대기에 둥지를 여전히 트고 있다.

부부/이재무

안방 침실에서 네 명의 남녀가 잔다

등 돌려 벽 보고 자는 부부

모텔에서 만난 사내 떠올려 몰래 얼굴 붉히는 아내와

개구리 피부처럼 매끄러운 계집 맨살

짜릿짜릿 감촉 삼삼해 파자마 속 불끈 솟는 아랫도리

지그시 누르며 딴청 피우는 남편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들 부부에게

애정 싸움은 추억이 된 지 오래다

지루한 장마철, 버팀목으로나 가까스로 견디는,

쩍쩍 금이 가고 한쪽으로 형편없이 기울기 시작한 축대

보기에는 아슬아슬해도 여간해서는 붕괴되지 않듯

이 부부가 지키는 울타리 또한

쉽게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속고 속이는 일도 오래되면 잠옷처럼 익숙해져 편안한 것인가

아이들은 제멋대로 알아서 잘 크고 있고

집안 대소사며 직장일, 맡겨진 의무에 성실,

근면한 중년 내외 줄다리기식 사랑은

신혼 때와 달리 서로 힘쓰지 않음으로써 평형이 가능해진다

새근새근 사이좋게 들숨날숨 서로 들이마시며

금슬 좋은 부부 긴 잠을 잔다

김용준, (수향산방(樹鄕山房) 전경),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환기미술관
김용준, (수향산방(樹鄕山房) 전경),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환기미술관

중국 청나라 때 시인 원매(袁枚, 1716~1797)시서를 많이 읽으면 운명 역시 아름다워진다.(多讀詩書命亦佳)”라고 하였습니다. (공광규,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15쪽 참조)

가정은, 조붓한 마당()이 보이는 집()

안방 침실에서 네 명의 남녀가 잔다

시 한 줄이 나를 마구 흔든다. 해마다 십일월 십일일은 쳇바퀴가 되어 다가온다. 동네 편의점이나 상업시설 밀집 대형마트에선 빼빼로데이라고 야단법석이고 재래시장 뒷골목 떡집에선 가래떡데이라고 맞장구치며 전쟁한다. 응수한다. 이를 시인 이재무(1958~ )도 놓치지 않고서 가세한다. “안방 침실에서 네 명의 남녀가 자는 기념일(1111)로 술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서 우리들 민낯을 까발려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부부가 어째서 두 명이 아니고 네 명이란 말인가. 이어지는 시를 계속 따라가면 그 답이 보인다. “등 돌려 벽 보고 자는 부부는 신혼이 끝나면 자연스레 마주치는 현상이다. 일종의 통과의례다. 그 익숙한 잠자리는 어쩌면 부정할 수 없다. 이는 중년의 부부에게 곧 현실로 닥쳐오기 때문이다.

서로 등 돌려 벽을 보고 자는 부부. 이런 그림이 가능해지는 것은 아내가 모텔에서 만난 사내 떠올려 몰래 얼굴 붉히며 둘이 된 상상을 하기 때문이고, 남편은 하룻밤 잔 나이 어린 매끄러운 계집 맨살을 느끼고자 파자마 속 불끈 솟는 아랫도리/지그시 누르며 딴청 피우는 상상을 또한 몰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안방 침실엔 보이지 않는 둘이 더 있는 셈이다. 합이 네 명이 되는 임계점에 다다른다.

임계점이 있어 겉에서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그렇고 그런 평범한 부부로 살게 된다. 덕분에 아이들은 제멋대로 알아서 잘 크고 있고/집안 대소사며, 직장일, 맡겨진 의무에 성실,/근면한 중년 내외로 소문나고 알려진다. 타인의 시선에 그리 비춰지는 것이다. 어쨌건 공광규 시인의 해설은 이렇다. 다음이 그것이다.

이들 부부는 같은 침실만 사용할 뿐 마음과 몸은 따로입니다. 이들의 부부 사이에는 낡은 축대처럼 금이 간 지 오래지만 쉽게 무너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풍자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 외도가 결혼생활의 비타민’, 즉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심리치료 전문가 미라 커센봄은 사회가 간통에 대한 긍정적인 일면을 무시해왔다는 내용을 담은 저서 선량한 사람이 외도할 때를 출간했습니다. 외도는 가끔 부정행위를 한 배우자가 결혼생활을 변화시킬 동력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최고의 방법이 될 수 있고 바람직한 외도는 결혼생활의 무력증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는 게 저서의 요지라고 합니다. (공광규,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 658쪽 참조)

이재무의 부부는 등 돌린 섹스리스 부부가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비결로 서로 바람 피운 날을 몰래 기억한다는 데서 기인함을 무릇 풍자한다. 시로 고발한다. 그럼에도 시의 마지막 행인 새근새근 사이좋게 들숨날숨 서로 들이마시며/금슬 좋은 부부 긴 잠을 잔다에 독자로서 닿으면, 불안했던 마음은 아무렇지도 않게, 평정심을 금세 회복하게 된다. 이 지점이 시의 힘이고 치유이자 아름다움일 테다.

앞의 그림, <수향산방 전경>(1944)은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 1904~1967)이 해방 전에 그린 것이다. 그림 속 마당에 키 큰 남자는 수화 김환기 화가이고, 의자에 앉은 이는 아내 김향안이다. 처마와 감나무 사이, 조붓한 마당에 괴석과 등이 보이는 일본식 집은 오늘날 환기미술관이 되어 서울 종로구 부암동 산꼭대기에 둥지를 여전히 트고 있다. 지난 초여름, 친구와 함께 난 그곳을 찾았다. 하지만 그림과는 사뭇 다른 건물 배치로 조금 당황한 바 있었다.

북한산 한옥마을. 그곳에 채효당이란 조붓한 마당을 가진 예쁜 한옥이 있다. 한옥의 주인은 최효찬·이채영 부부인데, 각자의 이름에서 한 자씩 고루 취해 채효당(彩孝堂)’이라고 집 이름을 지었다. 이들보다 70여 년을 앞서 부부가 집을 구하면서 당호(堂號)수향산방(樹鄕山房)으로 명명했다. 남편의 아호 수화에서 ()‘ 자를, 아내의 이름 김향안의 가운데 자 ()‘를 따서 합친 것이다.

청나라 강희제 때 시인 납란성덕(納蘭性德, 1655~1685)은 이룰 수 없는 첫사랑과의 실연 때문에 사()화당춘(畵堂春)이란 노래를 남긴 바 있다. 화당이란 무엇인가. ‘그림 같이 아름다운 집을 의미함이다. 따라서 화당춘을 해석하자면 그림 같이 아름다운 신혼집에 봄은 왔건만이라고 해석을 달 수 있다. 다음은 그 부분이다.

畵堂春/納蘭性德

一生一代一雙人 일생일대일쌍인

爭敎兩處銷魂 쟁교양처소혼

相思相望不相親 상사상망불상친

天爲誰春 천위수춘

한 평생 한 세대 한 쌍이 된 부부

서로 떨어져 살 밖에 없다니 영혼인들 멀쩡하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보고파도 서로는 가까이 할 수 없다니

하늘은 누구를 위해 봄을 주었나

아무튼 처음 결혼은 각자 실패했으나, 재혼으로 새로이 출발하는 김환기·김향안 부부의 신혼집 수향산방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차원에서 화가 김용준은 붓을 들었을 테다. 한 폭의 추억이 담긴 마당 조붓한 집에 처마와 감나무, 괴석과 등을 선묘(線描)하고 채색했을 테다. 아름다운 그림이다. 등 돌려 자려는 부부 안방 침실에다 복사본 걸어두고 싶은 마음 간절한 오늘은, 이천이십일년 십일월 십일일이다ylmfa97@naver.com

참고문헌

이재무, 누군가 나를 울고 있다면, 화남출판사, 2007. 공광규,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 시인동네, 2009. 15, 657~658쪽 참조.윤범모, 시인과 화가, 다할미디어, 2021, 149쪽 참조.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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