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13)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김춘수 시의 화자는 한 마리 작은 울새가 되어 버드나무 가지에 앉아 있다. 그렇기에 이름 모를 누가 죽어가나 보다.”와 같이 의 주검을 외면하지 않는다. 응시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가을 저녁의 시/김춘수

누가 죽어 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어),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테이트 브리튼
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어),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테이트 브리튼

시인에게 시를 쓰는 일이란 곧 삶의 어느 지점에서나 가능한 시작(始作)’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일이다.” (양경언, 안녕을 묻는 방식, 88쪽 참조)

가을 저녁의 시, 그림 속으로

시월의 마지막 날은 일요일이었다. 한때 내가 사모했던 시인 김춘수(金春洙, 1922~2004)의 시편을 좇다가 가을 저녁의 시를 또 우연히도 마주쳤다. 가만가만 낭독했다. 순식간에 비동의(飛動意)가 일어섰다. 흉중으로 차며 들어섰다. 이렇듯 나는 듯이 용솟음치는 생각(飛動意)은 어느새 유명해서 익숙한, 한 명화 속으로 나를 이끌었다. 영국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가 그렸다고 전하는 <오필리어>가 바로 그것이다.

그림 읽어주는 여자로 유명한 나카노 교코(中野京子)가 펴낸욕망의 명화(북라이프, 2020)에도 명화 <오필리어>가 화려하게 등장한다. 이 그림은 사실 문학에서 취한 것이다. 셰익스피어 작품이다. 세계적으로 너무나 유명한 <햄릿>의 사랑 이야기가 화면에 잔뜩 활용되고 있다. 화가의 세련된 붓질로 고스란히 녹아났기 때문이다. ‘악의를 모르는 무구(無垢)한 처녀의 이름은 오필리어라고 한다. 오필리어의 애인은 햄릿’(Hamlet)인데……. 실존인물 덴마크 왕자 암레트(Amleth)의 마지막 글자 h를 앞으로 옮겨 햄릿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나카노 교코는 책에 설명했다.

어쨌든 소설이자 연극인 햄릿의 간추린 내용은 말하자면, 대략 이렇다. 다음이 그것이다.

부왕이 병으로 죽고 난 후, 햄릿의 어머니는 곧 재혼했다. 상대는 아버지의 동생 클로디어스(Claudius)였고, 그가 곧바로 왕위에 오르자 햄릿의 마음에는 무거운 응어리가 남는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망령이 나타나 자신이 현왕(現王)에게 독살되었다.”라고 말하고 사라진다. 햄릿은 증거를 찾는 과정에서 실수로 재상을 찔러 죽이고, 설상가상으로 재상의 딸이자 자신의 약혼녀이기도 한 오필리어, 현왕의 부인이자 자신의 어머니인 거트루트(Gertrude)까지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중략)

오필리어는 그렇게도 다정했던 햄릿이 왜 갑자기 변했는지, 왜 증오의 말을 자신에게 쏟아붓는지 그 이유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예전처럼 그에게 말을 걸어 봐도 돌아오는 것은 독살스러운 대구뿐이다. “어설픈 미모가 정숙한 여자를 손쉽게 간통에 빠뜨리지.”, “왜 남자에게 끌려가 죄 많은 인간을 낳고 싶어 하나?”, “수녀원으로 가, 수녀원에.” (중략)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화환을 만들어 버드나무 가지에 걸려고 하던 차에 가지가 부러져 화환이 강물 속에 잠기고 그녀 역시 그대로 물에 빠져 죽고 만다.

(중략)

물속으로 잠기기 직전, 넋이 나간 듯 천진하게 노래를 부르며 물위에 뜬 채 떠내려가는 그녀의 공허한 표정, 부풀어 오른 치마, 꽃처럼 물 위에 펼쳐진 손바닥, 그걸 지켜보는 울새. 무엇보다 오필리어의 운명을 암시하는 꽃과 식물만 골라 그녀 주위에 공들여 그려 넣은 데서 밀레이의 완벽주의 성향을 엿볼 수 있다. (같은 책, 31~35쪽 참조)

다시 밀레이의 그림으로 돌아가서 보자. 그러면 화면 왼쪽 상단, 버드나무 가지에 가슴이 빨간 새 한 마리가 보인다. 그게 울새란다. 울새는 숲을 헤매다 죽은 사람을 보게 되면, 나뭇잎과 꽃잎 등을 입에 물어다가 시체를 덮어 슬퍼하며 추모한다고 그런다.

그런 의미에서 김춘수 시의 화자는 한 마리 작은 울새가 되어 버드나무 가지에 앉아 있다. 그렇기에 이름 모를 누가 죽어가나 보다.”와 같이 의 주검을 외면하지 않는다. 응시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은 억울한 자만이 임종 전에 고집하는 시선이다. 하여 눈을 반만 뜬 채/이 저녁이 된 가을 강가에서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물 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자 입을 애써 조그맣게 벌린 것이다. 그렇다. 간과 심장이 찢어진다. 그런 마음뿐이니 가 터질 지경이다. 오직 애인(햄릿)만을 부른다. 찾는다, 죽는 순간에도. 그러니까 순결한 처녀 오필리어는 김춘수 시에 로 창졸간에 틈입한 셈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시인과 달리, 화가는 풀과 꽃, 나무 등을 구체화로 묘사했다. 장미는 사랑, 제비꽃은 순결함을, 꽃 데이지는 순수’, 버드나무는 버림받은 사랑’, 팬지는 보답받지 못한 사랑을 뜻한다. 꽃말이 그렇다. 달리 쐐기풀(후회, 고독)과 가시나무(고독), 양귀비(죽음), 물망초(나를 잊지 마세요)가 그림의 구석구석을 차지한다. 그걸 하나씩 찾아보는 재미가 크다. 쏠쏠하다.

김춘수의 시를 두고 문학평론가 장석주의 해설은 이랬다. 다음이 그것이다.

이 시는 풍경과 주체의 시선이 상호 침투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시인의 눈에 비친 가을 저녁 어스름이 끼는 풍경은 관능적인 육체에 달린 이다. ‘의 눈과 풍경의 눈이 마주 보고 있다. (중략) 가을 저녁 어스름이 깔린 풍경에 죽어가는 한 사람의 운명이 겹쳐진다. 시인은 저녁 어스름의 풍경이 아니라 운명화 풍경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시적 화자가 바라보고 있는 가을 저녁 어스름의 풍경은 흘러가는 것, 사라져가는 것의 운명을 안고 흘러가는 것, 사라져가는 것의 운명을 구현하고 있다. (장석주, 풍경, 210쪽 참조)

시와 그림을 한데 그러모으자니 이불해해지(以不解解之)’라는 말이 불쑥 생각났다. 말하자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써, 이해가 된다는 뜻인데 내 경우엔 존 밀레이의 그림으로 김춘수의 시가 어느 날 비로소 온전히 이해가 된 셈이다. 이렇듯 계속 사랑하면 문득 알게 된다.ylmfa97@naver.com

참고문헌

김춘수, 처용, 민음사, 1995. 장석주, 풍경, 인디북, 2005. 210쪽 참조.양경언, 안녕을 묻는 방식, 창비, 2019. 88쪽 참조나카노 교코, 최지영 옮김 욕망의 명화, 북라이프, 2020. 29~36쪽 참조.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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