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11)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낯선 그대는 네가 아니고 내가 스스로 만든 선입견이고 편견일 테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어쩌면 숲으로 산책을 떠나야 한다. 숲의 길 위에서 문득 마주쳐야 한다. 이제는 너를 외롭게 지나치지는 말아야 한다. 그렇다. 사람()은 무시로 숲에 가서 제가끔() ()는 처세를 깨우치고 배울 수 있다.

/정희성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빈센트 반 고흐, (나무와 수풀,)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반 고흐 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나무와 수풀,)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반 고흐 미술관

숲을 보는 방법으로 이 있는데, 관은 자세히 보는 것이고, 망은 멀리서 보는 것이다.” (강판권, 숲과 상상력, 243쪽 참조)

시와 그림을 보는 방법 관망

세로로 모아 보면 이란 한글이 멀리서도 보인다. 하지만 가로로 보자면 人 一 立이라는 한자가 제가끔 자세히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시인과 화가의 은 상상력과 이미지의 보고(寶庫)나 다름없다.

19세기 프랑스의 수도 파리. 교외에 한 작은 마을은 유명한 숲을 껴안고 있었다. 시인과 인상주의 화가들이 서로 이웃이 되어 제가끔 모여 살았다. 그 마을 이름이 바르비종이다. 숲의 이름은 퐁텐블로라고 전한다. 마을과 숲은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1886. 우리가 사랑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도 그곳 파리 작은 마을에 둥지를 튼다. 이윽고 1887. 고흐는 자주 산책하던 퐁텐블로숲을 소재로 풍경화 <나무와 수풀>을 드디어 완성한다.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이 부분을 반복하며 자세히 읽다가 고흐의 그림이 떠올랐다. 숲에서는 서로 다른 나무들이 고유의 개성을 잃지 않고도 제가끔 서 있는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이른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계를 연출한다.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5~7행의 시에서 정희성(鄭喜成, 1945~ ) 시인은 불쑥 질문한다.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다가 숱한 사람들이서로 붙어 다니되 화합하지 못하는 동이불화(同而不和)의 사회를 전망한다. 이를 몹시 안타까워한다. 그러면서 한 방 결정타를 때린다.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낯선 그대와 만날 때/그대와 나는 왜/숲이 아닌가하는 울부짖음에 미침이 그것이다. 여기서 이 메마른 땅이 상징하는 것은 정치와 경제, 사회 풍속도를 은유한다. 그러니까 당시 박정의 유신 독재로 거슬러 올라가야 불화(不和)’의 지점을 마주할 수 있다.

숲을 그림으로 그린 화가도 그렇고, 숲을 시로 적은 시인도 나는 공자가 일찍이 말한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는 세계를 보여준다고 확신한다. 다시 말해, “낯선 그대인 타인과 생각은 같진 않지만 그들과 화합할 수 있는 군자가 있고, 겉으로는 같은 생각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나 실은 끝내 화합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소인이 우리 주변에 잡목과 수풀처럼 널려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간은 숲이 보여주는 자연처럼 아름다운 관계가 아니라는 것. 이 점이 중요하다. 정희성의 시에 끌리는 까닭을 자꾸 만들어서다.

자연의 숲을 보듯, 우리는 시와 그림을 마주해야 한다. 그 방법으로 자세히 보는 ()’이 있고, 한 발 물러나서 멀리서 바라보는 ()’이 독자와 관람자에겐 필요하다. 서양 미술사학자 헤일리 에드워즈 뒤자르댕은 신간 인상주의(미술문화, 2021)에서 반 고흐의 <나무와 수풀>에 대한 상세한 도슨트를 제공한다. 다음이 그것이다.

새로운 기업이 반 고흐에게 미친 영향은 바르비종 화파에 속하는 화가들이 즐겨 선택한 수풀 소재를 묘사한 이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중략) 반 고흐는 선배 화가들의 유산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 또한 푸른 수풀에 몰두했다. 점묘법은 완벽한 수단이었는데, 이 기법을 통해 나뭇가지 사이와 땅 위로 비치는 미미한 햇빛을 인도하는 흰색 붓 터지, 그리고 살아 숨 쉬는 듯한 작은 점으로 전체 구도를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음영은 깊이감을 형성하여 무성한 풀숲의 입체감 아래로 땅의 굴곡진 모습을 짐작해보게 한다. 초록에 잠식된 작품의 밋밋함을 걱정할 수 있지만, 반 고흐는 햇빛이 드는 틈새를 노란 빛의 공간으로 나타내 이 걱정을 불식시킨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가늘고 구불구불한 선을 사용해 나무를 묘사했지만, 전혀 불안감을 조장하지 않는다. 빛의 유희와 활기찬 녹색은 우리를 평정과 명상으로 이끈다. (같은 책, 84쪽 참조)

내가 정희성의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전혀 불안감을 조장하지 않는 시적 완성도를 보여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희성의이 보여주는 시세계는 반 고흐의 <나무와 수풀>에 드러나는 작품세계와 닮았다. 서로 어우러지면서 겹친다. 그 어우러짐은 ()’에서 빛난다. 결코 ()’에서 주춤거리거나 머물러만 있지는 않다.

제 가끔 서 있는 나무가 이룬 숲의 무성함과 아름다운 조화로움을 인간관계에서 그대와 나는 왜/숲이 아닌가를 놓고 질문하는 시간은 그래서 소중하다. 반성과 성찰의 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낯선 그대는 네가 아니고 내가 스스로 만든 선입견이고 편견일 테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어쩌면 숲으로 산책을 떠나야 한다. 숲의 길 위에서 문득 마주쳐야 한다. 이제는 너를 외롭게 지나치지는 말아야 한다. 그렇다. 사람()은 무시로 숲에 가서 제가끔() ()는 처세를 깨우치고 배울 수 있다. 참고문헌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비, 1978. 강판권, 숲과 상상력, 문학동네, 2018. 243쪽 참조헤일리 에드워즈 뒤자르댕, 서희정 옮김 인상주의, 미술문화, 2021. 84~85쪽 참조ylmfa97@naver.com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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