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10)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르누와르의 명화 <산책> 복사본을 신혼집 거실 벽에 걸어두고,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조심조심 서로를 배려하고 위한다면 행복한 결혼생활은 미래에도 유지되고 보장될 터. 결혼을 앞둔 청춘남녀들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축하의 덕담이다.

바닷가 마을/곽재구

바닷가 마을로 들어가는 샛길

낮달이 도라지 꽃밭을 바라보고 있네

몸빼 바지 입고 경운기 모는

젊은 아낙의 고향은 베트남 어디

머릿수건 풀어 이마의 땀 훔치며

아따 꽃 징하게 이쁘오! 라고 남녘말로 말하네

고향에도 이 꽃이 피오? 물으니

붉은 얼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젓네

하늘에 하얀 달

땅위에 꽃

보라색과 하얀색의 파도소리 사이로 난 붉은 길을

키 작은 안남 여자가 경운기를 몰고 가네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와르, (산책),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미국, 워싱턴 필립스 컬렉션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와르, (산책),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미국, 워싱턴 필립스 컬렉션

863번 지방도로는 여수 화양반도의 작은 바닷가 마을들을 스쳐 지나간다. 계당 선학 농주 와온 달천 반월 봉전……. 바닷가 마을의 새벽 불빛을 보고 있으면 마음 안에 도라지꽃이 핀다. (중략) 반월마을은 반달처럼 생겼다. 마을이 파도 위에 떠 있는 쪽배처럼 느껴진다. 그 여름 마을 입구 산밭에 핀 도라지꽃을 허리 꺾고 보고 있을 때 머리에 땀수건을 질끈 묶은 아낙이 내게 물었다. 꽃이 이쁘오? 이 아낙 경운기를 몰고 있다. 얼굴이 황토 흙처럼 붉었다. 어디서 왔소? 내가 물었다. 베트남. 만 리 고향을 떠나 이국의 바닷가 마을에 정처를 튼 아낙의 삶이 웃는 얼굴 속에 들어있었다. 이쁘오. 내가 대답했을 때 도라지꽃을 말하는 걸로 알았을 것이다. (곽재구,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283~287쪽 참조)

신혼집에 어울리는 그림과 꽃말

이 눈부신 가을, 친구에게 내 아들이 결혼한다는 청첩장을 카톡으로 받았다. 청첩장에 실린 신랑 신부 사진을 무연히 보았다. , 그림이다. 아름다웠다. 특히 단풍나무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한 장. 어느 공원의 숲속. 걷다 서로의 손을 잡고 마주보고 웃으며 산책하는 청춘남녀의 포즈는 압권이었다. 오랫동안 내가 안경을 벗은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기에 충분했다.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가 그린 명화, <산책>(1876)이 생각났다.

그림 속 장소는 밀레를 비롯한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모여들던 파리 근교의 풍텐블로숲이다. (중략)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표정이 세밀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남자는 벙실거리며 웃고 있고, 여자는 새초롬히 미소 짓는다는 인상은 충분히 받을 수 있다. 햇빛은 쏟아지고 산들산들 기분 좋게 바람도 부는, 사랑하기 딱 좋은 날씨다. 그런데 밀고 당기는 마음 설레는 좋은 분위기를 깨는 것이 하나 있다. 데이트를 위해 예쁘게 꾸미고 나왔을 아가씨의 흰 옷은 풀물이 든 듯 더러워 보이고, 남자의 밝은색 바지 역시 얼룩덜룩하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이유도, 얼룩덜룩한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그들이 햇살 밝은 날 수풀 속으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진숙, 위대한 고독의 순간들, 112쪽 참조)

앞에 곽재구(郭在九, 1954~ )의 시를 보자. 자세히 살피자면 화자인 남녀는 기실 청춘남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부남과 유부녀의 짧은 만남이 어색하지 않고 데이트처럼 보랏빛으로 설렌다. 남자는 벙실거리며 웃고 있고, 여자는 새초롬히 미소 짓는 듯 독자에게 여운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바닷가 마을로 들어가는 샛길/낮달이 도라지 꽃밭을 바라보고 있는 시점은 한여름일 테다. 터벅터벅 길을 걷다, 예쁜 보랏빛 도라지꽃에 취해 걸음을 멈춘 순간, 요란한 엔진소리와 함께 몸빼 바지 입고 경운기 모는/젊은 아낙이 불쑥 다가온다. 놀란 표정으로 아낙을 바라보는데, “머릿수건 풀어 이마의 땀 훔치는 얼굴로 낮선 아저씨를 향해 말을 건다. 전라도 사투리다. “아따 꽃 징하게 이쁘오!”

알고 보니 아낙의 고향은 베트남 어디라고 했다. 어색함을 피하고자 아저씨는 얼떨결에 말을 느릿느릿 내뱉는다. “고향에도 이 꽃이 피오?”가 그것이다. 베트남엔 도라지꽃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아낙은 붉은 얼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젓하늘에 하얀 달/땅위에 꽃/보라색과 하얀색의 파도소리 사이로 난 붉은 길을 뒤로 천천히 밀면서 경운기 소리 점점 들리지 않을 때까지 키 작은 안남 여자가 경운기를 몰고 가는 장면을 꽃 보듯이 한참 아저씨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을 테다. 그러면서 도라지꽃보다 당신이 더 징하게 이쁘오! 라고 바닷가 마을 모래사장에 적었을 테다. 다 뻔히 파도에 지워질 것을 알면서도.

도라지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란다. 다른 뜻의 꽃말도 있긴 하다. ‘상냥하고 따뜻함이 바로 그것이다. 여수에서 가까운 순천만국가정원에 따르면, ‘도라지꽃말엔 사람을 보는 안목이 필요한 당신입니다. 그것이 행복의 지름길입니다라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고도 한다. 여행 중에 상냥하고 따뜻함을 지닌 사람을 만나 말을 섞는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자칫 잘못된 만남은 성추행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이성한테 말 걸기는 매우 조심해야만 한다. 그래서 사람을 보는 안목이 우리 삶엔 필요하다.

르누와르의 명화 <산책> 복사본을 신혼집 거실 벽에 걸어두고,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조심조심 서로를 배려하고 위한다면 행복한 결혼생활은 미래에도 유지되고 보장될 터. 결혼을 앞둔 청춘남녀들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축하의 덕담이다. 또 나부터 먼저 상냥하고 따뜻함의 상대가 되는, 즉 도라지꽃이 되어야 할 테다. 아무튼 성난 나무처럼 자연발화를 하는 신혼이 되면 참 곤란하다. 이혼으로 끝장나기 때문이다.

혹서에 자신의 열기를 견디다 못해 옆의 가지와 부딪혀 불을 내는 나무가 있다고 한다. 자연발화라고는 하지만, 나무 스스로 불을 지르는 셈이다. 자신의 뜨거움을 몰아내려 오히려 뜨거움으로 뛰어들고마는 참혹한 형편이다. 그런데 이 운명이 나무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한정원, 시와 산책, 59쪽 참조ylmfa97@naver.com

참고문헌

곽재구,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곽재구의 신 포구기행, 해냄, 2018. 이진숙, 위대한 고독의 순간들, 돌베개, 2021. 112쪽 참조한정원, 시와 산책, 시간의흐름, 2017. 59쪽 참조.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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