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09)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우리는 늘 고민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것이 좀처럼 쉽지가 않아서다. 오히려 지레 겁먹는 편이다. 가족·친구·애인 등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긴 마찬가지다. 더러는 갈등도 하고 때로는 ‘너’와 싸우는 것이 낫다. 시인의 충고처럼, “너를 포기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소나무에 대한 예배/황지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 있는

建木; 소나무, 머리의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이인문, 송하담소도(松下談笑圖), 19세기, 종이에 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이인문, 송하담소도(松下談笑圖), 19세기, 종이에 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숫자 11의 생김새를 골똘히 보면, 나무 두 그루 모양이다. 잎을 다 떨구고 빈 가지만으로 서 있는 만추의 나무. 그 잎들은 바람을 타고 멀리 가기도 하겠지만, 대개는 나무 바로 밑 둥치로 떨어져 모인다. 그래서 나는 달력 위 11이라는 숫자의 발치에 둥근 그늘 같은 것을 그려 넣는 낙서를 하기도 한다. 숲에서 길을 잃기 좋은 때가 두 번 있는데, 폭설이 내린 다음 날과 11월의 아무 날이다. 각각 흰 눈과 검붉은 낙엽으로 바닥이 다 덮여서 길이라 부를 만한 것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한정원, 시와 산책, 39쪽 참조)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한가위 지났다. 비가 내리고 요즘은 가을바람이 분다. 그렇다. 어느새 10월이 왔다. 곧 있으면, 숲에서 길을 잃기에 딱 좋은, 그런 11월이 온다. 다음 달이 또 오면, 동네 뒷산 산책하다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오늘 나는 한 사람을애써 그리워할까. 잘 모르겠다.

하릴없다. 그런 날이 있다. 집에서 가까운 서랑저수지를 찾는다. 무념무상 산책한다. 흙길 보행으로 산책하다 어쩌다 소나무를 발견한다. 잘 기억해야 한다. 낙엽에도 폭설에도 소나무는 거기 그대로 항상 서 있기 때문이다. 나무 구분하기 어렵지 않다. 그렇기에 소나무 있는 자리를 잘 기억한다면 우리는 산책하다가 길을 잃지 않아도 될 것이다.

소나무의 줄임말은 , 뜻은 으뜸이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나무 중에서 소나무를 으뜸으로 여겼음을 말해준다. 한자는 송()이다. 송은 목()과 공()을 합한 형성문자로 중국 진()나라 때에 만들어졌다. (강판권, 역사로 문화로 읽는 나무사전, 36쪽 참조)

앞의 시는 황지우(황지우(黃芝雨, 1952~ )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1998)에 보인다. 소설가 이인성이 발문을 썼던 바다. 발문에 이런 글이 나왔다. 인상적이었다. 밑줄 쳤다. 다음이 그것이다.

좋은 시란 그렇듯 우리 마음에 맺혀 있는 어떤 매듭이 건드려지는 순간마다 다시 울려오는 법 (같은 책, 157쪽 참조)

! 맞는 말이다. 특히 이 부분.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겠다는 결연한 다짐은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가 처한 현실의 국면을 회피하지 않고 순식간에 뒤집는다. 기막힌 반전인 참이다.

우리는 종종, 시인들이 말하는 소나무를 통해서 뜻밖에도 마음에 맺힌 응어리, 즉 매듭이 느닷없이 풀리는 것을 살면서 경험한다. 예컨대 박노해 시인은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박노해, 굽이 돌아가는 길, 부분)라고 했고, 정호승 시인은 소나무처럼 늘 푸르게 가슴속에 한가지 그리움을 품어라/마음 한번 잘 먹으면 북두칠성도 굽어보신다”(정호승, 어느 소나무의 말씀부분)라고 독자 마음을 쓱, 건드린 바 있다.

그렇다. 우리는 늘 고민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것이 좀처럼 쉽지가 않아서다. 오히려 지레 겁먹는 편이다. 가족·친구·애인 등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긴 마찬가지다. 더러는 갈등도 하고 때로는 와 싸우는 것이 낫다. 시인의 충고처럼, “너를 포기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점진적으로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노력이 삶엔 꼭 필요하다. 삶이 어찌 온통 꽃밭이겠는가. 봄날이겠는가.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도 시나브로 너 때문에 나는 모욕을 당한다. 수치를 겪는다. 상처를 받는다. 그렇더라도 설령 내가 눈발 뒤집어쓴날을 구차하게 살게 되더라도, 소나무처럼 본래의 품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다. 나를 위한 내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것들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도록 만들었지만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친구로서 제 자세를 흐트리거나 망치도록 함부로 만드는 계기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때마다 내가 할 일은 단 하나, 그것뿐이다. 상처투성이 머리의 눈을 털며/잠시 진저리치는 시간을 그냥 남몰래 가져보는 것이다.

잦은 스트레스로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있긴 하다. 그런가 하면, 너무 치욕스러워서 한겨울 눈발을 뒤집어쓴 것처럼 황량한 사건을 만나기도 한다. 인생이란 시간이 다 그런 거다.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유일한 해법이 하나가 있긴 하다.

저수지. 혹은 강이나 바다가 앞으로 보이는 소나무 두 그루 이상, 요컨대 솔밭 아래에서 친구들과 어느 날엔가, 삼삼오오 불쑥 모이는 것이다. 음식과 술이 있는, 사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저 허허실실 하루쯤은 실컷 웃어보자().

옛 그림, <송하담소도(松下談笑圖)>를 보자. 그린 이가 누구인가. 그는 조선의 화가로 이인문(李寅文, 1745~1824)라고 하는데, 단원 김홍도와 동갑내기로 절친한 친구였다. 이인문이 그림을 그리고, 친구인 김홍도가 왕유의 당시종남별업을 빼곡하게 적었다.

깊은 산속 시원하게 흐르는 시냇가 옆 너른 바위에 앉은 두 인물은 지금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보시게, 단원! 시냇물도 머리 위에 소나무의 가지도 저렇게 휘어진 것처럼 그대로 받아들이시게라고 뒷모습의 단원을 향해 웃으며 이인문이 말하는 것처럼 얼핏 보인다ylmfa97@naver.com

참고문헌

황지우,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1998.  강판권, 역사로 문화로 읽는 나무사전, 글항아리, 2010. 36쪽 참조한정원, 시와 산책, 시간의흐름, 2017. 39쪽 참조.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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