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08)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시가 그림이 되기도 하고, 그림이 시가 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시와 그림은 독자에게 나무의 이름을 묻는 궁금한 일이 되기도 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강가 느티나무 아래에서 오랫동안 “먼 산”을 고요히 바라보고 싶다.

비와 혼자/김용택

강가 느티나무 아래 앉아

땅에 떨어진 죽은 나뭇가지를

툭툭 분질러 던지며 놀았다

소낙비가 쏟아졌다

커다란 가지 아래 서서

비를 피했다

양쪽 어깨가 젖어

몸의 자세를 이리저리 자꾸 바꾸었다

먼 산에도,

비가 그칠 때까지

비와 혼자였다

박수근, (강변>  ,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박수근, (강변>  ,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내가 냉면을 좋아한다고 그 궁한 생활 속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은 종로 4가에 있는 우래옥에 데리고 가서 냉면을 사주시고 하시면서 나는 시내 다니다 냉면이라고 써붙인 간판만 보아도 당신 생각이 난다하신다. 겉으로 보기에는 말씀이 없어 무뚝뚝해 보이나 집안에서는 얼마나 자상하시고 다정하신지 모른다. (김복순, 《박수근-아내의 일기》, 176쪽 참조)

그곳에 가고 싶다, 강가 느티나무

세월은 가고 오는 것/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박인환, 「목마와 숙녀」, 부분)

이 석 줄의 시를 가져다가 식당 출입구에다 쓰고 싶다. 이렇게 말이다. “손님은 가고 오는 것/한때는 코로나를 피하여 시들어 갔으나/이제 우리는 또 만나야 한다”라는 식으로 고쳐도 좋을 상호가 우리들 곁을 아직도 지키고 있다. 종로 4가 냉면집 우래옥 이야기다. 우래옥은 한자로 ‘又來屋’이라고 쓴다. 또(又) 손님은 가고 오는 것(來)이 실은 식당(屋)이라는 뜻을 소박하게 지니고 있음이다. 간판 이름부터 손님을 줄 서도록 도와준다.

서울 중구 창경궁로 62-29, 냉면집 우래옥(又來屋)   ​​​​​​​​​​​​​​  ​​​​​​​   
서울 중구 창경궁로 62-29, 냉면집 우래옥(又來屋)     ​​​​​​​   

앞에 「비와 혼자」라는 시는 김용택(金龍澤, 1948~ ) 시집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문학과지성사, 2021년)에 보인다.

강가 느티나무 아래 앉아

땅에 떨어진 죽은 나뭇가지를

툭툭 분질러 던지며 놀았다

여기까지 읽다가 화가 박수근(朴壽根, 1914~1965)의 그림 한 점이 오버랩으로 겹쳤다. 1964년 작, <강변>이 그것이다.

유년시절, 엄마가 저녁 때 밥 먹으라고 소리칠 때까지 강가에서 뛰어놀던 아이가 붙잡혀 집으로 가는 듯 화면의 오른 쪽 어린 꼬마의 손은 엄마 손을 어쩐지 떼쓰며 뿌리칠 것 같기만 하다. 그 옆엔 한 줄로 가로수가 하나, 둘, 셋, 넷. 중경을 차지한 바위들도 넷.

나목(裸木). 헐벗은 나무들 정체는 무언가. 아마도 “강가 느티나무”일 테다. 아이는 엄마가 장에서 올 때까지 늦가을, “땅에 떨어진 죽은 나뭇가지를/툭툭 분질러 던지며 놀”고 있었을 테다. 그 뒤로 이웃집 아주머니와 개가 따르고, 어린 남동생을 찾지 못한 윗집에 사는 큰 누나가 뒷모습으로 하염없이 강가를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이다. 그 풍경이 정겹다.

앞의 그림을 시인 김용택도 잘 알고 있다. 후배 시인 장석남의 「궁금한 일-박수근의 그림에서」를 짧지만 맑게 해설했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박수근의 그림은 사람들에게 친근함으로 쉽게 다가선다. 단순하고 평안하다. 박수근의 그림들은 생각해보면 참 슬프다. 그 슬픔, 애잔함, 애틋함. (김용택, 《시가 내게로 왔다 1》, 25쪽 참조)

경기도 양평 수수카페. 내가 계절마다 즐겨 찾아가는 곳이다. 카페 앞에 느티나무는 400년 이상 되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가까운 두물머리에도 오래 된 느티나무는 서 있다. 어쩌다 비가 오는 날엔 “커다란 가지 아래 서서/비를 피”하기 좋고, “양쪽 어깨가 젖어/몸의 자세를 이리저리 자꾸 바꾸”는 혼자 놀이도 얼마든 즐길 수 있다.

수원 장안문. 성(城)에 올라 길을 타고 화서문을 향해 산책하다가 딱 중간쯤. 길 옆에 보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두 그루. 쉴 만한 그늘을 봄·여름·가을이면 만든다. 그 아래엔 산책자가 쉴 수 있는 의자가 있다. 명당이다. 벤치에 앉아서 물끄러미 쳐다보는 가을 하늘은 참 예쁘다. 여름철 장맛비가 한차례 퍼붓고 쏟아진 후, 한 폭의 수묵화가 연출되는 곳이다. 경북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기둥. 그 아름다움 배흘림기둥을 바로 느티나무로 채웠다고 한다.

느티나무는 은행나무와 더불어 가장 장수하는 나무로 유명하다. 그런가 하면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제법 수령이 있어 보인다면 그곳은 마을의 입구이고, 쉼터로 공유지라는 그런 얘기가 성립된다.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는 박수근의 그림 특징을 이렇게 정리했다.

박수근 예술의 가장 큰 형식적 특징은 바위 질감을 느끼게 하는 두터운 마티에르 효과에 있고, 그의 그림이 날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도 여기에 있다.”  (유홍준, 《박수근-아내의 일기》, 218쪽 참조)

나무 박사 박상진 교수의 ‘느티나무’ 설명은 이렇다. 다음이 그것이다.

느티나무는 나무속이 황갈색이라서 한자로는 황괴(黃槐)라고 한다. 누렇다는 뜻의 황()과 회화나무를 나타내는 괴()가 합쳐진 말이다. (중략) 한글로는 느틔나모라고 썼다. 황색을 뜻하는 순 우리말 노랑은 눋()이 어원이라고 하며 괴()는 옥편에 보면 홰나무(회화나무)라 하였으니 황괴의 한글 이름은 ()홰나무가 된다. (박상진, 《우리 나무 이름 사전》, 89쪽 참조)

나는 김용택의 시에서 박수근의 그림 <강변>이 보였는데, 장석남 시인은 “인쇄한 박수근 화백 그림을 하나 사다가 걸어놓고”서 그림이 시가 되는「궁금한 일」을 쓴 바 있다. 그렇다. 시가 그림이 되기도 하고, 그림이 시가 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시와 그림은 독자에게 나무의 이름을 묻는 궁금한 일이 되기도 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강가 느티나무 아래에서 오랫동안 “먼 산”을 고요히 바라보고 싶다. “비가 그칠 때까지/비와 혼자”가 되는 시간을 가지고 그냥 하루는 놀고 싶어서다. 

 ylmfa97@naver.com

◆ 참고문헌

김용택,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문학과지성사, 2021. 김용택, 《시가 내게로 왔다 1》, 마음산택, 2001. 24~25쪽 참조. 김복순, 《박수근-아내의 일기》, 현실문화, 2011. 17쪽, 218쪽 참조.  박상진, 《우리 나무 이름 사전》, 글항아리, 2019. 89쪽 참조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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