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07)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이진명의 시는 샤갈의 그림이 되기도 하지만,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앤드루 와이어스(Andrew Newell Wyeth, 1917~2009)가 그린 <결혼>(1993년 作)처럼 시체 안치실에 누운 노부부의 죽음을 우리가 퍼뜩 연상케 안내를 하기도 한다.

눈물 머금은 신이 우리를 바라보신다/이진명

김노인은 64, 중풍으로 누워 수년째 산소호흡기로

연명한다

아내 박씨 62, 방 하나 얻어 수년째 남편 병수발한다

문밖에 배달 우유가 쌓인 걸 이상히 여긴 이웃이 방문

을 열어본다

아내 박씨는 밥숟가락을 입에 문 채 죽어 있고,

김노인은 눈물을 머금은 채 아내 쪽을 바라보고 있다

구급차가 와서 두 노인을 실어간다

음식물에 기도가 막혀 질식사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도

거동 못해 아내를 구하지 못한,

김노인은 병원으로 실려가는 도중 숨을 거둔다

 

아침신문이 턱하니 식탁에 뱉어버리고 싶은

지독한 죽음의 참상을 차렸다

나는 꼼짝없이 앉아 꾸역꾸역 그걸 씹어야 했다

씹다가 군소리도 싫어

썩어문드러질 숟가락 던지고 대단스러울 내일의

천국 내일의 어느날인가로 알아서 끌려갔다

알아서 끌려가

병자의 무거운 몸을 이리저리 들어 추슬러놓고

늦은 밥술을 떴다 밥술을 뜨다 기도가 막히고

밥숟가락이 입에 물린 채 죽어가는데

그런 나를 눈물 머금고 바라만 보는 그 누가

거동 못하는 누가

, 눈물 머금은 신()이 나를, 우리를 바라보신다

마르크 샤갈, ,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마르크 샤갈, ,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이번 시집을 엮으며 죽은 엄마와 외할머니를 많이도 불렀다. 얼굴도 생사도 모르는 이북의 이복 윤희 언니까지 불러댔다. 세상에는 이름 부를 이가 없어 몸 없는 그들을 불러댔다. 몸 없어 차가운 그들만이 따뜻하여서 그립고 그리웠던 것. 나는 어려운 시간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많이 성가셨을 텐데 다 나한테 왔다갔다. 고맙다.” (이진명, 세워진 사람, 141쪽 참조)

라일락, 행복한 당신을 위한 꽃말 裸日樂

시는 시인 이진명(李珍明, 1955~ ) 시집 세워진 사람(창비, 2008)에 보인다. 앞의 시인의 말은 진솔하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보았듯이 세상에는 이름 부를 이가 없어 몸 없는 그들이 만고불변 존재한다. 몸 없는 그(死者)는 육신만 사라진 것이다. 영혼까지 아예 감춘 것이 아니라고 를 기억하는 후손들은 확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상을 정성을 다해 차린다. 명절이 오면 너나없이 차례를 지내는 것이다.

김노인은 64, 중풍으로 누워 수년째 산소호흡기로

연명한다

아내 박씨 62, 방 하나 얻어 수년째 남편 병수발한다

문밖에 배달 우유가 쌓인 걸 이상히 여긴 이웃이 방문

을 열어본다

1연의 시는 그저 한 뉴스를 인용한 것이다. 즉 어느 신문에 실린 기사 내용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사가 시가 되니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신문처럼 버리지 못한다. 왜 그럴까? 내 이야기로 번지기 때문이다. 하여 시가 된 아침신문이 턱하니 식탁으로 어느 날인가, 찾아와 그냥 차려진다.

정끝별(시인·문학평론가)의 시 감상과 해설을 보자. 다음이 그것이다.

아침신문에서 읽은 지독한 죽음의 참상이다. 어디선가 일어나는 오늘 우리의 참상이자 내일 우리의 일상이다. 시간은 우리를 거동 못하는” “내일의 어느 날로 끌고 간다. 늙음보다 더한 질병은 없다지만, 이 늙음에 병과 가난과 고독이 더해졌을 때 죽음을 압도하는 참사는 다반사가 된다. 이때 죽음은 참상으로부터 해방이기에 죽음은 늙음보다 후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정끝별, 삶은 소금처럼 그대 앞에 하얗게 쌓인다, 128쪽 참조)

만약에 말이다. 이진명의 시를 읽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만끽했던 화가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이 영감을 얻어 캔버스에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린다고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이 되어 우리에게 명작으로 미술관에서 보여줄까?

필자는 <라일락 속의 연인들>(1930)과 비슷한 화풍으로 김노인과 아내 박씨의 죽음을 달콤하게 그렸으리라고 짐작하는 마음을 풀어놓고 싶다. “, 눈물 머금은 신()”의 모습으로 아내 박씨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있는 김노인의 자유로운 손놀림은 천국에선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라일락 꽃무더기에 나란히 행복하게 잠자리에 드는 예쁜 모습으로……

이진명의 시는 사랑꾼 화가 샤갈의 그림이 되기도 하지만,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앤드루 와이어스(Andrew Newell Wyeth, 1917~2009)가 그린 <결혼>(1993)처럼 시체 안치실에 누운 노부부의 죽음을 우리가 퍼뜩 연상케 안내를 하기도 한다.

이불이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은 걸로 봐서, 또 두 사람의 얼굴이 너무나 핏기가 없어 보여서, 혹시 자다가 죽어버린 모습은 아닐까 섬뜩했었다라고 이주은 미술평론가는 책에 소개하며 설명한 바 있다. 시에서 거동 못해 아내를 구하지 못한,/김노인은 병원으로 실려가는 도중 숨을 거둔다라고 했지만, 그림에서는 <결혼>과 같이 빈()의 장소에 도착해선 부부는 가능했으리라, 추측되어 여겨진다.

아무튼 나는 시를 읽으면서 어느 노부부의 죽음이 식탁이 차려진 거실을 중심으로 창밖에는 지금 라일락 꽃무더기가 한창 피어나는 것이 눈으로 가득 선하다. “늦은 밥술을 떴다 밥술을 뜨다 기도가 막히고/밥숟가락이 입에 물린 채 죽어가는데/그런 나를 눈물 머금고 바라만 보는 그 누가/거동 못하는 그가 내 앞에서 떠나지 않을 때, 그 시간은 비로소 당신을 선택한 것에 대해 행복을 안겨준다. 우리에게 선물한다.

마르크 샤갈, ,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마르크 샤갈, ,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추석 연휴가 또 왔다. 예년보다 올해엔 좀 빨라졌다. 시월이 아니기 때문이다. 9월로 달력에 빨갛게 물들었다. 화려했던 여름철, 배롱나무 목백일홍의 시듦을 본다. 그러면서 나는 지난 봄철부터 라일락을 한자로 적는 버릇에 행복하고 감사하다. 자꾸만 裸日樂이라고 고쳐 쓰려 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내 선택이다. 그러니까 결혼을 두고서 국에 로 읽고자 하는 현실이 이승에서 생존방식이라면 어느 60대 노부부처럼 합하는 영으로 희망하는 것은 저승에서 대처 방법이다.

라일락은 좋은 일에 집중하려는 마음가짐이 행복의 길로 들어가는 첫걸음임을 알고 있다. 이 작은 나무는 때로 척박한 토양 위나 오염이 심한 도시 한복판에 서 있기도 하지만, 매년 2주 동안 심장이 터지도록 활짝 꽃을 피운다. (리즈 마빈, 나무처럼 살아간다125쪽 참조)ylmfa97@naver.com

참고문헌

이진명, 세워진 사람, 창비, 2008. 정끝별, 삶은 소금처럼 그대 앞에 하얗게 쌓인다, 해냄, 2018. 125~128쪽 참조.손철주·이주은, , 그림이다, 이봄, 2011. 17쪽 참조리즈 마빈 외, 김현수 옮김 나무처럼 살아간다, 덴스토리, 2020. 125쪽 참조.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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