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 (06)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

세상을 상식에 갇혀 가로로만 읽지 말자. 그러면 내 인생은 온통 가시밭길(棘)이 된다. 하지만 상식을 파괴하는 발상으로 아래위로 보고자 한다면 가시밭길의 고행은 금세 대추나무(棗)로 변화되게 마련이다.

대추 한 알/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오지호, ,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오지호, ,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대추나무를 의미하는 한자 조(棗)는 가시 극(棘) 자를 아래위로 붙인 것입니다. 이는 이 나무에 가시가 많다는 의미입니다. 대추나무를 한자로 대조(大棗)라 합니다. 대조에서 대추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대추의 꽃은 달걀 모양을 닮은 잎과 잎 사이에서 노란색으로 핍니다. 타원형의 대추열매는 아주 많이 달립니다.” (강판권, 《나무열전》, 129쪽 참조)

한 알의 대추가 붉어지기까지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이곳에선 1년에 4차례, 춘하추동(春夏秋冬) 새 옷을 입듯 아름다운 글귀가 행인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도록 유혹한다. 때는 2009년, 가을이었다. 서대문에서 광화문으로 산책을 나섰다가 횡단보도 건너는 중에 하마터면 교통사고를 일으킬 뻔한 아름다운 글귀는 장석주(張錫周, 1955~ ) 시인의 시를 석 줄로 인용해 광화문글판이 되어 걸린 바 있다. 다음이 그 실체이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이 짜릿한 내용의 시는 1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독자들에게 열렬한 환영과 사랑을 받고 있다. 책 속 인터뷰에서 시인은,좋은 시에는 익숙함 속에서 익숙하지 않음을, 하찮은 것에서 하찮지 않음을 찾아내는 눈이 비범하고, 현존의 혼돈을 뚫고 그 눈길이 가닿은 지점에 어김없이 생의 기미들과 예감들이 우글거린다"(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 엮음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 33쪽 참조)고 말했던가.

1연의 시를 보자. 시에서, 나는 순수한 동심의 세계가 보였다. 그것도 소년이 아닌 소녀의 호기심에 찬 목소리가, 예컨대 화가 오지호(吳之湖, 1905~1982)가 그린 <남향집>에 소녀를 보라. 그림 속에 등장하는 빨강 원피스의 한 소녀가 고목의 대추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그림에는 대추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어느 가지엔가, 대추 한 알이 끈덕지게 매달린 것이 상상력으로 가닿는다. 그리하여 초겨울의 찬바람에 뺨이 지금은 빨갛게 터졌거나 혹 얼었을지도.

고목의 헐벗은 대추나무와 빨간 원피스의 소녀, 흰 삽살개(풍산개)가 무척이나 인상적인 이 그림에 노랗게 펼쳐지는 초가는 실은 관사(官舍)라고 한다. 화가가 개성에서 미술 교사(송도 고등보통학교)로 재직하던 시절에 살았던 살림집을 배경으로 그렸다는 풍문이 전해지고 있다(1939년). 실제로 모델이 된 그림 속 소녀는 화가의 둘째 딸이고 이름이 ‘금희’라고 한다.

이와 관련, 서울경제신문 조상인 기자가 쓴 《살아남은 그림들》(눌와, 2020년)엔 이런 글이 보인다. 다음이 그것이다.

그림 속 소녀는 화가의 둘째 딸 금희란다. 그 시절 오지호가 애정 쏟으며 키웠던 풍산개가 오른쪽 담 아래 졸고 있는 녀석이란다. 빛을 받아 빛나는 벽은 갓 지어낸 흰밥처럼 보기만 해도 푸근하다. 가마솥에 눌어붙은 누룽지 색 같은 흙담과 지붕이 그림에 정감을 더한다. (중략) 그림자의 청색과 담벼락의 노란색이 어울릴지 누가 알았겠나. 그 순박한 맛이 ‘이게 진정한 황토색이다’ 싶게 딱 맞아떨어졌다. (같은 책, 158쪽 참조)

그림처럼, 대추나무는 집 마당에서 감나무와 마찬가지로 주로 키웠다. 그러니까 제사상에 놓는 과실 4가지, 조율이시(棗栗梨柿) 중에서 배나무와 밤나무는 살림집 바깥, 즉 가까운 산기슭에서 자라게 자연으로 방치했다면, 대추나무와 감나무는 살림집 울타리를 함부로 넘지 않게 배려하며 심었던 것이다.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는 마을을 가리키는 입구나 공유지에서 랜드마크로 자라게 했다면, 배나무와 밤나무는 마을을 끼고 보호하는 야산에서 성장하도록 옛 사람들은 방관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대추나무 혹은 감나무는 예외로 집안 마당에서 가족들과 같이 성장하게 도왔던 것이 사실이다. 다 이유가 있다. 대추는 감처럼 때로는 식량이 되기도 했고 약으로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무에 열매가 많이 달리므로 자손이 계속 번성하길 바라는 부부의 합심(合心)이 이룬 결과이다. 또한 그 나무들을 살림집 뜰에다 정성껏 심고 가꾸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앞에 시와 그림으로 되돌아가 보자. 시는 한 알의 대추가 붉어지기까지의 길고 긴 역경을 논하고 있다.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를 보는 그 마음이 어린 아이 같은 동심에 가깝다고 한다면, “무서리 내리는 몇 밤”과 “땡볕 두어 달”, “초승달 몇 날”은 어른이 된다는 것을 상징하며 은유하고 있음이다. 그렇다. 인생엔 수많은 역경이 닥친다. 어떤 이는 ‘역경’을 뒤집어 자신의 ‘경력’으로 발전시키는 변화를 기꺼이 안아주고 수용하고자 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세상을 상식에 갇혀 가로로만 읽지 말자. 그러면 내 인생은 온통 가시밭길(棘)이 된다. 하지만 상식을 파괴하는 발상으로 아래위로 보고자 한다면 가시밭길의 고행은 금세 대추나무(棗)로 변화되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상식을 파괴해주는 시와 그림을 좀 더 가까이 곁에 두거나 와락 껴안고 푸르다가도 때가 되면 붉어지는 얼굴로 ‘나’는 살아낼 줄 알아야 한다.  ylmfa97@naver.com

◆ 참고문헌

장석주, 《붉디 붉은 호랑이》, 애지, 2005.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 엮음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 교보문고, 2020. 168~169쪽 참조.  조상인, 《살아남은 그림들》, 눌와, 2020. 154~165쪽 참조. 강판권, 《나무열전》, 글항아리, 2007. 129쪽 참조.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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