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오후 시愛뜰(04)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시의 화자처럼 나도 때마침 첫 키스를 여자와 처음 해본 나이. 그 시절에 처음 본 시구라서 그런지 지금도 시를 읽으면 마음만은 이십대 청춘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불쑥 흥(興)이 일어난다. “새빨간 감 바람소리”와 같이. 불현듯이 벌떡.

가난한 사랑 노래/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조영석, , 18세기, 견본담채, 간송미술관.
조영석, , 18세기, 견본담채, 간송미술관.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밭둑에 대추나무, 야산 자락에 밤나무, 마당가에 감나무, 숲속에 돌배나무를 반드시 심었다. 제사상의 맨 앞 과일 줄에 올라가는 조율이시(棗栗梨柿)로서 꼭 챙겨야 할 과일나무이기 때문이다.” (박상진, 《우리 나무의 세계 1》, 229쪽 참조)

감나무, 가난한 집 마당을 안아주다

옛 그림 <촌가여행(村家女行)>은 조선 18세기 뒷골목 서민의 가난한 일상을 담았다. 풍속화에 해당한다. 그린 이는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이고 바탕 재료가 비단이다. 채색 안료를 옅게 사용했다. 붓질했다. 이를 ‘견본담채(絹本淡彩)’라고 통칭한다.

다르게 그림을 부르기도 한다. <절구질하는 여인>이 그것이다. 이는 ‘시골집 여자가 집에서 하는 일’이란 뜻의 <촌가여행>과 맥락이 통한다.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아무튼 서울 한강을 건너서 간송미술관에 꼭 가지 않아도 된다. 저 그림을 감상할 곳이 있긴 하다. 진품이 아니다. 실은 복제품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수원. 남문에서 종로 방향. 그 뒷골목에 위치한 ‘열린문화공간 후소’에 가보자. 가면 <말징박기>와 <촌가여행>을 느긋하게 구경할 수 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주변 수원 화성과 팔달산을 코스로 산책할 수 있으니 좋다. 이 점이 요긴하다.

관아재가 누구런가. 조선을 대표하는 삼원삼재 화가 중의 일인이 아닌가. 18세기가 되면서 조선은 단원, 혜원, 오원 더불어 겸재, 현재, 관아재가 최고 화가로 대접받고 있었다. 이를 그림처럼 시를 잘 쓰는 신경림(申庚林, 1935~ ) 시인이 모를 리 없을 터.

각설하고.

다시 명시 「가난한 사랑 노래」를 보자. 시인은 제목에다 원래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라는 부제를 친절하게 달았다. 왜 그랬을까. 이 시는 원래 《가난한 사랑노래》(실천문학사, 1988년)에 보인다. 그때 필자는 스물다섯. 꽃 청춘이었다. 그로부터 나는 시와 수십 번은 족히 만났지 싶다. 이제는 그만 설레도 되는 나이가 되었건만……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이 부분을 다시 듣자면 떨림은 여전하다. 나도 시의 화자처럼 때마침 첫 키스를 여자와 처음 해본 나이. 그 시절에 처음 본 시구라서 그런가. 지금도 시를 읽으면 마음만은 이십대 청춘으로 회귀한다. 불쑥 흥()이 일어난다. “새빨간 감 바람소리와 같이. 불현듯이 벌떡.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어머님 보고 싶소에서 청춘의 목소리가 보인다. 남자다. 그는 몇 년 전, 작정하고 시골에서 갓 상경했을 테다. 서울의 달 아래, 즉 사회에서 같은 처지의 이성을 처음 만나 연애를 하는 사랑을 했을 테다. 그 청년이 시인의 가난한 이웃이었을 테다.

앞의 시구에 두 점을 치는 소리는 새벽 2시를 가리킨다. 당시엔 통금이 있었던 시절이다. 청년은 쥐뿔 가난했다. 애인과 결혼식을 올릴 수 없는 경제적인 사정이 분명 있었을 테다. 그런 처지에 닥친 이십 대 청년이 화자로서 보인다. 시는 마지막 이별통보를 남자가 여자에게 전하고 귀가하는 과정에서 시작한다. 그렇기에 연인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진 것이다. 한 청년이 들어서는 골목길에 말이다. 그가 자취하는 집, 마당에도 홍시 한 알 가지에 매단 감나무가 서 있었을까.

새빨간 감 바람소리 그려보는 곳은 청년의 고향, 시골집으로 생각된다. 시골집 마당엔 집 뒤 감나무가 한 두 그루 있었겠지, 더욱이 한겨울엔 감나무 꼭대기 우듬지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새빨간 감 바람소리가 요란했겠지. 한마디로 가난한 살림살이의 찌든 풍경. 그 시골집, 부엌을 끼고 서 있는 감나무 아래에서 종일 일하느라 분주한 어머니의 뒷모습이 <촌가여행>과 많이 흡사했지 싶다. 그렇다. 신경림의 시는 조영석의 그림과 잘 조화된다. 다른 감나무 소재의 그림을 하나 더, 여기에다 소개한다.

이대원, ,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이대원, ,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법대를 졸업하고 화가로 전업해 교수로 승승장구한 대한민국의 화가 이대원(李大源, 1921~2005)이 그린 <>(1963)이다. 어떤 느낌이 오는가. 한눈에 봐도 부자 냄새 폴폴 나는 그림이 아닌가. 기와를 인 돌담장이 고급지다. 새빨간 감이 가지마다 아주 풍성하다. 이 집에선 어쩐지 가난한 사랑 노래, 따위는 들리지 않을 성싶다.

어쨌건 한때 시인의 이웃집에 살던 한 청춘(?)은 지금쯤이면 내 나이와 또래로 엇비슷할 테다. 아니면 더 연상이 이미 되었을지도. 그가 청춘의 시절, 막노동의 가난함을 핑계로 끝내 헤어져야 했던 연인의 뜨거움, 숨결, 울음을 이번 추석에도 과연 추억을 할까.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라는 절창은 어느새 늙었다고 해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렇듯 노래가 되는 시가 될지도 새옹지마 세상사, 모를 일이다.

한마디로 감(?)잡기 어렵다ylmfa97@naver.com

참고문헌 

신경림, 신경림 시전집, 창비, 2004. 박상진, 우리 나무의 세계 1, 김영사, 2011. 229쪽 참조윤철규, 이것만 알면 옛 그림이 재밌다, 이다미디어, 2017. 200쪽 참조조상인, 살아남은 그림들, 눌와, 2020. 259쪽 참조.

 

심상훈

인문고전경영연구가. 한국MID문화예술원 인문교양학부 책임교수. 경제주간지 머니위크 객원논설위원 등. 지은 책으로 《공자와 잡스를 잇다》, 《이립 실천편》, 《책, 세상을 경영하다》등이 있다. 현재 고전경영연구공간 동아시아경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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