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vs 광양 위치 두고 이견‥바다 메워 제철소 건립

[스페셜경제=조경희 기자]<스페셜경제> 연간기획으로 기획한 ‘그때 그 시절 경제사’는 국내 기업들의 성장史(사)를 살펴보면서 어떠한 정권에서 어떠한 산업이 전략적으로 육성됐는지, 또 어떠한 정부 정책으로 인해 기업이 후퇴 일로를 겪었는지 살펴보는 코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공중분해 된 기업부터 얼떨결에 원하지 않는 사업을 떠안은 기업까지. 또 오일쇼크, IMF, 외환위기 등을 거치면서 어떠한 기업이 살아남고 스러졌는지 등.

특히 우리나라는 6.25 전쟁 후 대부분의 산업이 전쟁의 폐허에서 다시 시작됐고, 1980년대 이후에는 재계 30위권 순위에서 거의 대부분 변동이 없는 굳건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최근 기업 구조조정이 지속되면서 재계 순위가 바뀌고 있지만 최근의 업황 불황으로 인한 것 일뿐 기업 지배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페셜경제>에서는 각 정권 시절 있었던 ‘비사’들을 통해 국내 기업이 어떻게 성공했는지 뒷이야기를 살펴봤다. <편집자주>


포스코 광양제철소가 지난 9월 24일 개소 31주년을 맞았다. 현재 포스코 광양제철소는 조강연산 2300만t의 생산체제를 구축해 단일제철소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제철소로 성장하게 됐다.

바다를 메워 제철소를 건설, 세계를 놀라게 한 포스코 광양제철소는 초기 건립 당시 지금의 광양이 아닌 ‘아산’에 건립될 예정이었다. 아산과 광양 입지선정을 두고 포스코와 건설부가 무려 8년간 극심한 대립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반전’도 있었다.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이 포스코가 주장한 대로 ‘광양’을 최종 낙찰했는데, 이유인즉 건설부 공무원들이 ‘아산’에 땅을 사들인 반면 광양지역에는 포스코 직원들이 땅을 매입한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포스코와 건설부가 논쟁을 진행하는 동안 전두환 전 대통령은 안기부를 통해 해당지역의 토지매매 실태를 조사한 것이다.


광양제철소는 지난 1970년대 국가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증가하는 철강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포항에 이어 광양에 국내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제철소다. 지난 9월 24일에는 광양제철소가 개소한지 31주년이 되기도 했다.

광양제철소가 들어서기 전 이 지역은 어업과 김 양식을 주로 하던 조용한 바다였다. 하지만 포스코가 지난 1982년부터 15,074,448m²의 바다를 매립해 불과 10년 만에 여의도 5배 크기의 세계에서 가장 큰 제철소로 발돋움하게 됐다.

광양제철소가 들어선 광양만은 우리나라 최남단 중앙에 위치한 해양 경영의 요충지로 하동, 순천, 여수, 구례와 접한 광양만의 중심지이다. 본래 크고 작은 13개의 섬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중 11개의 섬이 폭파돼 공사에 사용됐다.


세계에서 가장 큰 제철소

포스코 광양제철소 제강부가 누적 조강생산량 1억톤을 달성한 시기는 1998년 3월 5일로 87년 이후 11년이 걸렸고, 꾸준한 증산실적을 쌓으며 2억톤을 달성한 시기는 2005년 4월 29일로 초기 1억톤 달성 기간보다 대폭 단축된 7년이 걸렸다.

광양제철소 제강부는 제강공장에서 연주공장으로 이어지는 전로→정련→연주를 1:1:1로 최적의 생산 프로세스를 구축함에 따라 양적 성장은 품질저하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인식을 송두리째 깨부수고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조강연산 2300만t의 생산체제를 구축해 단일제철소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제철소로 성장하게 됐다.
광양제철소는 지난 한 해 동안 생산한 2023만t의 조강량 중 약 760만t 가량을 자동차강판을 생산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전 세계 자동차 연간 생산량이 약 8700만대라고 볼 때 세계를 누비는 자동차 11대중 1대는 광양제철소의 철을 사용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동차강판 전문제철소’로 성장해 왔다.


부지선정 두고 ‘갈등’

하지만 처음부터 제2제철소 입지가 ‘광양’으로 선정된 것은 아니었다. 무려 포항제철(현 포스코) 시절 8년간이나 제2제철소 입지를 두고 정부와 갈등을 빚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70년대 초반부터 철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제2제철소 건설 필요성은 끊임없이 제기됐다.

1973년 미국 회사에 기술용역을 맡겨 입지선정에 필요한 예비조사를 벌이기 시작했는데 이 당시부터 아산과 광양지역이 경합을 벌이게 됐다.

조사 결과 광양은 지반이 약하고 기초 공사비가 많이 든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그러다 재정부담을 이유로 무산되다가 지난 1977년 민간주도의 제2제철소 건설계획이 제기되면서 다시 살아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건설 주도로 가로림만 검토

당시 가로림만(灣) 프로젝트는 오원철 전 청와대 제2경제수석이 주장해 자칫 광양제철소가 아닌 가로림제철소가 될 수도 있었다. 오 전 청와대 제2경제수석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國寶’(국보)라는 별칭을 붙여줄 정도로 탁월한 업무 수행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 전 경제수석은 최근 ‘더 코리아 스토리’를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업적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는데, 그는 당시에도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을 지휘한 바 있다.

오 전 수석은 이 저서를 통해 “1979년 당시 청와대가 검토한 바에 따르면 20만톤급 대형선박의 정박이 가능하고 주변 야산지대를 등에 업고 넓은 공업기지를 형성하기에 적합했다”고 밝혔다.

특히 가로림만은 오랜 조수만안의 차로 인해 수심이 깊고 방파제가 필요 없을 정도로 파도가 안정돼 있어 동양 최대의 항구를 건설하기에 충분했다는 것.

오 전 수석은 1977년 중부 공업기지 건설안에 대해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 회장을 동행한 채 헬기로 가로림만 일대를 시찰한 후 “건설부에 지시해서 우선산업도로 부터 건설토록 하라”라고 지시했다고 회고했다.

전 중앙일보 이장규 기자는 저서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에서 제2제철소에 대해 회고하고 있다. 이 저서에 따르면 지난 1978년 10월에는 박 대통령은 박태준 포철 사장을 청와대로 불러 충남 서산군 가로림만으로 헬기를 타고 날아갔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박태준 사장이 “제철소 입지는 심지어 풍향까지 따져야 한다”며 조사를 요구, 입지선정 조사에 돌입하게 됐다.

당시 입지선정 조사는 네덜란드 기술용역회사와 일본 해양 컨설턴트, 가와사키제철 등 3군데에 맡겨 진행됐고 가로림만이 유력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자리에서 박태준 포철 사장은 가로림만으로 건의를 했으나 건설부의 반대에 직면하게 됐다.

연약지반으로 평가를 받은 가로림만 대신 현대건설, 대림산업, 삼환기업, 동아건설 등 4개 국내 건설업체에 재조사를 의뢰한 결과 이번에는 ‘아산’이 유력한 것으로 나타났다.

청와대측은 가로림만을, 건설부측은 아산을 주장하고 뜻을 굽히지 않은 것이다. 결국 ‘아산’이 유력해지자 포항제철은 즉시 토질조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조사가 진행될수록 난관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땅을 파고 들어가 보면 모래지역일 것으로 예상되던 지역은 뻘이고 바위일 것으로 추정되던 지역은 부스러지기 쉬운 편마암으로 드러난 것. 그러다 10.26 사태가 터지면서 사업은 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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