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귀족의 사랑을 받아온 ‘왕가의 주얼리’ 까르띠에

이하림 / 기사승인 : 2014-11-20 09:3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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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부터 현재까지 전 세계 여성들의 로망
▲ 그레이스 켈리

[스페셜경제=이하림 기자]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봤을 명품(名品). 연간 5조원 규모로 추산되는 국내 명품 시장은 세계 5위권을 기록할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샤넬, 프라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이들 브랜드를 모르는 이들은 없다. 특히 샤넬은 국내에서 ‘샤테크(샤넬과 재테크를 합한 말)’란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정작 샤넬이 여성 해방의 아이콘이라거나 이브 생 로랑이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였다는 점. 심지어 대부분의 브랜드가 실제 디자이너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도 모른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왕족, 귀족이 소유했던 명품이 아닌 가난했던 코코 샤넬이 스스로 일군 브랜드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스페셜경제>에서는 연간 기획으로 유명 명품브랜드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독자들께 전해주고자 한다. <편집자주>


리차드 버튼이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프로포즈하며 선물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그레이스 켈리가 결혼식장에서 착용했던 주얼리는 어느 브랜드일까? 바로 160년이 넘는 세월동안 4대에 걸쳐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까르띠에다. 현재 세계에는 수많은 주얼리 브랜드들이 넘쳐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꼽히는 브랜드는 까르띠에가 아닐까 싶다. 여자라면 누구나 빨간색 상자(까르띠에의 주얼리 상자)안에 담겨있는 프러포즈링을 받는 장면을 상상해봤을 것이다. 지구상 모든 여자의 로망이 된 까르띠에는 그만한 가치를 지녔다. 1800년대부터 현대까지 까르띠에는 왕가의 사랑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까르띠에는 ‘왕가의 주얼리’로 불린다.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의 프러포즈링
비행사를 위해 제작한 최초의 남성 손목시계
▲ 러브 링(제공=까르띠에 홈페이지)
까르띠에가 전통이 깊은 주얼리이기는 하나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여배우이자 모나코의 여왕인 그레이스 켈리 덕분이다.
1955년 그레이스 켈리가 칸 영화제 참석차 프랑스에 방문했고, 모나코 공국의 왕자인 레니에 3세는 아름다운 그녀에게 한 눈에 반했다. 다음해에 레니에 3세는 그레이스 켈리에게 10.47캐럭의 에메랄드 커트 다이아몬드로 만든 까르띠에 링을 선물했고, 그레이스 켈리는 그녀의 마지막 영화인 ‘상류사회’에 이 반지를 끼고 출연하는 것으로 전 세계에 약혼을 공표했다. 이후 1956년 거행된 결혼식에서도 티아라와 목걸이 등 까르띠에 주얼리를 착용해 더욱 주목을 받았다.
여배우에서 한 나라의 여왕이 되는 현대판 ‘신데렐라’ 같은 이야기. 그 가운데 까르띠에가 있는 것이다.
▲ 팬더 드 까르띠에(제공=까르띠에 홈페이지)
귀족문화와 함께 성장한 까르띠에
까르띠에의 역사는 1847년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가 견습생으로 일하던 파리 몽토르괴이 29번지의 보석가게를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으면서 시작됐다.
이후 10여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폴레옹 3세가 권력을 잡자 프랑스는 혁명기에서 안정기를 맞이한다. 이시기부터 파티와 무도회가 매일 밤 열렸고 귀족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보석수요가 증가했고 까르띠에도 이 덕을 톡톡히 봤다. 파리시 네브데 프티샹 5번가에 있던 그의 매장은 쇄도하는 왕족과 귀족의 주문이 끊이질 않았다.
까르띠에는 뛰어난 세공 기술과 디자인 감각을 보유한 까르띠에는 왕실에까지 인연을 맺게 된다.
특히 나폴레옹 3세의 사촌이던 마틸드 공주의 후원으로 그는 당시 프랑스 상류층들이 밀집해 살았던 보르바드 데 이탈리아 9번가로 매장을 옮겼고, 프랑스 왕실에 제품을 납품했다. 그의 아들 루이 프랑수아 알프레드가 사업에 동참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 귀족들과 부유층을 주 고객으로 삼게 됐다.
당대의 패션과 주얼리의 관계를 이해한 까르띠에는 1899년 패션의 거리였던 ‘뤼 드 라 뻬 13번지’에 까르띠에라는 이름으로 상점을 열었다. 이후 까르띠에 아들 알프레드의 세 자녀인 루이 조세프, 피에르 카미으, 자끄 테오뒬이 해외로 사업을 확장해 나가며 놀라운 성장을 이뤄냈다.
그 중 천부적인 감각을 지닌 장남 루이 까르띠에는 지금의 까르띠에를 만든 결정적인 인물으로 꼽힌다. 루이 까르띠에는 플래티나 마운트를 제작하여 결혼반지에 최초로 ‘플래티나(백금)’를 도입했다. 이는 강도가 높고 밝았지만 세공하기 까다로운 재료였기 때문에 보석세공의 놀라운 발전을 가져왔다. 이후 ‘인비저블 세팅’ 등을 활용해 보다 섬세한 디자인으로 발전한 것으로 전해진다.
▲ 트리니티 드 까르띠에(제공=까르띠에 홈페이지)
“보석상의 왕이요, 왕의 보석상이다”
까르띠에는 1900년대 초부터 아르테코 스타일의 장신구도 제작했다. 1902년 국제적인 브랜드로 성장한 까르띠에는 ‘영국 왕실 보석상’으로 임명받고 왕세자가 에드워드 7세로 즉위하는 대관식에서 27개의 티아라를 제작하는 등 왕가의 주얼리제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웨일스의 왕자는 까르띠에를 ‘보석상의 왕이요, 왕의 보석상이다“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1904년 루이 까르띠에는 까르띠에에서 최초로 남성 손목시계를 제작했다. 주머니에 넣는 시계가 보기 불편했던 비행사 산토스 뒤몽을 위해 사각프레임의 손목시계를 만들어 준 것이다. 이는 현재에도 큰 사랑을 받고있는 ‘산토스’ 모델의 탄생배경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후 시계제조 장인인 에드몽 예거와 계약하며 손목시계 버클의 특허권을 얻었고, 10년 뒤 영국의 전투탱크에서 영감을 받은 캥크 시계를 디자인했다.
이국적인 디자인에 관심을 가졌던 까르띠에는 동방에 대한 이미지를 모티브로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으며 1913년에는 뉴욕지점에서 세계 여러나라의 문화를 반영한 작품들을 전시했다. 1924년에는 친구인 장 콕토를 위해 트리니티 링이 제작되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뛰어난 디자인으로 칭송받고 있다. 트리니티 링은 화이트콜드, 옐로골드, 핑크골드 등으로 제작되었고 사랑과 우정, 충성을 상징한다. 놀라운 성장을 이룬 까르띠에는 1964년까지 까르띠에 가문이 운영하다 1998년 리치몬드 그룹에 인수됐다.
▲ 발롱 블루 드 까르띠에(제공=까르띠에 홈페이지)
왕족이 사랑한 주얼리
까르띠에는 왕의 주얼리라고 불릴 정도로 전세계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를 증명하듯이 1904년~1949년까지 까르띠에는 가장 위대한 왕실의 공식 주얼리로 임명한다는 내용의 15개 국왕 척허장을 받았다.
왕실들은 특히 까르띠에에 그들만을 위한 티아라 제작을 맡겼다.
1909년 까르띠에는 러시아 블라디미르 대공비 마리아 파블로므나의 주문으로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가 장식된 티아라를 만들었다. 또한 1901년 벨기에의 엘리자베스 여왕을 위해 랭소 모티프 티아라를 제작했고 여왕이 이를 1912년에 구입하기도 했다.
1920년에는 스페인의 빅토리아 유지니 여왕도 티아라를 구입했고, 1926년 카푸르탈라 마하자라 자카치트 싱은 117.40캐럭의 진귀한 에메랄드 1개를 포함 총 19개의 에메랄드를 세팅하여 머리장식을 만들어 줄 것을 의뢰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2011년 런던에서 열린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 즉, 미래의 캠브리지 공작 부인의 결혼식에서 신부는 1936년 까르띠에가 제작한 티아라를 착용하기도 했다. 훗날 엘리자베스 여왕이 될 요크 공작부인을 위해 제작된 이 티아라는 1955년 마가레트 공주도 사용한 적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현재까지도 많은 왕가와 스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까르띠에. 이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기에 오늘날에도 여성의 로망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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