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코오롱 창업주의 숨겨진 자식”

▲ 코오롱타워(네이버 거리뷰)


[스페셜경제=김영일 기자]‘재벌’. 재벌이라 함은 재계(財界)에서, 여러 개의 기업을 거느리며 막강한 재력과 거대한 자본을 가지고 있는 자본가ㆍ기업가의 무리를 말한다.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이 지금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주요 원동력에 재벌들의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또한 몇몇 재벌기업의 수장들은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세계시장에서도 통하는 글로벌 기업으로까지 성장시켰다.


이러한 재벌기업에 대해 국민들은 칭찬과 박수를 보내야 마땅하지만 재벌기업과 오너일가에 국민들의 시선은 썩 좋지만은 않다. 또한 재벌의 오너일가에 대한 숨겨진 비화에 국민들은 상당히 궁금해 한다. 그 중 오너일가의 알려지지 않은 혼외자식이 느닷없이 튀어나와 상속권을 주장한다면 이는 재계의 궁금증을 더욱더 자극하는 일이 된다. 이러한 일은 실제로 발생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재벌기업 코오롱가의 혼외자녀 이야기이다. 이에 <스페셜경제>가 코오롱가의 혼외자녀에 대해 되짚어봤다.


고아원 보내고 강제 입양까지?


코오롱그룹의 모태는 1954년 세워진 개명상사이다. 창업자 고(故) 이원만 회장은 1935년 일본에서 ‘아사히 공예사’라는 모자공장을 지어 사업에 성공한 뒤 1951년 일본 도쿄에 ‘삼경물산’을 세웠다. 그리고 삼경물산은 1953년 한국에 나일론을 독점 공급하기 시작했다. 국내에 나일론이 처음으로 들어온 것이 이때부터이다. 이후 1957년 4월 나일론 필라멘트의 선두주자인 한국나이롱(주)을 설립하였고 이는 (주)코오롱의 전신이다.


코오롱그룹 창업주 고(故) 이원만 회장의 알려진 자녀는 모두 9명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공식적인 자녀는 7명이다. 8번째 딸과 9번째 막내아들은 코오롱가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이원만 회장의 막내아들이 2004년 친자확인 및 상속권을 주장하며 미국 캘리포니아 지방법원에 상속재산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상속재산을 요구하는 막내아들의 소송‥
숨겨진 딸이라며 혼외자식 논란 재점화


2004년 11월 말 LA타임즈는 “코오롱그룹의 창업주 고(故) 이원만 회장의 혼외 아들 이동구(26·미국명 피터 로치)씨가 코오롱그룹과 5명의 배다른 형제를 상대로 500만달러(약50억원)의 상속재산을 요구하는 소송을 미국 캘리포니아 지방법원에 냈다”고 보도했다. 당시 LA타임즈는 이원만 회장이 1977년 서울의 한 요정에서 접대부로 일하던 이미연 씨를 처음 만났으며 이듬해 막내아들 이동구씨를 낳았다고 전했다.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원만 회장의 나이는 72세였고 접대부 이씨의 나이는 18세인 걸로 알려졌으며 이원만 회장은 이씨에게 생활비와 양육비, 거주할 곳을 마련해주었다. 그 후 이씨는 아들 동구씨가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원만 회장에게 보내게 되었다. 이때 동구씨의 나이 4살 때 였다. 동구씨는 어머니 이씨의 바램과는 다르게 이원만 회장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냈으며 계모의 구박을 받았다. 이후 1985년 이원만 회장이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동구씨는 고아원에 보내지게 되었다.


동구씨는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의 마틴 로치씨 부부에게 입양되었고 1994년 이원만 회장이 숨지자 코오롱 일가 측은 동구씨의 미국인 양부모에게 연락을 했다. 코오롱 일가 측은 양부모에게 양육비로 10만 달러를 주는 대신 상속과 관련해 어떠한 권리도 주장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긴 각서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16살이었던 동구씨는 이러한 사실을 나중에 야 알았다고 한다. 이후 동구씨는 이원만 회장의 가족들과의 만남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동구씨는 이 소송을 계기로 캐나다 벤쿠버에서 생모인 이씨와 다시 재회하게 되었다. 22년 만에 모자간의 상봉이었다.


동구씨는 당시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어머니가 있는 한국에 가고 싶었고 밤에는 무서워서 불을 켜놓고 잠을 잤다”며 “엄연한 가족인데도 해외에 강제입양 시켰고 그 과정에서 심각한 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동구씨의 어머니 이씨도 “동구는 이 회장의 마지막 자식이다”라며 “생각만 하면 그 집에 가서 불을 지르고 싶다”고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 당시 그룹 측은 “본건은 이미 오래전 돌아가신 분의 일이어서 주위에 아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현재 미국에서 소송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자칫 소송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답변해 줄 수 없는 것을 양해해 달라”고 전했다. 이 후의 소송결과와 상황은 어떻게 됐는지 알려진 바가 없어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일각에서는 동구씨와 코오롱 일가가 서로 원만하게 합의 한 것 아니냐는 추측을 하고 있는 정도다.


故 이원만 회장의 ‘내연의 처’ 등장


그러나 이원만 회장의 혼외자식 논란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동구씨의 소송이후 3년여의 시간이 흐른 2007년 인터넷 블로그에 이원만 회장의 숨겨진 딸이 있다는 사연이 올라와 코오롱가의 혼외자식 논란이 재점화 되었다. 사연의 주인공은 이원만 회장의 내연의 처라고 주장하는 지은주씨와 그의 딸 이정현씨 였다.


자신의 딸 정현씨가 이원만 회장의 8번째 딸이라고 주장한 은주씨는 블로그를 통해 “이 회장이 사망한 1994년,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이었던 딸을 불러들여 현금 1억원을 주고 서류에 도장을 찍게 했다. 당시엔 몰랐는데 그 서류는 일체의 유산에 대해 함구하겠다는 내용의 각서였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4년 2월 14일 이원만 회장이 서울대학병원에서 사망한 뒤 코오롱 측에서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이에 스웨덴에서 거주하고 있던 이원만 회장의 딸 정현씨는 한국으로 들어와 이 실장(코오롱그룹 집안을 맡아보는 사람)이라는 사람을 따라 법원 사무실로 갔다. 그곳에서 이 실장의 권유에 무심코 서류에 도장을 찍게 되었다는 것이다.


은주씨에 따르면 자신과 이원만 회장의 만남은 1969년 4월 자신의 친구와 함께 이원만 회장의 별장에 놀러가게 되었고 이후 이원만 회장의 비서라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의 사랑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원만 회장은 보문동에 집을 마련해 주었고 이태리 자동차 피아트를 사줬다고 한다. 당시 두 사람은 이원만 회장이 마련한 보문동 집에서 데이트를 했고 당시 비서들과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인사들이 사랑방처럼 드나들었다는 것이다.


이후 1970년 5월 제일병원에서 이원만 회장과 은주씨의 딸 정현씨가 태어났다. 당시 이원만 회장은 65세, 은주씨 나이 22세였고 이원만 회장이 일본 출장에서 돌아올때면 정현씨의 옷이나 장난감 등을 사다주며 정현씨를 무척이나 예뻐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은주씨는 자신의 존재로 인해 코오롱일가들이 고통 받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1974년 은주씨는 딸인 정현씨를 데리고 이 회장 곁을 떠나게 된다. 이후 이원만 회장측에서 연락이 왔지만 거절했고 정현씨가 16살이 되던 해인 1986년 스웨덴으로 이민을 떠나게 된다.


은주씨는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이제 와서 나의 허물을 밝히는 이유는 코오롱측으로부터 정중한 사과나 해명을 듣고 싶을 뿐이다. 나의 딸인 정현이가 이 회장의 혈육이라는 것만 밝혀준다면 모든 것을 용서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이에 대해 코오롱측 관계자는 “이미 돌아가신 창업주의 극히 개인적인 일이기 때문에 어떠한 답변도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벌 총수일가의 혼외 자녀설은 끊임없이 흘러 나왔다. 다만 코오롱그룹 창업주 고(故) 이원만 회장처럼 수면위로 등장한 사례들이 별로 없을 뿐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혼외자식 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를까 골머리를 앓고 있는 재벌들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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