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왕국’ 건설…가문에 비해 혼맥 ‘수수’


한국 경제의 대들보 역할을 담당하며 국내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진 대기업 집단 재벌가. 이들은 서로 혼맥과 인맥을 통해 더 높은 권력을 누리기도 하고 서로를 잡아주고 끌어당기는 역할을 하면서 거대한 울타리를 형성했다.
한국 경제사의 이면에 숨어있는 그들만의 혼맥을 통해 재벌의 형성과 교착의 끈이 한국 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 지를 <스페셜 경제>가 창간 5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의 대표적 재벌가의 혼맥과 경영 승계 과정을 살펴봤다. <편집자 주>


[스페셜경제=조경희 기자]범 현대가는 현대그룹과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등 그 외 한라건설, KCC 등 수많은 방계 그룹을 거느린 대한국민 굴지의 재벌가다. 현대가는 고 정주영 회장이 일군 ‘현대’를 넘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고 고 정주영 회장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던 ‘도전’을 여전히 진행하고 있는 기업이다.

고 정 회장은 “자동차는 달리는 국기다. 만약 내가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내 후대들에게 자동차 산업 발전을 위한 디딤돌을 놓을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현재의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은 자동차 산업 수출 1위, 무역흑자 1위 그룹으로 성장했다.

자동차 정비업에서부터 시작한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은 ‘포니’를 기점으로 국내 최초의 자동차를 성공시킨 데 이어 세계 5위의 자동차그룹으로 성장했다.


복흥상회에서 출발‥재계 거물 그룹으로 ‘우뚝’
“스스로의 한계에 도전”‥아산 유지 따라 성장


태풍 뚫고 1만2000km 항해


1976년 20세기 역사상 최대의 건설공사인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 이 공사는 전 세계의 대부분의 건설사들이 참여한 프로젝트로 현대건설은 마지막 입찰티켓을 극적으로 확보하면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면서 최종 낙찰된 바 있다.

당시 수주액은 우리나라 1년 예산의 절반에 이를 정도. 하지만 국내 기술력에 대해 사우디아라비아측이 믿지 못하자 공사기간을 오히려 8개월 단축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맞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 정 회장은 당시 외환 사정이 어려운 가운데 “외화를 벌어야 한다”며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강행했다. 당시 정 회장은 국내에서 자재를 가져다 써야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된다며 모든 자재를 배로 운반했다.

울산에서 사우디아라비아까지 1만2000km. 자재를 실은 배는 35일간의 대항해를 거쳤으며 이 과정에서 태풍에 바지선이 떠내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무려 19번을 왕복으로 항해했으며 결국 이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통해 현대건설을 넘어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최대의 외화를 획득하게 된 일화는 국내를 넘어 전 세계에 회자될 정도다.

고 정주영 회장의 이름 석자 만으로도 묵직한 감동이 오는 이유다.


모래사장 사진으로 선박 수주


고 정주영 창업주는 1915년 11월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태어났다. 가난을 피해 네 차례에 걸친 가출을 감행하다 복흥상회(쌀 소매업)에 배달꾼으로 취직한다. 이후 주인에게 인정받은 정 명예회장은 쌀가게를 넘겨받게 되는 데 이것이 범 현대가의 시초가 됐다.

세계가 정주영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72년 현대중공업 창업 당시다. 이 때 그 유명한 일화가 등장한다. 거북선이 그려진 지폐와 조선소를 지을 모래사장 사진 한 장으로 선박을 수주한 것이다.

특히 대형선박 건조 경험이 전혀 없던 상황에서 정주영은 현대중공업 공장 건설과 동시에 26만t급 대형 유조선 2척을 건조했다. 2년3개월 만에 조선소 건설과 배를 함께 건조하는, 세계 선박 건조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것이다.

현대가는 1983년엔 현대전자산업을 설립해 중공업·건설·자동·차전자를 주축으로 하는 중화학그룹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자유결혼 ‘중시’‥이혼 절대 불가


새벽 3시에 기상해 3시 30분이 되면 아들들을 대동하고 출근길에 나섰던 정 명예회장은 사업 면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이었지만 자식들의 혼사에 대해서는 ‘자유결혼’을 장려했다. 단 이혼은 절대 시키지 않는다는 방침을 고수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결혼 승낙 시 평생 이혼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다짐을 받았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 남자의 경우 어느 집안의 아들이라는 배경은 철저히 무시하고 얼마나 유능한 청년이냐는 장래성을 승낙의 잣대로 삼는다.

고 정 회장은 결혼 상대자를 집으로 데려오게 해 간단한 인사만 받고 허락했을 정도로 정략 결혼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 회장은 부인 변중석씨와의 사이에서 정몽필, 정몽구, 정몽근, 정경희, 정몽우, 정몽헌, 정몽준, 정몽윤, 정몽일 남매를 낳았다.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정몽필 사장은 현대양행 과장, 현대건설 상무, 현대상사 부사장 등을 거치며 착실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교통사고가 났던 당시, 정몽필 사장은 적자투성이 인천제철을 인수해 정상화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정몽필 사장은 부인 이양자씨와의 사이에 은희, 유희 등 2녀를 뒀다.

맏손녀 은희씨는 친구 소개로 만나 현대전자 평사원과 연애 끝에 지난 1995년 8월에 화촉을 밝혔다. 둘째 유희씨는 쌍용가와 사돈을 맺었는데 현대와 쌍용의 두 자녀가 모두 유치원, 초등학교 동창이다.

김석원 쌍용양회 회장의 아들인 김지용씨는 정 명예회장이 직접 배필로 골랐는데, 일찍이 귀여워했던 손녀딸의 혼사라서 유달리 애착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정몽구 회장은 첫째딸 정성이씨, 둘째딸 정명이씨, 셋째딸 정윤이씨와 외아들 정의선씨를 뒀다. 정성이씨는 선두훈 대전 선병원 이사장과 결혼했으며 정명이씨는 정태영 현대캐피탈‧카드 사장과 결혼했다.

정 회장은 정태영 사장으로 하여금 현대캐피탈그룹을 이끌게 하면서 최근 트렌드가 되고 있는 ‘사위경영’의 선두주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정윤이씨는 신성재씨와 현대정공 근무 시절 만나 결혼했다. 외아들 정의선씨는 정도원 삼표그룹 회장의 딸인 정지선씨와 결혼했다.

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은 우경숙씨와 결혼해 지선, 교선 등 2남을 뒀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은 황선덕 전 법무부 장관의 손녀인 황서림씨와 결혼했으며 정교선 현대홈쇼핑 사장은 허재철 대원강업 회장의 딸인 허승원씨와 백년 가약을 맺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하나뿐인 딸 정경희씨는 선진종합의 정희영 회장과 혼인했고, 정희영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현대건설 공채로 입사해 조선 수주 등에서 뛰어난 수완을 보이며 눈에 들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고 정몽우 전 현대알루미늄 회장은 숙명여대 출신인 이행자씨와 연애 결혼했다. 당시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정일선, 정문선, 정대선씨를 모두 현대차그룹 계열인 현대비앤지스틸에 입사시키며 유족을 보살폈다.

정몽우 회장의 장남인 일선씨는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현재 현대비앤지스틸의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고, 차남 문선씨도 같은 회사에 몸담고 있다. 막내 대선씨는 현대 비에스앤씨 대표이사로, 노현정 전 아나운서와의 결혼으로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자유연애를 중시한 현대家의 혼례다.

비운의 황태자로 불리는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5남이자 정 회장의 넷째 동생이다. 고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은 현영원 전 신한해운 회장의 딸인 현정은 현 현대그룹 회장과 결혼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현정은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이 중공업 행사에 참석한 현정은씨를 눈여겨보고 혼사를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의 사이에 지이, 영이, 영선 등 1남2녀를 뒀다.

故 정몽헌 회장은 2000년 그룹 단독회장에 올랐으나, 대북송금 사건에 연루돼 조사를 받던 중 2003년 8월 계동사옥에서 스스로 몸을 던진 비운을 겪었다.

정몽준 의원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은 김영명씨와 결혼해 기선, 남이, 선이, 예선 등 2남2녀를 뒀다. 정몽준 의원의 부인 김영명씨는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의 막내딸이다.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은 김진형 부국물산 회장의 딸 혜영씨와 결혼해 슬하에 정이, 경선 등 1남1녀를, 막내인 정몽일 현대기업금융 회장은 권준희씨와 사이에 현선, 문이 등 1남1녀를 뒀다.

결혼 만큼은 모두 수수하고 자유롭게 선택했던 국내 굴지의 기업 현대. 그래서인지 그 흔한 이혼도 찾아보기 힘들다. ‘배경’ 보다는 사람 됨됨이와 인성을 보고 결혼시켰던 현대가의 가풍이 녹아있는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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