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재갈물리기(?)…정정보도 사전 요청조차 없어

건보공단의 잇단 소송 제기, 그리고 패소에 국민 혈세만 낭비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스페셜경제=김영식 기자]“(소송에서) 질 줄 뻔히 알고도 국민 혈세만 낭비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하 건보공단)이 명예훼손 등을 이유로 앞서 제기한 소송에서 최근 잇달아 패배함에 따라 법조계 일각에서 나오고 있는 우려의 말이다.


단 한 마디 말로 압축·요약된 한 ‘공공기관’의 막강한 돈과 사회적 권력을 앞세운 잇단 소 제기에 최근 법조계는 물론, 의료계 등 사회 전반에서 강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공공기관이란 국가가 공공 목적 달성을 위해 직·간접적으로 출연·출자하고 자율적 운영권한을 부여해 결국 공익을 도모하는 데 존재 가치가 있다. 이들이 운영하는 대다수 자금은 국가를 신뢰한 국민들의 세금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건보공단은 최근 과도한 소 제기 논란에 휩싸인 상태다. 한 의료전문매체가 자신에 비판적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언론사는 물론, 기자 개인을 지목하면서까지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한 것이다.


사회 통념상 소송 제기란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이 담보되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이뤄지는 게 상식이다. 특히 언론을 상대로 한 문제 제기라면 정정보도 요청 등 해명이 먼저란 게 통상적 수순이다.


건보공단은 이런 통념에서 벗어나 소 제기를 일삼은 정황은 그간 곳곳에서 장기간 포착됐다. 개인은 물론 언론, 각종 기관 등 다양한 ‘피고인’ 양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가운데, 최근 건보공단 내부 소송 증가에 따라 추가적인 법률지원단을 꾸리기도 했다.


물론 공공기관이라도 자신의 명예에 치명적인 손상이 예상된다면 얼마든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판례를 통한 검증이 끝난 사안이거나 패소 가능성이 짙은 경우라면 소송 비용 등에 국민 혈세가 투입된다는 점에서 좀 더 세심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이미 공법인은 명예권의 주체가 아니란 판례는 존재한다. 하지만 이번 언론 대상 소제기에 국민 여론을 대변한 언론 기능을 인정하지 않은 사실상 건보공단의 ‘언론 재갈물리기’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일각에서 “그런 데(소송 제기) 돈 쓰라고 건강보험료를 낸 게 아니”란 여론의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법원은 언론을 상대로 명예훼손이란 이유로 한 소송 제기에 건보공단이란 ‘공법인’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법조계와 의료계에선 ‘당연한 판결’이란 의견이 중론을 이룬 상태다.


전방위 소송 제기에 ‘피고인 양산’
法, “공기관 명예훼손 주체성 없다”


의료전문매체 A사의 B기자는 현재 건보공단 측 소송 제기에 심각한 스트레스로 인한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고통, 시간적 피해 등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건보공단과 공단 노조는 A사가 내보낸 ‘공단이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취지의 의료계 멘트가 인용된 기사와 관련, 심각하게 명예가 훼손됐다는 이유로 A사는 물론, 기사를 작성한 B기자까지 민·형사상 고발을 이어갔다.


과거 유사 판례 존재…이미 예견된 ‘패소’


해당 기자가 사실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고의 또는 악의를 품고 기사를 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법부는 최근 건보공단은 공공기관으로 국민 감시나 비판 대상이 돼 결국 명예권의 주체가 아니란 이유로 소 자체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다. 건보공단은 항소를 포기했고 지난달 26일 이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해당 판결을 계기로 언론은 물론, 법조계·의료계에서 건보공단의 그간 소송 남발을 문제 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먼저 법조계에선 ‘공법인은 명예권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내용의 판례가 존재한다는 점을 근거로 처음부터 무리한 소송 제기였다는 의견이 나온다.


법무법인 정률의 송종호 변호사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이번 판결은 정부 또는 국가기관, 국가조직의 공법인은 기본권의 소지자가 아니므로 형법상 명예훼손죄의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기존의 대법원 판결(대법원 2011. 9. 2. 선고 2010도17237 판결)의 입장을 재확인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공단이 피해자로서 직접 고소를 하지 않고 공단 노조 명의로 고발을 한 사안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판단을 함으로써 우회적인 방법에 의한 시도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판결”이라고 꼬집었다.


또한 송 변호사는 “결국 이번 사안은 정부 또는 국가기관, 국가조직의 공법인의 정책결정이나 업무수행과 관련된 사항은 항상 국민의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 돼야 하는 것이고, 이런 감시와 비판은 이를 주요 임무로 하는 언론보도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될 때에 비로소 정상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는 점을 재확인한 데서 의미가 있는 판결”이라고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법조계 인사는 “이미 10여년 전부터 공공기관의 기본권이나 명예훼손 등 주체성을 부정하는 판례가 존재한다”면서 “따라서 소 제기 시점부터 기각 판결이 충분히 예상된 사안이었다”고 말했다.


건보공단이 최근 한 언론사를 상대로 낸 소송과 관련, 법원은 공공기관의 명예훼손에 대한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어 “하지만 언론사는 물론, 소속 기자까지 정확히 지목해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한 것은 의도 자체에 의구심이 든다”면서 “국민 기본권의 수범자 역할이 강조되는 공공기관으로 이번 건보공단의 기자 고발은 언론의 자유 침해는 물론, 이런 수범자 역할을 사실상 내팽개친 것으로 평가해도 무리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해당매체에 따르면 건보공단은 소 제기에 앞서 A사에 그 어떤 정정요구나 해명 등 사전 작업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상급기관인 보건복지부조차 고발에 앞서 정정보도 요구를 통상적으로 행하는 점에 비춰 비상식적 행보로 보인다.


결국 기자들 사이에서 통상적 절차를 생략한 건보공단의 이번 행태에 ‘언론 재갈물리기’, ‘언론 길들이기’, ‘갑질’이란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진 이유인 셈이다.


건보공단은 그간 무분별한 소송으로 여론의 도마에 오르내렸다.


우선 건보공단은 지난 2016년 한 체육고등학교 권투 특기생들이 연습경기 중 입은 부상에 대한 치료과정에서 지급된 비용을 돌려달라며 교육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패소했다.


또 같은 해 중학교 한 야구선수가 연습 과정에서 공에 맞아 부상당한 데 대해 소송을 걸었고 졌다.


건보공단, 개선 의지 있나?…5명 추가 대규모 법률지원단 구성


게다가 개인을 상대로 지난 2014년 지병을 가진 C씨를 폭행해 상해를 입힌 D씨에 대해 C씨의 질병 이력 등에 대한 사실관계 여부조차 파악하지 않은 채 소송을 제기했고 역시 졌다.


이외에 건보공단은 공단에 대한 비방 댓글을 게재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진행하는가 하면, 의료인이나 의료기관을 상대로 숱한 소송전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 5년 동안 건보공단은 자신의 직원 비방 댓글을 달았다는 이유로 네티즌 9명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했으며 ‘방만 경영’을 지적하는 성명서를 냈다는 이유로 마찬가지 혐의로 전국의사총연합을 고소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건보공단의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한 개선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 건보공단은 내부적 소송 증가로 추가 법률지원단을 꾸렸고 변호인단 규모는 무려 12명에 달한다.


건보공단은 또한 올해부터 지역 본부에 별도 소송전담팀도 꾸려 운영키로 결정한 가운데, 이에 투입될 예산은 총 4억4600만 원 수준인 것으로 전해졌다.


일각에선 건보공단이 소송을 통한 ‘위력의 행사’에 앞서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건강보호란 공적 책무에 보다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실제 건보료의 부당한 환수에 따른 환급 조치 또는 부과 자체의 오류 등으로 그간 줄기차게 민원 제기가 이뤄지고 있는 현실이다.


해당 언론의 기사내용은 전반적 의미에서 건보공단에 대한 업무수행 과정에서 정당한 비판 의견을 제시, 결과적으로 국민의 알 권리 충족 차원에서 유익했다는 평가가 중론이다.


한편, 최근엔 한 소아청소년과 의원 원장이 건보공단 직원으로부터 허위사실을 기재한 확인서와 진료기록 변조 강요를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해당 의원 원장은 이들의 요구를 거절한 뒤 의원을 폐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임현택 회장과 고소 대리인 양태정 변호사는 서울서부지검에 이들 건보공단 직원 2명을 ‘강요 및 업무방해’ 혐의로 고발장을 제출하기도 했다.

[사진=뉴시스/ 건보공단 홈페이지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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