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인돌 - 출처 조수범 박사
[스페셜경제=조수범 박사]좌청룡(左靑龍)·우백호(右白虎)·배산임수(背山臨水) 등 집터나 사업장, 또는 조상의 묘(墓)를 잘 써야 자손이 복을 받는다고 해서 명당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는 부귀영화와 성공, 명예, 권력 등 나쁜 기운은 내쫓고 좋은 기운을 받아들이기 위함이다. 그만큼 풍수지리는 우리 생활 곳곳에 널리 퍼져있으며 중요하게 인식되어지고 있다.


이에 <스페셜경제>가 풍수지리 전문가인 조수범 단국대 평생교육원 풍수지리학과 교수(행정학 박사)를 통해 풍수지리에 대한 개념과 역사는 물론 역대 대통령들의 풍수 분석 및 차기 대선후보들에 대한 풍수지리적 분석까지 시리즈로 기획해 봤다.<편집자주>


풍수사상(風水思想)의 일반적 개념


풍수지리(風水地理)는 동양지리(東洋地理)의 중심학문(中心學問)이며 천지인을 포괄하는 사상(思想)으로, 따뜻하고 안전한 보금자리와 풍요로운 삶을 위해 생활터전을 잡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풍수지리는 인류가 출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은 고조선 시대의 대표적 무덤양식인 고인돌의 천지인 사상과 삼국시대의 음택, 양택, 양기풍수를 보듯이 상당히 높은 수준의 풍수사상(風水思想)을 보여주고 있다.


풍수지리(風水地理)의 성격(性格)


동양(東洋)의 자연사상(自然思想)인 풍수지리(風水地理)는 양적(陽的)인 물질(物質)보다 음적(陰的)인 정신(精神)에 중점을 두는 학문이다.


따라서 풍수지리(風水地理)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氣)의 실체를 이해하고, 이것을 토대로 우주만물을 이루는 기(氣)의 작용력(作用力)을 분석(分析)하고 해석하는 학문이다.


더 나아가 그 기(氣)가 생성된 이치에 순응하고 조화를 이루는 삶의 지혜를 제공하는 학문으로써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풍수지리는 동양학문의 한 축으로써, 동양사상의 종합학문으로 볼 수 있는데 근세에 들어서 서양학문을 우선시하고 우리의 전통인 동양학문을 천시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는 물질사상(物質思想)인 양(陽)의 학문이 객관적, 합리적이며 검증가능하기 때문에 과학이라 하고 그 과학이 지배하여 온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선천시대가 막을 내리고, 음(陰)과 정신이 지배하는 시대 즉, 눈에 보이지 않고 형체를 초월하는 형이상학적인 정신(精神)문명으로 전환되는 시점에 살고 있다.


과거 일제는 우리의 민족정신과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이러한 동양학문에 미신(迷信)의 굴레를 씌어 말살하였는데, 이제는 미신(迷信)으로 치부되었던 동양학문과 정신을 되찾아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동양학문으로 대표되는 명리학, 풍수학, 한의학 중 한의학은 제도적 학문으로 진입하였으나, 나머지는 아직도 미신(迷信)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풍수지리를 종교와 연결시켜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풍수지리는 종교와 관련이 없는 대자연의 이치를 실생활에 적용하는 학문임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풍수지리의 적용사례


우리 민족은 도읍지를 모두 풍수적 명당(風水的 明堂)에 정하였는데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고려, 조선 등의 나라가 대표적으로 풍수지리를 적용한 터 잡기를 행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① 고구려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은 압록강 북쪽에 위치하여, 서북쪽을 둥글게 포회한 우산을 주산으로 삼아 동남쪽으로 명당이 펼쳐진 최고의 길지이다.


용(龍)은 간인방(艮寅方)에서 힘차게 행룡하여 들어오는데, 이는 천시원의 강력한 기운(氣運)을 끌고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주산 및 사위(四緯)는 긴밀한 보국을 만들었고, 압록강 너머의 조산(朝山)은 대귀인(大貴人)이 조응하는 득수국(得水局)의 명당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국내성은 배산임수(背山臨水), 전저후고(前低後高), 천문지호(天門地戶)와 나성원국(羅成垣局) 등 명당으로써의 조건이 잘 갖춰진 풍수적 길지에 도읍을 정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 우산(아래보이는 능은 안원왕릉) - 출처 고구려왕릉총감, 장복유 저
▲ 조산(압록강 너머로 보이는 북한땅이 조산임) - 출처 조수범 박사


집안시(集安市)의 국내성(國內城)은 서북쪽에 위치한 환도산성 앞을 구곡(九曲)하여 들어오는 통구하(두곡이라고도 함)와 집안의 동남쪽을 흐르는 압록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가로 500m, 세로 700m 크기로 석축을 쌓아 만든 견고한 성터이다.


궁궐의 좌향은 건좌손향(乾坐巽向)으로 동남향으로 건축되었고 용법(龍法)과 향법(向法) 모두 조화를 이루었으며, 수법(水法)도 곤신진수구(坤申眞水口·借文庫法)로 풍수에서 논하는 선천수법(先天水法)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 환도산성 - 출처 조수범 박사
▲ 진수구(압록강이 흘러가는 것을 수성한문이 관쇄한 모습) - 출처 조수범 박사
또한 국내성 앞을 흐르는 배룡수(압록강)는 천문지호(天門地戶)로써 물이 들어오는 곳이 활짝 열려있고, 물이 나가는 곳은 막혀있으며, 수성한문(獸星捍門)등의 귀격으로 천기가 누설되는 것을 관쇄하였다.


집안의 국세는 광활하지는 않으나, 강력한 보국을 형성한 지형 덕분에 외부의 침입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압록강 좌안(左岸)은 하평양(下平壤), 압록강 우안(右岸)은 평양성平壤城)으로 불리어졌고, 그곳을 국내성(國內城)으로 명명하였다는 광개토대왕비(호태왕비)의 내용으로 보아 산에 있는 성(城)과 평지(풍수에서는 평양이라 함)에 있는 성(城)을 구분하여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 호태왕비 - 출처 고구려왕릉총감, 장복유 저
▲ 국내성곽 - 출처 조수범 박사


국내성 동북측에 위치한 여러 왕릉 중 장수왕릉(20대왕)은 동양학문과 풍수지리를 적용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장수왕릉은 우산에서 낙맥한 평양룡의 기운(氣運)이 응집된 명당터에 설치되었다. 밑부분에는 사각형의 기단이 설치되었고, 그 위는 22개의 석축이 7개의 계단식으로 축조되었는데, 이는 기(氣)를 모으는 피라미드 형태이다.


꼭대기는 둥근 원형 모양으로 만들어졌고, 12방위에 호위석이 설치되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장수왕릉 하단의 사각형은 땅(地)을 뜻하고 꼭대기의 둥근 원형은 하늘(天)을 뜻하기 때문에, 동양의 음양사상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22개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하늘을 나타내는 10간(10干)과 땅을 나타내는 12지지(12地支)를 의미한다.


12개의 호위석은 사유방위(四維方位)인 건곤간손(乾坤艮巽)과 8간방위(8干方位)인 갑을병정경신임계(甲乙丙丁庚辛壬癸)에 설치되었고, 정사각형의 네 귀퉁이는 동서남북으로 설치되었다.


이상으로 보아 장수왕릉은 풍수의 방위학을 활용한 왕릉으로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실제 방위를 측정해보니 호석과 방위가 일치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서기 400년경에 나침반(나경)을 활용한 방위학이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의 나침반을 동양에서 도입한 시기와 비교하면, 장수왕릉의 나침반(나경) 사용이 서양보다 1000여년 가까이 앞섰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침이를 이용한 나경을 한나라때 장량이 제작(12지지만 사용)한 기록이 있음을 볼 때, 동양의 나침반 활용은 기원전부터 시작되었 음을 알 수 있다.


▲ 장수왕릉 - 출처 조수범 박사


장수왕릉 옆의 사각형 기초위에 세워진 고인돌은 고조선의 무덤양식인 천지인사상(天地人思想)을 답습하였다. 이를 통해 고조선과 고구려는 같은 민족임을 알 수 있다.


나머지 왕릉들도 내부가 모두 생기를 모으는 방식인 피라미드 형태로 구축되었고, 사신도(북현무, 청룡, 백호, 남주작)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면, 이 당시에도 풍수사상이 발달하였고 실생활에 풍수를 적용한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 마지막왕인 보장왕(당나라에 끌려감. 능(陵)은 중국 장안에 위치)의 부친인 태양왕(추증)의 능(陵) 안에는 선천 팔괘(八卦)를 창안한 태호복희와 그의 여동생 여와의 벽화와 신농씨의 벽화를 볼 때, 태호복희와 여와(6000여년전 인물로 특히 여와는 흙으로 사람을 빗어 코에다 입김을 불면 사람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옴) 그리고 신농씨가 우리민족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들이 우리 조상이라면 단군조선(4300년전)이전의 나라였다던 배달국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역사서는 거짓으로 기록할 수 있으나 유적유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에 주목하여야 할 것 이다.


▲ 태호복희와 여와(고구려 마지막 왕인 28대 보장왕의 부친 태양왕릉의 벽화) - 출처 조수범 박사


② 신라의 도읍지(경주)

신라의 도읍지인 서라벌은 장풍국(藏風局)의 명당(明堂)으로 모든 유물이 잘 보존된 경우이다. 서라벌은 9龍(구룡)이 모여드는 강력한 국세의 땅이며 1000년의 도읍지로 손색이 없으나 진취적인 기상을 가지기 보다는 현상에 안주하고 평안함을 추구하는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음택지인 왕릉들도 모두 보존이 잘되어 있으며 가야의 왕릉과 고구려 후기의 왕릉을 많이 닮은 것이 특징이다.


③ 백제의 도읍지

백제는 한성, 웅진(공주), 부여로 도읍을 옮겨가면서 생존했던 나라였다고 삼국사기 등에 기록되어 있는데 700여년을 이어온 왕조이면서도 서울과 공주(1기 무령왕릉), 부여의 어디에도 왕릉이 1기 밖에 없다는 사실이 의아스럽다.


멸망한 나라이니 왕릉이 없다고 보았지만 고구려, 신라, 가야도 왕릉이 모두 존재하는데 왜 백제만이 수도였던 서울, 공주, 부여에 왕릉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또한,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를 하였다고 하는데, 공주의 견고한 石城(석성)을 버리고 왜 부여 부소산으로 옮겨가 석상(石城)이 아닌 토성을 쌓아 방어력을 약화시켰을까.


부여는 공주보다 외부침입에 불리한 조건을 갖춘 곳이고, 공주와 부여는 28km 정도의 가까운 거리인데도 많은 자금과 시간과 인력을 동원하여 수도를 옮길 필요가 있었을까.


게다가, 백제의 사비성엔 삼천궁녀가 있었다는데 그 정도의 궁궐터가 되려면 부여읍 시가지 정도 가지고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부여는 풍수적으로 볼 때 도읍을 정할 정도의 땅은 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당서(唐書)에 보면 백제의 민가 호수가 고구려보다 많았다는 기록 등이 있는데, 이를 통해 백제가 고구려에 버금가는 대국으로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가능할 것이다.


이상의 내용들을 살펴볼 때, 백제 왕릉을 찾게 될 때가 제대로 된 백제의 사비성을 풍수적으로 분석 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④ 가야의 왕릉


금관가야의 김수로 왕릉은 김해에 있는데 이장법을 쓴 陵으로 명당길지에 해당한다. 대가야의 초대왕의 능(陵)은 경북 문경 점촌에 존재하는데, 풍수적으로 제대로 된 길지에 소점돼 있다. 이상 가야 왕릉들의 위치를 볼 때, 가야의 국경이 중부지방까지 확장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경남 함양과 산청접견지역에는 상격귀사(上格貴砂)인 어병토성(御屛土星)으로 불리는 왕산(王山)이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금관가야의 김수로 왕이 왕위를 이양한 후 이 왕산(王山)에 궁궐을 짓고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왕산(王山)에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양왕의 陵(구형왕릉)이 존재하는데, 모란만개형의 명당 터에 고구려 초기 무덤형태인 돌을 이용한 피라미드 형태로 축조되어 현재까지 잘 보존이 되어있다.


가야 양왕의 증손자인 김유신 장군이 삼한(고구려, 신라, 백제)을 통일한 역사적 사실을 볼 때, 구형왕릉 터의 영향으로 한때의 흉(凶)이 길(吉)로 바뀌게 되는 대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해주는 좋은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 양왕릉 - 출처 조수범 박사
▲ 양왕릉에서 바라본 함양군 유림면 유평리의 전경 - 출처 조수범 박사
▲ 혈처에서 나오는 혈토의 모습 - 출처 조수범 박사


⑤ 고려의 도읍지(개성)

고려의 도읍지였던 개경(개성)은 임진북예성남정맥이 간인용(艮寅龍)으로 진행하다가 송악산의 명산을 만들고 그 아래 양기풍수의 입지에 적합한 명당길지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를 창업한 왕건의 탄생지이기도 한 송악산 밑의 부소산은, 빼어난 명당 임에도 불구하고 나무가 없는 동산(童山)이었다.


그런데 한 풍수사의 조언에 따라 소나무를 심어서 생기가 넘치는 푸른산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는 풍수의 고서인 장경과 청오경에 칠흉산(七凶山·일곱개의 흉산)중 첫 번째가 동산(童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동산(童山)에 소나무를 심음으로써 주산의 생기(生氣)를 내룡(來龍)을 통해 신도(新都) 송악군으로 유입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한국은 수목근간(水根木幹)의 땅으로써 흙을 부모로 하고, 청(靑)을 몸으로 하는 자세가 된다(水生木의 위치).


백두산 천지가 부모로 그 줄기가 백두대간 및 정간으로 이어져내려 온다. 백두산 천지는 水(흑색), 백두대간 등의 나무줄기는 木(청색)이 되는 이치이다.


만약, 부소산이 나무가 없는 동산(童山)이라면, 산의 색이 적색(火), 황색(土)이 되어 수극화(水剋火) 또는 토극수(土克水)하여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순환되는 법칙에 어긋나 흉화를 면치 못한다고 보았을 것이다.


소나무를 심어 동산에서 생기가 있는 푸른산으로 변한 부소산 아래에는 고려 왕씨의 생가지인 마하갑이 위치한다.


마하갑에는 고려 왕씨의 조상인 호경으로부터 그의 아들 강충, 강충의 아들 보육, 보육의 아들 작제건, 작제건의 아들 융건, 융건의 아들 왕건이 이어져 내려오며 거주하였는데, 이는 모두 풍수이론에 따른 터 잡기에서 큰 인물이 출현한다고 하는 풍수사상의 한 면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본다.


고려의 궁궐지인 만월대는 풍수적으로 고려되어 축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관산을 조종산(祖宗山), 송악산을 진산(鎭山), 청룡은 중대 및 자남산, 백호는 오공산, 조안(朝案)은 문필봉인 용남산과 진봉산 등으로 긴밀히 포옹하였고, 궁궐의 좌향은 정남향인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세웠다.


궁궐 앞의 명당 수는 서북쪽에서 흘러들어와(득수) 동남쪽으로 유거하고, 물이 나가는 수구(水口)는 보이지 않게 감추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사위(四圍)가 견고한 국(局)으로 한 나라의 국도로서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명당(明堂) 내에 흐르는 물이 적어 득수극(得水局)보다는 장풍국(藏風局)의 명당이다.


그리고 만월대의 풍수적(風水的) 유형(혈명)도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오는 형국인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의 명당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도선이 왕건을 도와 궁터를 정할 때, 날이 흐려 잘 보지 못하고 개성을 천년도읍지라 보았다. 그런데, 추후에 날이 갠 날 다시 보니 동남쪽에 한양의 삼각산이 개성을 엿보고 있었다.


이를 보고 도선은 500년은 삼각산 너머로 왕도를 빼앗긴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도선은 왕도를 빼앗기지 않기 위한 비선책으로써 쇠로 개 12마리를 만들어 동남방에 늘어놓았다.


이것은 멀리 삼각산을 염승키로 한 비선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풍수에서 규봉(도적)은 살짝 머리를 내밀어 엿보고 있는 뾰족하고 삐딱한 봉우리를 말하는데, 개성에서 바라보이는 삼각산은 귀인사로 3개의 봉우리가 당당히 넘겨다보는 형상이다. 이는 잡도둑이 아니라 나라를 찬탈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삼각산은 고려 말에 벼락을 맞아 형태가 안 좋게 바뀌었다고 한다.

※세종시 청사에서 바라보이는 계룡산 봉우리는 뾰족하면서도 불규칙적인 살기(殺氣)로써 이것은 도적떼를 의미한다. 게다가 남쪽에 위치하므로 강력한 불(화력)을 가진 도적떼로 보면 될 것이다. 세종시는 도선대사가 600여년 전에 예언했던 풍수이론의 한 면을 참고하여야 될 것이다.


이상과 같이 고려는 풍수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풍수예언에 따라서 고려 역사 중 500년은 한양에게 넘겨주었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에게 풍수의 예측기능의 한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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