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경제=권도윤 기자]여행(旅行)의 사전적 정의는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이다.


하지만 실제 여행이란 ‘언어’라는 수단으로 온전히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 행동에 옮기기에 앞서 계획하고 준비하는 단계에서의 막연한 설레임, 그리고 매 순간마다 찾아오는 선택의 고통, 그럼에도 ‘항해’를 지속하게 하는 알 수 없는 힘.


그리고 모든 여정을 마친 후 원래 있던 것들의 소중함을 느끼게 만든다. 아련하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지는 기분. 이 모든 과정이 여행이고, 이를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또 다시 여행을 결심한다. <편집자주>


사르나트를 떠나 계속 북쪽으로 향했다. 길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다. 그저 “기대가 욕심을 만든다. 남을 바꾸려 하지 말고 나를 바꿔라”는 녹야원 주지 스님의 말씀만 생각하며 달리고 있다.


과연 기대를 버리니 마음이 편하다. 길이 엉망이라도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적응하기에는 편하지만 삶에 발전이 없을 것 같다.


112km가량 지나 지안푸르(Jianpur)라는 마을 근처에 빈 건물이 눈에 띈다. 2층에서 숙영하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것 같다. 빈 건물은 학교였는데 교실 벽 자체가 칠판이었다.


그래도 건물 곁에 작은 펌프가 있어 시원하게 샤워까지 할 수 있었다. 편하게 쉴 수 있겠다. 단, 인도 각지에서 2~3부제 수업을 하는 학교를 많이 봤다. 수업을 방해하지 않으려면 아무래도 아침 5시에는 일어나야 할 듯 하다.


날이 밝자 출발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는다. 폐교였구나. 괜히 일찍 일어났다고 후회하며 다시 길을 나섰다.


이틀이 지나자 마침내 국경마을 소나울리(Sonauli)가 나타났다. 뭄바이에서 출발한지 정확히 두달이 걸렸다. 나름대로 고생한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감격도 잠시 뿐, 도무지 출입국심사장(Immigration Office)이 보이지 않는다.


한참 헤맨 끝에 찾은 출입국심사장은 정말 기가막힌 모습이었다. 사실 인도에서 뭐 하나 상식과 부합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관문인데 이게 뭔가 싶을 정도였다. 역시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지만 우여곡절끝에 출국 도장을 받아냈다.


도장 받기가 까다로운데 비해 출입국 절차는 너무나 허술했다. 철책과 지뢰가 깔려있고 경계근무서는 군인 등 내 머릿속의 국경 이미지는 여지없이 깨어졌다. 심지어 양국 사이의 중립지대는 어이없게도 주차장이었다. 진짜 ‘비무장지대’다.


‘인도다움’이 뭘까


인도를 요약하면 엄청난 빈부격차와 가난, 모든것을 아우르는 무질서함이다.


40여개의 주마다 문자가 다르고 지폐에 인쇄된 인도 문자만 15종인 복잡한 나라. 기후가 온난하여 일만하면 굶주릴 일 없고, 심지어는 길에서 자도 얼어죽지 않는다. 자원도 많고 살기좋은 땅으로 고대 인더스 문명과 불교의 발상지이지만, 영국 식민지배를 거쳐 지금은 가난한 나라로 전락해버렸다.


걸음걸이는 어슬렁거린다는 말 외에는 표현이 안되며 일 하는 속도도 느리고 뭘 해도 게을러 보인다. 역설적이지만 풍부한 식량과 온난한 기후는 열심히 일 할 필요도, 저축할 필요도 없게 만들었고 힌두교와 카스트 제도도 가난에 크게 한 몫을 한 것 같다. 특히 영국의 식민지배 300년을 참아 낸 힘은 현 생에 무관심하며 차별을 인정하는 힌두교의 영향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반면 근면성실하고 관대한 시크(Sikh)교도들은 마음에 들었다. 이들은 사막을 개척하여 도시를 만드는가 하면, 세포이 항쟁 때도 앞장서서 외세에 맞서 싸웠던 주역이었다. 시크교는 구루 나낙(Guru Nanak)이 만든 종교로 독실한 시크교도들은 평생 이발하지 않고, 쇠링과 칼을 차고 다닌다.


힌두교·시크교·이슬람교·자이나교·기독교 등 수많은 종교가 존재하며 종교 갈등으로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가 분리 독립했고, 시크교도는 인디라 간디 수상을 암살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다. 종교로 싸울 일 없고, 게을러질 수 없게 만드는 적당한 기후의 대한민국이 고맙게 느껴진다.


인도의 질서의식. 특히 교통문화는 최악이었다. 질서와 법규는 행동을 조금 제약하는 면은 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약자를 보호하는 데 있다. 질서없는 인도는 강자가 우선이다. 힘이 없으면 밀린다. 그래서인지 인도인들은 목소리가 크고 도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거지조차 얌전히 구걸하지 않는다. 바지가랑이나 손을 잡던, 이상한 마술쇼를 보여주던, 아니면 우는 아기를 보여주던 끊임없이 자기 홍보를 한다.


덕분에 아파트, 학교, 대형 쇼핑몰 등 조금 크다 싶은 곳에는 제복입은 경비원들이 위치하고 있고 수시로 금속탐지기로 몸수색을 한다. 하지만 ‘대충’이다. 도심 곳곳에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 있지만, 정자세로 서 있는 인원은 거의 없다. 무거운 방탄복은 옆에 던져놓은 채 짝다리 짚고 서 있다. 정신무장이 부족하니 파키스탄·중국 등 전쟁만 하면 결과가 좋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회심의 한방인 핵까지 개발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가난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시골에서는 따뜻한 인심이 살아있었고 언젠가부터 인도의 관광지나 명소들보다 이름모를 시골 마을이 더 좋아져버렸다.


현재 인도는 위대했던 선조들의 유물을 이용해 먹고 사는 느낌이다. 관광지에는 현지인의 40배에 달하는 외국인 요금을 받지만 서비스 수준은 동일하다. 그래도 수많은 외국인들은 자기들의 고향과 다른 모습(가난·무질서·게으름)을 보면서 흐뭇해 하며 아낌없이 지갑을 연다. 이게 ‘인도다움’이란다.


과연 인도다움이 뭘까? 늘 전통의상을 입고 다니는 것? 다른건 모르겠지만 질서의식과 조금의 매너를 더 갖춘다고 인도의 모습이 사라지지는 않을것이다. 그런 주장은 단지 여행지로 ‘인도’를 선택한데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 같다.


한국-인도 관계는


한편, 인도는 우리 대한민국과도 관계있는 나라다. 인도 북부 아요디아(Ayodhya)로 추정되는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은 바닷길을 이용하여 가야에 상륙했고 수로왕과 혼인하여 김해 김씨, 김해 허씨에 유전자를 남겼다. 불교를 통해 인도의 문화가 간접적으로 전파되었으며 석굴암과 흡사한 엘로라·아잔타 석굴에서 문화교류의 흔적을 느꼈다. 또한 신라시대 혜초스님은 인도를 돌아보며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으나 결국 외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2차대전 후 독립한 것도 비슷한 역사이다. 인도의 독립기념일은 1947년 8월 15일이다. 이후 6·25 사변이 발발하자 3년밖에 안된 신생독립국 인도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대한민국에 의료·보급품을 지원한 고마운 나라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짧았지만 나를 돌아보게 하고,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준 인도. 지금 판자촌에 사는 이 아이들이 지금 내 나이쯤 되면, 더 나은 인도가 되어 있겠지? 훗날 다시 인도를 찾게 되면, 위대한 선조들의 정신문명 위에 성숙한 질서를 갖춘, 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인도의 모습을 기대하며 인도 자전거 여행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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