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경제=권도윤 기자]여행(旅行)의 사전적 정의는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이다.


하지만 실제 여행이란 ‘언어’라는 수단으로 온전히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 행동에 옮기기에 앞서 계획하고 준비하는 단계에서의 막연한 설레임, 그리고 매 순간마다 찾아오는 선택의 고통, 그럼에도 ‘항해’를 지속하게 하는 알 수 없는 힘.


그리고 모든 여정을 마친 후 원래 있던 것들의 소중함을 느끼게 만든다. 아련하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지는 기분. 이 모든 과정이 여행이고, 이를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또 다시 여행을 결심한다. <편집자주>


갠지스 강이 흐르는 힌두교의 성지 바라나시(Varanasi)는 힌두문화의 결정체였다. 갠지스강에서 화장한다는 말은 들었으나 직접 본 화장터의 분위기는 충격적이었다.


관도 없이 천으로 대충 말아 놓은 시신을 장작에 올려놓는다. 불이 붙으면 금세 천이 타버리고 시신이 그대로 노출된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인부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불 속에 다시 쑤셔 넣는다. 지나가던 소는 상여를 장식한 꽃을 뜯어먹고 떠돌이개 타다 남은 시신 조각을 노리며 어슬렁거린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외국인들에게 “저기 타고있는건 내 할머니야”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사람들까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힌두교에서는 사후 24시간 내에 갠지스강에서 화장을 하면 윤회로부터 해방된다고 한다. 뒷머리 끝만 조금 남기고 삭발한 상주부터 누구하나 슬퍼하는 사람이 없다. 아직 슬픔이 가실 시간은 아닐텐데……. 그렇게 삶이 고단해서였을까? 아니면 다시 윤회하지 않을거라는 믿음이 슬픔을 줄여준 것일까? 힌두교는 이들에게 과연 어떤 존재일까?


게다가 여기에서는 죽어서도 빈부격차가 있다. 부유한 자는 좋은 장작을 많이 쓰고 가난한 사람은 장작을 적게 쓰거나 아예 전기화장터를 이용한다. 심지어 여유있는 사람들은 죽음이 다가오면 갠지스강 화장을 위해 바라나시에 자리잡고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한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문화다. 하긴 이 사람들은 한국인이 묫자리에 신경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물이 썩지 않는다던 갠지스 강물은 생각보다 훨씬 더러웠다. 이미 더 썩을것도 없다 싶을 정도였다. 강에 죽은 돼지같은게 떠다녔는데 발을 보니 개였다. 털이 다 빠지고 물에 퉁퉁 불어서 돼지로 보였다. 화장한 재를 뿌리고 온갖 시체와 쓰레기가 떠다니지만 한켠에서는 그 물이 성스럽다면서 정성껏 목욕한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Very Clean”이라면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저 물이 ‘Very Clean’하다는건 하수도물이 생수라는 것과 다름없다.


가트(Ghat)라고 불리는 갠지스 둔치에는 이상한 사람이 많았다. 사두(Sadhu·힌두교의 수행자)들은 몸에 재 같은것을 바르고 나체로 돌아다닌다. 무소유를 실천하기 위해 탁발생활을 하며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성기를 쇠고리로 조이고 수행하는 사람들이 줄담배를 피워댄다. ‘니코틴’이 성욕보다 자제하기 어려운 것일까?


생각에 빠져있는 차에 ‘사두’가 말을 걸어왔다. 자기 사진을 찍고 돈을 내라는 것이다. 갠지스 사두 중에는 사기꾼도 있다고 익히 들었기에 거절했다. 반면 일부 서양인들은 이런 사두들의 모습에 끌려 ‘제자’를 자처하며 따라다니는 경우도 있어 더욱 신기했다.


“기대가 욕심을 만든다”


열흘간 바라나시에 머무른 뒤 다시 길을 나섰다. 목표는 바라나시 북쪽 12km정도에 위치한 사르나트(Sarnath, 녹야원)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처음 설법한 불교 성지(초전법륜지)다. 사르나트는 가까웠지만 시간이 제법 소요되었다. 열악한 도로와 엄청난 인파를 뚫고 바라나시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사르나트에 도착하니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바로 한국 절 ‘녹야원’으로 향했다.


주지스님께서는 공양(식사) 시간이 지났다면서 손수 라면을 끓여주시는 등 반갑게 맞아주셨다. 편안한 잠자리도 제공해 주셨고 다음날 조식 후에는 차와 함께 면담 기회를 부여해 주셨다.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다. 힌두교 등 인도에서 본 각종 종교와 삶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했으나 ‘나’도 모르면서 ‘남’을 알려 한다거나, ‘나’는 없는것이라는 등, 내 수준에서는 너무 어려운 말씀만 하셔서 이해하기 힘들었다.


결국 스님은 수준을 낮춰 주셨다. 특히 수행은 절에서만 하는게 아니라 삶이 수행이라는 것과 기대가 욕심을 만든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았다. 헛된 기대를 버리면 평화를 얻을수 있다고 한다.


하긴 지구는 원래 아스팔트로 덮힌 별이 아니었지. 이런 기대를 가지니까 비포장길에서 욕심과 원망이 생기는가보다. 마음을 편하게 가져봐야겠다. 나는 자전거타고 길에서 수행해야지.


녹야원을 나와서 ‘일월산 법륜사’라는 일본 절에 짐을 풀고 사르나트를 더 돌아보기로 했다.


초전법륜지의 보리수 아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불 중이었다. 근처에는 사슴공원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새끼를 밴 어미사슴을 지키기 위해 사슴왕이 사냥꾼에게 자신을 내 주었고 이후 석가모니로 환생했다고 한다.


법륜사에서 만난 인도인 두명은 초면에 3만루피(약 60만원)를 빌려달라면서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았다. 링이라는 중국 스님은 아침 예불 후 낮잠을 늘어지게 자다가 돈 빌려달라는 소리에 깼다. 그는 절대 살생하면 안된다더니 방에 모기향을 세 개나 켜 놓고 치킨 먹으러 나갔다. 한 정체불명의 사나이는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자 “나는 신으로부터 왔다. 너도 역시 신의 산물이다”며 이상한 말만 늘어놓았다.


신기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어딘지 모르게 이곳과 어울리는 것 같다. 바라나시에서는 삶의 덧없음을 느꼈다면 사르나트에서는 더욱 혼란에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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