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는 한번 내놓으면 끝”‥재계 2위 현대차그룹의 ‘탄생’

[스페셜경제=조경희 기자]정몽구 회장이 이끄는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은 1분기에만 매출 20조9429억원, 영업이익 1조5880억원을 거둔 국내 재계 2위 그룹이다. 지금에야 현대차그룹이 재계 2위까지 성장했지만 사실 이 ‘자동차’ 산업의 시작은 정주영 회장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사업으로 꼽힌다.

지난 1980년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기 전인 ‘국보위’ 시절, 자동차와 발전설비 분야를 둘러싼 일원화 정책에 대해 당시 정주영 회장과 김우중 회장이 국보위에 불려가 자동차, 발전설비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위기’에 놓여있었던 것.

지금에서야 ‘수직계열화’ 등의 목표를 세워 기업이 필요한 사업의 경우 연구개발 하거나 M&A를 통해 인수하면 되지만 과거에는 정권의 ‘입맛’에 따라 사업을 떼어주거나 접는 경우도 많았다. 3공화국 시대부터 지금은 사라진 옛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과 현대 정주영 회장이 답안지에 ‘선택’을 해야 하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자동차 vs 발전설비‥현대, 대우의 ‘대립’


국보위 시절 이전부터 자동차와 발전설비를 둘러싼 논란은 지속됐다. 대규모 설비투자가 선행돼야 한다는 점에서 초창기였던 당시에는 수익 대신 ‘적자투성이’ 산업이라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특히 자동차 산업의 경우 80년 국보위 시절 당시 우리나라의 자동차 산업에 대해 대단히 회의적이었다. 자동차산업 자체가 우리의 능력과 여건에 맞지 않으니 GM과 같은 국제적인 기업의 품속에 들어가야 합당하다는 의견이 당시 국보위 및 김재익 경과위원장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국보위의 생각과는 다르게 자동차와 발전설비의 일원화를 둘러싼 현대와 대우의 대립은 막강한 국보위로서도 녹록치 않은 문제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신병현 상공장관이 최후통첩을 했으나 정 회장이 정부가 제시하는 단일화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끝까지 굽히지 않은 것이다.

이 자리에서 신 장관은 “정 그렇다면 할 수 없다. 갈 데까지 가다가 쓰러지도록 하는 수밖에, 정부도 자유경쟁 원래를 배제할 생각은 없다”며 불간섭 방침을 선언했다. 일이 잘못돼 부도가 나더라도 정부를 원망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당시 정권을 잡으려던 국보위의 생각은 달랐다. 기업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우여곡절 끝에 1980년 8월 20일 국보위는 중화학투자조정안을 확정 발표하게 된다. 하지만 5공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도 이 문제는 시빗거리로 계속 등장하게 된다.


국보위, 힘으로 밀고 나오다


1980년 8월 이 문제가 아직도 마무리되지 못하자 기업들의 저항에 국보위가 힘으로 물어 붙이기 시작했다.

이장규 전 중앙일보 편집국장이 저술한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에 따르면 당시 “국보위로부터 출석하라는 통고를 받았는데 올 때 꼭 도장을 지침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갔더니 대뜸 ‘이 방이 무슨 방인 줄 아느냐. 삼성그룹의 사주가 TBC를 내놓겠다고 도장을 찍은 방이다’라며 을러댔다”고 당시 현대건설 출신이자 전 이명박 대통령의 증언을 담고 있다.

당시 국보위가 내린 결론은 결국 발전설비와 자동차산업을 일원화한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국보위는 현대와 대우로 하여금 택일하게 하는 쪽으로 단안을 내렸다.

발전설비의 경우 현대양행의 창원공장과 조선을 포함한 옥포종합기계공단을 하나로 합치는 한편 자동차는 현대와 새한을 합치되 기아는 승용차 생산을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국보위에서는 현대가 발전설비를 선택할 것이고, 대우가 자동차를 맡게 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간 현대가 가장 강력하게 일원화 투자조정에 반대해 선택권을 먼저 줄 경우 당연히 발전설비를 택하게 된다는 것.

현대는 이미 발전설비 및 건설중장비 분야에 상당한 투자를 해놓고 있는 데다 이 사업을 맡을 경우 정부가 발주를 보장해주기 때문에 사업성도 자동차 보다 나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정주영 회장, 자동차 택한 이유?


하지만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돌아갔다. 김 회장의 양보로 선택을 먼저 하게 된 정 회장이 발전설비 대신 자동차를 선택한 것이다. 황당해진 대우의 입장은 물론이고 당시 국보위로서도 얕잡아 보던 ‘장사꾼’에게 일격을 당한 셈이었다고 전해지는 것도 이런 이유다.

현대관계자는 당시 “기본적으로 자동차는 고정생산 업종인 반면 발전설비는 주문생산 업종이다. 또한 현대로서는 창원 현대양행을 내놓는다고 해도 현대중공업이 있으므로 세상이 조용해지고 나면 언제라도 다시 발전설비를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자동차는 한 번 내놓으면 끝이다. 더구나 자동차산업의 장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코웃음을 쳤지만 현대로서는 확인이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현대가 자동차 선택에 있어서는 결국 한 수를 먼저 읽었던 셈이다.


이후 상황은 꼬여갔지만 결국 정 회장의 ‘자동차’ 선택이 결국 옳았음을 보여주는 일들이 발생하게 된다. 자동차의 경우 GM과의 합작 문제가 난항을 겪었는데 현대가 자동차를 일원화해서 맡는다고 하더라도 GM과의 합작은 당연하다고 봤다.

또 GM은 동등한 지분과 경영 참여를 요구했고 당시 상공부는 ‘당사자간의 협의’를 원칙으로 ‘공’을 현대로 넘겼다. 이에 대해 현대는 어림없는 소리라고 끝까지 버텨 GM과의 관계는 깨졌고 자동차산업의 일원화 정책은 사실상 사라졌다.

왕 회장의 자동차에 대한 선택이 끝내 옳았음을 보여주는 역사의 ‘그 시절’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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