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7년만의 외출’ 마릴린 먼로를 있게 한 구두

[스페셜경제=이하림 기자]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봤을 명품(名品). 연간 5조원 규모로 추산되는 국내 명품 시장은 세계 5위권을 기록할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샤넬, 프라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이들 브랜드를 모르는 이들은 없다. 특히 샤넬은 국내에서 ‘샤테크(샤넬과 재테크를 합한 말)’란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정작 샤넬이 나치 스파이였으며, 코드명은 ‘웨스트민스터’라는 사실과 ‘이브 생 로랑’이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였다는 점. 심지어 대부분의 브랜드가 실제 디자이너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도 모른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왕족, 귀족이 소유했던 명품이 아닌 가난했던 코코 샤넬이 스스로 일군 브랜드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스페셜경제>에서는 연간 기획으로 유명 명품브랜드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독자들께 전해주고자 한다. <편집자주>
영화 ‘7년만의 외출’의 가장 유명한 장면, 지하철 통풍구에서 마릴린 먼로가 매혹적으로 하얀 드레스를 날리는 모습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영화 제목을 모르더라도 이 장면만큼은 기억할 정도로 마릴린 먼로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런데 이 장면은 ‘살바토레 페라가모’가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다고 한다. 마릴린 먼로가 자신의 각선미를 살리기 위해 페라가모의 구두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개봉 하자마자 페라가모의 구두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 때 부터가 페라가모 구두가 패션 아이템이 된 순간이다.
하지만 페라가모의 구두를 단순히 패션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다. 패션은 한 순간 유행했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잊혀 졌다가 돌아오기도 해서 어떤 색인지, 어떤 모양인지 등 기술적인 면보다는 감성적인 면으로 접근하게 된다. 그러나 페라가모의 구두는 감성적인 패션보다는 기술적인 부분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설립자 페라가모는 외적인 부분보다는 편안한 신발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과 공을 쏟았다. 뚱뚱한 사람이 신으면 날씬해지는 구두에서부터 소아마비 환자가 신으면 걸음걸이가 똑바르게 변하는 신발까지. 구두장이가 인체해부학을 공부했을 정도라니 이정도면 말 다했다.
오직 편안한 신발만을 위한 노력…‘인체해부학’까지 공부
“아름다움은 모방할 수 있어도 편안함은 모방할 수 없다”
최고의 구두장인 어떻게?
1988년 이탈리아 나폴리 근교에서 14남매 중 11번째로 태어난 실바토레 페라가모는 9살이 되던 해 가정형편이 어려워 성찬식에 신을 신발이 없는 여동생을 위해 처음으로 구두를 제작했다. 이후 이 경험을 계기로 작은 구두점의 견습공으로 일했고, 11살에 나폴리의 한 구두점에서 구두 제작 공정을 배웠다. 2년 후에는 자신의 집 한켠에 여성용 맞춤구두 가게를 오픈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의 나이 고작 13살이었다.
16살에 형제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1919년 캘리포니아 산타 바바라 지역에서 구두 제조 및 수리점을 열었다. 이후 페라가모는 아메리칸 필름 컴퍼니에 카우보이 부츠를 납품하게 되면서 영화 소품용 구두를 제작해 납품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페라가모의 구두 사업은 아메리칸 필름 컴퍼니의 성공과 더불어 번성했다.
미국 경제가 점점 어려워지자 페라가모는 1927년 이탈리아 피렌치로 돌아와 ‘살바토레 페라가모 컴퍼니’를 설립했다.
유명인 이용한 똑똑한 홍보
1010년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후 할리우드 영화 제작에 사용될 구수 소품을 제작한 페라가모는 할리우드 여배우들과 인맥을 형성했고, 이들을 위한 개인용 수제화를 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의 구두를 신은 대표적인 배우는 마를린 먼로다. 영화 ‘7년만의 외출’에서 지하철 통풍구 바람에 스커트가 올라가는 장면은 마를린 먼로 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이다. 당시 마를린 먼로가 신고 있던 하얀 샌들이 바로 페라가모가 만든 신발이었다.
이밖에도 페라가모는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여주인공 주디 갈란드의 레인보우 플렛폼 슈즈를 제작했고, 오드리 헵번, 에바 가드너, 로렌 바콜, 소피아 로렌을 위한 수제화도 직접 만들었다.
이처럼 페라가모는 당대 최고 여배우들을 위한 수제화를 제작함으로써 그들을 선망하는 여성 소비자들에게 간접적으로 제품을 홍보한 것이다.
편안함을 위한 장인정신
어린 시절부터 맨발로 두터운 카펫 위를 걷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구두를 만들고 싶던 페라가모. 미국 신발공장에서 똑같은 신발이 순식간에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그것은 지옥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페라가모는 편안함을 중요시 여겼다. 이를 위해 페라가모는 실제 캘리포니아에서 인체해부학을 공부하면서 편한 신발을 위해 노력했다.
페라가모는 똑바로 서 있을 때 4cm 정도의 발 중심 면적에 체중이 쏠린다는 것을 발견해 이를 신발 제작에 반영, 좀 더 편안한 신발을 고안해 관련 특허를 취득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페라가모는 착용자의 발에 꼭 맞는 신발을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발 모양을 본뜬 수백 가지의 목각 발본을 보관해 왔다.
이 같은 페라가모의 장인정신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그는 말했다. “아픔다움을 모방할 수는 있지만 편안함을 모방할 수는 없다.”
남다른 창조열정
장인정신 뿐만 아니라 페라가모의 창조에 대한 열정 또한 유명하다.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당대의 트렌드세터였던 비스콘티 데모토로네 후작부인으로부터 구두를 만들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라 구두 힐 제작에 필요한 강철이 부족했고, 페라가모는 ‘라피아 코르크’라는 재료를 발견했다. 이때 페라가모는 코르크 조각으로 밑창과 힐 사이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풀로 붙여 구두를 만들었다. 현재 패셔니스타 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사랑받고 있는 웨지힐은 이때 최초로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페라가모는 낚싯줄로 큰 물고기도 낚을 수 있다는 직원의 말을 듣고 발과 발목 주위에 낚싯줄에 쓰이는 투명한 나일론 펠라민트를 엮어 신발을 만들었다. 당시 제작된 것이 언비저블 샌들로 구두를 신었을 때 구두 위쪽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영어로 ‘보이지 않는’이라는 의미의 ‘비저블(Invisible)’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페라가모는 브랜드 설립 초기에 신발 제작에 인체해부학을 적용하기도 하는 등 창조적인 노력을 기반으로 살아생전 350여개 이상의 신발 관련 특허를 취득했다. 1950년대에는 ‘페라가모의 창조’라는 로고를 사용해 브랜드의 창조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지난 1997년 1월 20일 ‘페라가모코리아’를 설립했으며 Salvatore Ferragamo S.p.A 80%, Ferrinch Ltd.가 20%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페라가모의 2012년 한국 매출은 984억원, 2013년 매출은 1119억원(2013년 분기보고서 기준)을 기록했다.


살바토레 피라가모가 지난해 10만개 이상의 짝퉁 제품을 적발하며 ‘짝퉁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페라가모는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판매되는 9만여점의 짝퉁 제품의 판매를 중지시켰으며, 1만여점은 압수·폐기했다.


이처럼 적극적으로 짝퉁 단속에 나서는 명품 업체들은 드물다. 세계관세기구(WCO)에 따르면 유럽 명품 브랜드의 짝퉁시장 규모는 연 75억달러(약 8조40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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