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반 재계 순위 7위‥전두환 전 정권에게 ‘밉보였다’ 평가

[스페셜경제=조경희 기자]지금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지만 국제그룹은 한때 국내 재계순위 6위를 기록할 정도로 거대한 재벌기업이었다. 다만 재계 7위에 해당하는 대기업이 공중분해 되면서 이를 전두환 전 정권에 밉보여 사라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어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게 한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21개의 계열사를 거느렸던 대기업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조각 조각난 계열사를 동국제강(연합철강), 극동건설(국제상사 건설부문, 동서증권), LS네트웍스(합일합섬) 등이 떠안는 등 만만치 않은 후폭풍을 불러 일으켰다.

부실기업 정리가 사실상 타 기업에게 ‘기회’를 준 것인데, 이 기회 자체가 정권과의 ‘유착’을 통해 이뤄지면서 국제그룹 입장에서는 결과적으로 ‘뼈아픈’ 일이 됐다.

국제그룹 양정모 회장은 이후 그룹 복원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펼쳤고, 지난 1993년 7월 정부에 의한 국제그룹 강제해체는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을 받았지만 그룹을 되찾지 못하고 지난 2009년 타계했다.


국제그룹은 지난 1947년 설립됐지만 지난 1985년 해체되면서 사라진 재벌 기업이다. 최근 대우그룹 김우중 전 회장이 “대우그룹 해체는 정부의 유동성 규제가 직접 계기가 됐다”며 대우그룹 해체가 합당했는지 명확히 밝혀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라진 기업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국제그룹 역시 비슷하다. 다만 대우그룹은 DJ 정부 시절 벌어진 일이었다면 국제그룹은 당시 서슬 퍼런 군사정권 아래에서 벌어졌다는 차이가 있다.

1980년 당시 재계 6위에 해당할 정도로 거대한 기업이 어떻게 해체됐는지를 두고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고 있다. 이중 무리한 기업 확장과 해외 공사 부실 등이 한 가지의 이유로 꼽히는데 정권에 소위 ‘찍혔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정치자금이 타 기업들에 비해 적다는 등의 이유로 전두환 정권에 밉보였다는 것이다.


재벌모금으로 탄생한 ‘일해재단’


국제그룹에 해체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3년 전두환 대통령이 미얀마 방문 당시 전 대통령의 암살을 시도한 북한의 폭탄 테러가 발생한다.

이후 정부는 순직한 희생자들의 유족에 대한 지원과 장학 사업을 목표로 1983년 12월 일해재단(日海財團)을 발족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호를 따라 일해로 붙였고 5공 비리의 하나로 지목되자 현재는 세종연구로 개칭한 상태다.

당시 정부는 이 재단을 설립하면서 최순달 전(前) 체신부장관, 정수창 대한상공회의소 의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구자경 럭키금성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최종현 선경그룹(SK그룹) 회장,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 등 국내 정상급 재벌 그룹 회장을 망라하는 7명을 발기인으로 했다.

이들 재벌들은 12월 14일 재벌모금 23억 5,000만 원을 아웅산 피해자들에게 배분하여 위로금 지급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기금은 계속 강제로 기부됐고 1988년 13대 총선 이후 일해재단은 ‘새세대육영회’와 함께 5공비리의 대표적 사건으로 취급되어 5공비리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대상이 됐다.

5공비리 특별조사위원회는 이 재단이 1984년에 185억 5,000만 원, 1985년에 198억 5,000만 원, 1986년에 172억 5,000만 원 그리고 1987년에 42억 원 등 총 598억 5천만 원의 기금을 조성했다고 발표했다. 모금과정에서 강제성이 있었다는 의문이 강하게 제기되었는데 전 국제그룹 회장 양정모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


부실기업 정리 수순?


당시 전두환 정권은 부실기업 정리를 비공개로 진행해 왔다. 당시 국제그룹은 부채비율이 964%이고 단기 회사빚은 5500억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일종의 신종 사채로 증권회사가 취급했던 완매채를 통해 빌려 쓰고 있던 돈이 800억원에 이르렀다. 하지만 정부가 이를 규제하자 국제 자금난은 빠르게 악화됐다.

전두환 정부는 당시 일해재단을 설립하면서 정치자금을 받기 시작하는데 강제성을 띄었을 뿐만 아니라 금액이 적을 경우 ‘타깃’이 됐다는 루머도 있었다.

특히 국제그룹은 전두환 정부가 재벌총수들을 소집해서 만찬을 여는데 부산이 기반인 양정모 회장이 사고가 생겨 늦게 도착하고 정치자금을 ‘어음’으로 내는 등 정권에 밉보일만한 행동을 여러 번 했다는 것이다.

또 총선에서 김영삼을 비롯한 야당 세력이 승리를 거두고, 부산 지역에서 신민당 의원들이 거의 모든 선거구에서 승리를 하면서 부산에서 ‘선거’를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를 바랐던 양 회장이 소극적으로 행동하자 국제그룹을 공중분해 시킨 것이다.

재계 7위 국제그룹이 해체되는 데에는 2월 총선 결과가 나오고 나서 단 2일, 완전 해체가 발표될 때 까지는 1주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도산 결정을 주도했던 김만재 전 재무장관은 국회 증언에서 “1안으로 국제상사만 남기고, 2안으로는 모두 제3자에게 인수시키는 방안 등이 있었다. 당시 청와대 보고 때 2안의 건의했고 나머지는 전 대통령이 모두 결정했다”며 사실상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결정했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양정모 회장, 실의에 빠져 타계


이 과정에서 국제그룹 부실과는 거리가 멀었던 알짜배기 계열사들이 정치자금을 통해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기업들이 거의 무상으로 불하가 이뤄졌다는 평가 또한 받고 있다.

신발 사업 부문을 담당하던 그룹 지주회사격인 국제상사를 비롯한 하얏트 호텔 등은 한일그룹에, 건설부문은 극동건설에 넘어갔다. 연합철강 또한 극동제강이 인수했다.

2003년에서야 양정모 회장이 법원으로부터 국제그룹이 해체당한 것이 강압에 의한 것이다“라고 인정받게 되었으나, 당시 강탈당한 그룹계열사들이 다른 기업으로 넘어간 지 너무 오래 되어 다시 소유권을 반환하는 것은 무리라는 취지의 판결을 받게 된다.

결국 국제그룹은 영영 돌이킬 수 없는 허상으로 남게 되었고, 양정모 회장도 결국 실의에 빠진 채 2009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지난 1988년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5공 청산 청문회에 출석해서 이런 말을 남겼다. “국제그룹 해체를 보고서 정치자금 액수를 두배 이상 올렸다”라고.

정경유착은 우리 경제를 관통하는 악습 중 하나다. 특히 국제그룹을 통해 정권에 밉보일 경우 한 때 3만명 이상의 종업원을 가진 기업이라고 하더라도 공중분해 되는 것은 단 며칠도 걸리지 않는다는 씁쓸한 사례를 남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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