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에 디올 수석 디자이너’…“천재를 알아봤다”

[스페셜경제=이하림 기자]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봤을 명품(名品). 연간 5조원 규모로 추산되는 국내 명품 시장은 세계 5위권을 기록할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샤넬, 프라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이들 브랜드를 모르는 이들은 없다. 특히 샤넬은 국내에서 ‘샤테크(샤넬과 재테크를 합한 말)’란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정작 샤넬이 나치 스파이였으며, 코드명은 ‘웨스트민스터’라는 사실과 ‘이브 생 로랑’이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였다는 점. 심지어 대부분의 브랜드가 실제 디자이너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도 모른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왕족, 귀족이 소유했던 명품이 아닌 가난했던 코코 샤넬이 스스로 일군 브랜드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스페셜경제>에서는 연간 기획으로 유명 명품브랜드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독자들께 전해주고자 한다. <편집자주>
“내가 청바지를 발명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자주 말하고는 한다. 가장 획기적이고, 실용적이고, 무심한 듯하면서도 차분하다. 청바지에는 내가 나의 옷에서 바라는 모든 표현들이 담겨 있다. 단정함, 성적인 매력, 그리고 단순함까지”
“브래지어를 태우는 시대” 여성 해방 트렌드 읽어내
최초 시스루룩 선봬‥엘레강스에서 스트릿 패션까지
프랑스 패션사업을 중심으로 이끈 크리스찬 디올, 코코 샤넬과 함께 20세기 패션 아이콘으로 불리는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그는 남성의 상징으로만 여겨지던 턱시도를 여성의 아이템으로 탈바꿈 시켜 보수적이었던 여성복에 자유를 입힌 패션혁명가이자 부유층의 소유물이었던 오뜨 꾸뛰르(주문복 의상점)를 대중화시킨 선구자라고 불린다.
‘디올’의 수석디자이너 어떻게?
1936년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알제리 오랑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브 생 로랑은 연극 ‘아내들의 학교’를 보고 감명 받아 무대의상을 직접 만들어보며 디자이너에 대한 꿈을 키웠다. 17세가 되던 해 그간 디자인한 의상 스케치를 국제양모사무국의 다자인 콘테스트에 제출했고 3등을 차지했다.
시상을 위해 파리에 간 이브 생 로랑은 당시 ‘보그’ 프랑스판의 편집장인 미셸 드 브루노프를 만났고, 1955년 이브 생 로랑은 미셸 드 브루노프에게 자신의 새로운 스케치를 보여준다. 그녀는 이 스케치가 아직 발표도 하지 않은 크리스찬 디올 F/W(가을, 겨울) 컬렉션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즉시 이브 생 로랑을 크리스찬 디올에게 보낸다.
크리스찬 디올은 이브 생 로랑의 스케치를 보고 그 자리에서 어시스턴트 디자이너로 채용했고, 이브 생 로랑은 향후 크리스찬 디올이 가장 많이 의지하고 조언을 구하는 디자이너로 성장하게 된다. 1957년 크리스찬 디올의 F/W 컬렉션에서 이브 생 로랑이 디자인한 의상이 35벌에 달할 정도로 디올에서 이브 생 로랑의 영향력은 컸다. 이후 1957년 10월, 크리스찬 디올이 심장마비로 급작스럽게 사망하고 이브 생 로랑이 불과 21세의 나이로 크리스찬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가 된다.
이브 생 로랑은 디올에서의 첫 컬렉션 ‘트라페즈 라인’을 선보여 호평을 받았지만, 같은 해 두 번째 컬렉션에 과감한 디자인으로 보수적인 중년층에게 혹평을 받았다. 이렇게 호평과 혹평을 번갈아 가며 받던 이브 생 로랑은 경영진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1960년 여섯 번째 컬렉션에서 젊은 사람들의 스트리트 패션에서 영감을 받은 ‘비트 룩’을 선보이며 디올의 주 고객인 보수층에게 외면 받는 사태까지 이르게 됐다. 결국 크리스찬 디올 하우스는 이브 생 로랑을 군에 보냄으로써 디올의 수석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1961년 이브 생 로랑은 그의 동성 연인이었던 피에르 베르제와 함께 이브 생 로랑 오트 쿠튀르 하우스를 론칭한다. 이것이 ‘생 로랑’ 브랜드의 탄생이다.
예술과 패션의 만남…‘몬드리안 드레스’
이브 생 로랑을 패션계에 두드러지게 한 것은 그의 ‘몬드리안 컬렉션’의 영향이 크다. 1965년 F/W 컬렉션에 선보여진 몬드리안 드레스는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의 ‘빨강 노랑 파랑의 구성’과 같은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 당시 패션잡지 ‘하퍼스 바자’는 몬드리안에 대해 “미래의 드레스-빳빳한 흰 저지 소재로 뚜렷하게 특정돼 있고, 체형을 멋지게 나타내도록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드레스”라고 평했다. 몬드리안 드레스는 패션 잡지 역사상 가장 많이 촬영된 옷으로 기록될 정도로 당시 패션계에서는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브 생 로랑은 ‘니키 드 생 팔르’와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팝아트 컬렉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또 조각가 ‘클로드 라란느’와 협업해 조젯 크레이프 소재로 만든 우아한 롱 드레스에 청동으로 형태를 딴 가슴 혹은 허리 조각 작품을 옷에 달았다.
아울러 1979년 F/W 시즌에 ‘파블로 피카소 오마주’ 컬렉션을 선보였고 1980년에는 ‘기욤 아폴리네트’와 ‘장 콕도’, 1981년 ‘앙리 마티스’와 ‘페르낭 레제’, 1987년 ‘데이비드 호크니’, 1988년 ‘조르주 브라크’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컬렉션에 꾸준히 도입해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1988년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넣은 재킷은 해바라기 문양에 35만개의 스팽글과 10만 개의 자개가 들어갔으며 수를 놓는데 600여 시간이 소요돼 관심을 받았다.
여성 해방의 상징 ‘시스루’
이브 생 로랑의 업적은 단순 패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여성과 시대의 요구를 완벽히 읽어냈으며, 여성들을 존경했고 그들의 몸과 생활에 봉사하기 위해 일한다고 말할 정도로 여성에 관심이 많았다.
이 같은 이유로 이브 생 로랑은 1968년 시스루 룩을 최초로 발표했다. 당시는 페미니스트들은 브레지어처럼 여성을 억압하는 속옷을 태우는 등 여성 인권 신장에 목소리를 높이던 때였다. 이때 이브 생 로랑은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채 가슴이 다 비치는 파격적인 시스루 룩을 선보여 페미니스트들에게 ‘여성 해방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브 생 로랑에 의해 탄생된 시스루룩은 현대 패션에서도 다양하게 활용되며 유명 셀럽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 유행이 되고 있다. “유행은 사라지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라는 이브 생 로랑의 말은 그의 시스루룩을 보면 이해될 법 하다.
이브 생 로랑이 사랑한 ‘르 스모킹’
19세기 턱시도는 신사들만 즐겨 입는 옷이었다. 이브 생 로랑은 영화 ‘모로코’의 여주인공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남성용 턱시도를 입은 매혹적인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여성을 위한 턱시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르 스모킹은 1966년 F/W 컬렉션에 소개되면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당시 프랑스 판탈롱 법에 의해 공공장소에서 여성들은 바지 착용이 금지 됐었고, 그런 여성들에게 어디에서든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르 스모킹은 이브 생 로랑의 패션 인생에서 가장 큰 의미를 가지며, 그가 가장 사랑한 옷이기도 하다. 이브 생 로랑은 “만약 내가 디자인한 모든 것 중에 단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것은 르 스모킹일 것이다”라고 말했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2002년 1월22일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진행된 이브 생 로랑의 마지막 은퇴 패션쇼에 선 100여명의 모델들은 마지막 피날레에서 이브 생 로랑 최고의 걸작인 르 스모킹을 입고 런웨이를 장식하기도 했다.
프랑스 디자이너 크리스찬 라크루와는 이브 생 로랑을 이렇게 평했다. “샤넬의 형식, 디올의 풍부함, 엘자 스키아 파렐리의 재치를 겸비했다.”
여성에게 자유를 입힌 혁명가이며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낸 이브 생 로랑은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줬으며 과거에도, 미래에도 패션계에서 전설로 기억될 것이다.




생로랑은 지난 2013년 1월 1일 ‘입생로랑코리아’로 구찌그룹코리아주식회사의 생로랑 브랜드 사업부분이 인적분할돼 설립됐으며, Kering Holland N.V.가 100% 지분을 가지고 있다.
생로랑의 2013년 한국 매출은 2244억원(2013년 분기보고서 기준)을 기록했다.

사명변경 논란 이어져
지난 2012년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브랜드 ‘이브 생로랑(YSL)’이 브랜드명을 ‘생 로랑 파리(SLP)’로 변경했다. 그해 3월 새롭게 브랜드를 맡게 된 디자이너 에디 슬리먼이 이미지를 새롭게 한다는 이유로 바꾼 것.
당초 브랜드 명을 통째로 SLP로 바꾸려고 했지만 이브 생 로랑의 전통과 역사를 기리기 위해 레디투웨어(RTW)라인만 ‘생 로랑 파리’로 변경하게 됐다. 이에 따라 화장품과 일부 액세서리는 그대로 YSL 브랜드를 사용한다.
일각에서는 “싸구려 호텔 체인 이름 같다” “창의성 제로 전략”이라는 혹평도 나왔지만, 반면 “생 로랑과 슬리먼의 절묘한 결합” “전통을 간직한 활력 넘치는 이름”이라는 반응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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