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한 가죽 대신→캔버스천 승부수 ‘GG캔버스 탄생’

[스페셜경제=이하림 기자]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봤을 명품(名品). 연간 5조원 규모로 추산되는 국내 명품 시장은 세계 5위권을 기록할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샤넬, 프라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이들 브랜드를 모르는 이들은 없다. 특히 샤넬은 국내에서 ‘샤테크(샤넬과 재테크를 합한 말)’란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정작 샤넬이 나치 스파이였으며, 코드명은 ‘웨스트민스터’라는 사실과 ‘이브 생 로랑’이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였다는 점. 심지어 대부분의 브랜드가 실제 디자이너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도 모른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왕족, 귀족이 소유했던 명품이 아닌 가난했던 코코 샤넬이 스스로 일군 브랜드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스페셜경제>에서는 연간 기획으로 유명 명품브랜드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독자들께 전해주고자 한다. <편집자주>
루이비통, 에르메스에 이어 명품 브랜드가치 세 번째(161억3100만 달러, 밀워드브라운 리서치 자료)를 차지할 정도로 전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브랜드. 2007년 닐슨사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갖고 싶은 럭셔리 브랜드’는 어디일까. 바로 꾸준하게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브랜드 ‘구찌’다.
일본에서 구찌는 약 몇 십년 전만해도 예쁜 여자가 지나가도 “구찌”, 좋은 물건이라면 구찌의 제품이 아니라도 “구찌”라고 표현할 정도로 좋은 것을 지칭할 때 사용됐다고 한다. 그만큼 명품의 대명사라는 의미다.
이처럼 위대한 명품임에도 불구하고 구찌는 대부분의 명품들과는 달리 화려하기 보다는 단순하다. 이는 1990년부터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았던 디자이너 ‘톰 포드’의 “모든 화려한 것들을 표현하는 최우선 요소는 편안함과 심플함”이라는 패션 철학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그는 “73세의 구찌를 23세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구찌 브랜드에서는 혁신적인 디자이너였다.
하지만 톰 포드가 있기 이전의 구찌 또한 위대했다. 현재까지도 많은 셀러브리티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뱀부 백’, 진정한 패셔니스타 라면 꼭 하나는 가지고 있다는 ‘호스빗 로퍼’, 스타뿐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GG캔버스’ 등은 모두 1940~1950년대에 탄생했다. 또한 전쟁으로 무너질 수 있었지만 그 위기를 기회로 잡아 더 큰 성공으로 일으켰다.
승마용품에서 패션까지
1881년 ‘구찌오 구찌’는 이탈리아 중부 플로렌스에서 밀짚모자를 만드는 집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구찌는 밀짚모자 제조사업이 경제 성장으로 쇠퇴해갈 것이라고 내다보고 당시 전 세계의 부자들이 모이던 런던의 사보이 호텔로 갔다. 그곳에서 벨보이로 일하던 그는 귀족들이 들고 다니던 최고급 가방에 매혹됐고 1902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가죽 전문 업체인 Franzi에서 가죽공정을 배운다.
1921년 구찌는 피렌체에 있는 비냐 누오바 거리에 자신의 이름을 딴 첫 번째 가죽전문매장을 열었고, 같은 해 빠리오네 거리에 두 번째 매장을 오픈하며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초창기에 구찌는 영국 귀족 스타일에 섬세한 가죽 가공으로 장갑 및 부츠와 같은 승마 용품을 중심으로 만들었다.
1931년 구찌는 상류층의 스포츠인 승마가 대중화되면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이후 마차 활용도가 줄어들면서 다양한 제품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에 구찌는 1937년 가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작업장을 확장해 핸드백, 트렁크, 장갑, 신발, 벨트 등 생산 제품을 대중화 했다.
전쟁, 그리고 혁신
2차 세계대전 당시 구찌는 도약의 시기를 맞는다. 전쟁으로 인해 부족한 가죽을 대신해 만든 캔버스천 가방이 히트를 치며 구찌의 이름을 전 세계적으로 알렸다. 이 때 탄생한 구찌의 ‘디아만테 캔버스’와 ‘GG캔버스’는 구찌의 첫 시그니처 제품이 됐다.
전쟁이 끝났지만 이탈리아의 물자 상황은 여전히 어려웠고, 외국 자제의 공급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수많은 이탈리아 가죽 업체가 도산했지만 구찌는 일반적인 가죽 대신 돼지피혁을 활용해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았다. 또한 유일하게 수입이 가능했던 일본산 대나무로 가방을 만들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뱀부백 이다.
13시간 가량 대나무에 열을 가해 둥근 형태로 구부린 것은 말 안장의 곡선적 형태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승마 용품에서 영감을 받은 초창기 구찌의 디자인 특성을 그대로 갖췄다. 뱀부백은 귀족과 유명인사의 애장품으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구찌를 최고의 브랜드로 만들었다.
구찌의 상징, ‘더 웹’
세 가지 컬러가 조화된 구찌의 더 웹은 1951년 말 등에 안장을 고정시킬 때 사용하는 캔버스 띠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 ‘그린-레드-그린’ 컬러 조합이 기본으로 흔히 ‘GRG’라고도 불린다. 또 이를 응용한 ‘블루-레드-블루’ 컬러 조합도 생겼는데 이는 ‘BRB’라고 불린다.
GRG 더 웹은 오랜 세월에 거쳐 광범위하게 사용돼 왔다. 1950년대에는 여행가방, 1961년에는 재키 백, 1970년대에는 A라인 스커트에 자주 사용됐고 프린트나 가죽 패츠워크로도 변형됐다. 1961년에 처음으로 선보인 GG 로고와 더불어 구찌의 제품임을 한눈에 각인시키는 구찌의 홀마크(Hallmark, 품질보증마크)로 사용됨과 동시에 특유의 스포티한 분위기로 구찌의 젊고 세련된 감각을 상징하며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영부인이 사랑한 ‘재키 백’
1950년대 구찌가 출시한 둥근 모서리의 숄더 백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 리타 헤이워드(Rita Hayworth), 브릿 에클랜드(Britt Ekland) 등 당대의 여배우뿐만 아니라 소설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등 남성도 즐겨 메곤 했다.
그 중에서도 이 가방을 가장 빛나게 해준 주인공은 존 F.케네디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다. 그녀는 오드리 햅번, 그레이스 켈리와 같은 당시 스타일 아이콘으로 꼽혔다. 지방시와 프랑스 풍의 패션을 좋아하며 세련된 취향을 갖고 있던 그녀의 패션은 어딜 가나 주목받았다. 그런 그가 가장 사랑한 가방이 바로 구찌의 ‘재키 백’이다.
그녀는 공식석상은 물론 개인적인 모임에까지 이 백을 자주 들었고, 이로써 이 가방이 재키 백으로 불리게 됐다. 이후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트 프라다 지아니니는 2009년 재키 백을 ‘뉴 재키 백’이라는 이름으로 재해석해 선보이기도 했다.
신발의 대명사, 호스빗 로퍼
1953년 승마용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구찌의 대표 신발이다. 독특한 장식을 발등에 달아 클래식한 분위기를 연출했던 호스빗 로퍼는 클라크케이블, 존웨인, 프레드아스테어 등 당대의 최고스타들이 즐겨 신으며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특히 1959년 칸의 호텔 테라스에서 알랭 들롱이 호스빗 로퍼를 신고 여배우 로미 슈나이더와 함께 있는 사진은 이 신발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1985년 메트로폴리탄뮤지엄에 ‘디자인과 크래프트맨십의 패셔너블한 시도’라는 제목으로 영구 전시됐을 정도로 클래식 아이템의 대명사가 됐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끊임없는 사랑을 이어받고 있는 구찌. 많은 사람들이 구찌라는 브랜드에 열광하고 찬사를 보내는 이유는 항상 대중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노력과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박스기사

구찌는 보테가 베네타, 생 로랑, 알렉산더 맥퀸, 발렌시아가 등의 브랜드들과 함께 ‘케링그룹’에 속해 있다. 1998년에 구찌 코리아를 설립했으며 국내에서 23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구찌 코리아의 2012년 매출은 2558억원, 2013년 매출은 2420억원(2013년 분기 보고서 기준)을 기록했다.


구찌는 최근 글로벌 경제 침체 우려에 따른 판매 감소로 인해 경영진 2명을 교체하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이에 따라 파트리지오 디마르코 구찌 최고경영자(CEO)가 올해 1월 1일자로 자리에서 물러나며, 후임으로는 마르코 비자리 현 명품 분과 총괄이 내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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