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창성으로 가업을 일으킨 ‘미우치아 프라다’

[스페셜경제=이하림 기자]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봤을 명품(名品). 연간 5조원 규모로 추산되는 국내 명품 시장은 세계 5위권을 기록할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샤넬, 프라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이들 브랜드를 모르는 이들은 없다. 특히 샤넬은 국내에서 ‘샤테크(샤넬과 재테크를 합한 말)’란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정작 샤넬이 여성 해방의 아이콘이라거나 이브 생 로랑이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였다는 점. 심지어 대부분의 브랜드가 실제 디자이너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도 모른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왕족, 귀족이 소유했던 명품이 아닌 가난했던 코코 샤넬이 스스로 일군 브랜드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스페셜경제>에서는 연간 기획으로 유명 명품브랜드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독자들께 전해주고자 한다. <편집자주>


일반인에게는 2003년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라는 소설과 영화로 알려진 ‘프라다’. 패션 매거진의 편집장이 ‘프라다’ 브랜드를 즐겨 입는 것을 빗대며 전반적인 패션과 명품 업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패션업계에서 ‘프라다’가 지닌 명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프라다는 이탈리아 가방 브랜드에서 출발, 현재 직장 여성의 기호에 맞는 아이템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연 매출 3510억여원을 올리며 사랑을 받고 있는 브랜드다. 프라다는 1993년 세컨드 브랜드 미우미우, 1997년 프라다스포츠 등을 론칭 했으며 이후 구찌, 질샌더, 펜디 등을 인수해 명품 브랜드로 성장했다.
과하지 않은, 멋스러운
단순하고 실용적인 느낌이 들지만 도시적인 매력으로 여성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프라다. 청바지에 운동화, 후드티를 입고 샤넬과 에르메스 가방을 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프라다는 가능하다. 프라다는 운동화를 신던 하이힐을 신던 어떤 스타일에도 매치가 잘된다. 가방 하나만으로 옷장 속 어떤 옷들과도 짝을 이룰 수 있는 것이 프라다만의 매력이다. ‘내일 입을 옷에 어떤 가방이 어울릴까’란 여성들의 지긋지긋한 고민을 필요 없게 만들어 버린다. 때문에 프라다는 많은 패션인들에게 이렇게 표현된다. “아름답게 소박하고, 소박하게 아름답다”
아름답게 소박하고, 소박하게 아름답다
고급가죽 사이에서 최고가 된 나일론 가방
현재의 프라다는 최고의 성장세를 올리고 있지만 그 시작은 1913년 이탈리아 밀라노에 가죽제품 판매 상점으로 시작했다.
프라다는 마리오 프라다와 그의 동생 마티노 프라다와 함께 1913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가죽제품을 판매하는 ‘프라텔리 프라다’를 개설하면서 시작됐다. 프라다의 창시자인 마리오 프라다는 초기에 가죽제품과 영국에서 수입한 핸드백 트렁크 가장을 판매했다. 세계를 누비며 발견한 진귀한 물건들과 희귀한 동물의 가죽 등 가죽소재에서 접목할 수 있는 소재를 수입하며 사업에 열정을 쏟았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1920~1930년대 전성기를 누리며 밀라노 부유층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고, 1919년에는 이탈리아 왕실에 가방을 납품하는 브랜드로 공식 지정됐다. 이때 오늘날까지 프라다의 상징으로 쓰이는 로고를 왕가로부터 수여받았다.
가업을 일으킨 ‘미우치아 프라다’
프라다가 이처럼 승승장구를 이어가고 있던 가운데 세계 1, 2차 대전과 함께 시계적인 경기 침체기와 대공황으로 프라다 상점은 위기를 맞게 된다. 결국 1958년 마리오 프라다가 세상을 뜨고, 그의 딸인 루이자 프라다가 물려받지만 별다른 히트상품을 내놓지 못한 채 거의 파산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때 프라다를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 반열에 올려놓은 주인공 미우치아 프라다가 등장한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프라다의 창시자인 마리오 프라다의 막내 손녀딸로 1949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공산당원 이었고, 밀라노대학에서는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여성 권리를 위한 운동을 벌이는 등 패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디자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던 그녀가 프라다에 들어오게 되면서 놀라운 잠재력을 발휘하게 된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28세의 나이에 기울어져가는 프라다를 떠맡아 부띠끄 2곳의 운영을 책임지게 됐다.
‘포코노 나일론’ 백의 탄생
이후 그녀는 오늘날의 프라다를 있게 한 혁신적인 제품을 선보이는 데, 바로 포코노 나일론으로 만든 백팩이다. 포코노 나일론 소재는 그녀의 할아버지인 마리오 프라다가 트렁크를 감싸 보호하는데 썼던 소재였다. 고급가죽가방이 대세이던 시대에 포장용이나 캠핑텐트, 낙하산으로만 쓰이던 투박한 소재로 만든 가방은 가히 혁신적이었다.
튼튼하고 심플하면서 어떤 옷과 상황에서나 어울리는 가방에 대중들은 열광했다.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프라다 가방과 배낭은 90년대에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당시 프라다 가방 하나 없으면 패션을 모른다고 할 정도였다. 이 때 프라다 나일론 백은 프라다 전체 매출의 40%를 차지할 정도였고, 프라다 하면 떠오르게 되는 시그니처 제품과 소재로 자리잡게 됐다.
프라다 부흥의 원동력, ‘모조품’
프라다의 부흥은 한 남자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1977년 6월 국제 가족 박람회에 방문해 프라다 제품의 모조품을 발견한다. 이 모조품을 만든 남성이 바로 훗날 미우치아 프라다의 동업자이자 남편인 파트리치오 베르텔리다. 당시 베르텔리는 프라다의 모조품을 만들어 팔고 있었는데 진품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정교하고 잘 만들어져서 미우치아는 크게 놀란다. 이를 계기로 미우치아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베르텔리의 능력을 알아채고 동업을 시작한다.
17세에 가죽제품 사업을 시작한 파트리치오 베르텔리는 미우치아의 사업에 동참하여 기존 제품 스타일의 변화를 가져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베르텔리의 경영 수완과 미우치아의 디자인이 접목된 백팩과 토트백 세트가 출시되고 이는 전 세계 백화점과 부티크로 판매됐다.
똑똑한 마케팅
프라다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최고의 명품이 된 데는 프라다의 똑똑한 마케팅 전략 또한 큰 몫을 했다. 프라다가 나일론 백으로 대박을 터트린 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책과 영화로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책으로 먼저 흥행한 이 제목은 영화로도 큰 인기를 얻었고 대중들에게 명품이란 이미지를 심는다. 영화가 제작될 당시 미우치아 프라다는 무려 2000벌에 달하는 옷을 제작해 영화에 지원했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러한 열정이 있었기에 지금의 브랜드 이미지를 얻게 된 것이다.
프라다는 그 시점에 책과 영화뿐만 아니라 핸드폰 사업에도 손을 뻗는다. 180만원대의 고가의 ‘프라다폰’을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고유 브랜드 가치를 유지하기위해 tv광고는 하지 않았다.
또한 현대와 협업해 ‘제네시스 프라다’를 선보였고, 판매되자마자 100만대 달성이라는 쾌거를 거뒀다.
가방으로 성공을 한 프라다는 여성복라인도 런칭하면서 더욱 크게 발전한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자신의 상황에서 공감이 갈 수 있는 여성복을 디자인했다. 직장과 가정을 모두 돌봐야 하는 여성들의 입장에서 옷을 만들어 더욱 공감을 이끌어냈고, 이것이 가방뿐만 아니라 의류 사업으로도 성공하게 된 비결이다.
명품이라고 해서 꼭 비싼 소재를 사용해야할 필요는 없다. 고급 소재를 이용해야만 명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스타일로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제품을 찾아내는 것이 진정한 ‘명품’ 디자이너다. 명품이라는 타이틀 때문이 아닌, 고급소재 때문이 아닌,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에게 명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명품이 아닐까.
“패션은 자기표현이자 선택이다. 누군가 내게 옷을 어떻게 입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하면 우선 거울을 보고 자신을 연구하라고 말해준다” -미우치아 프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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