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경제=김수영 기자] 법원(法院)은 헌법, 형법, 민법처럼 명문화된 법률이 존재하는 성문법(成文法)과 별개로 관습이나 사회 통념, 판례와 같이 사회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차원에서 우리 법체계는 불문법 역시 인정하고 있다. 오랜 사회적 관념과 관습이 쌓여 곧 법원(法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 당시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내용은 어디에도 규정되어 있지 않음에도 국민 대다수가 서울을 수도로 인식해 왔다는 헌법재판소의 수도이전위헌판결은 관습헌법에 근거하고 있었다.

최근 국회에는 새로운 관례 하나가 똬리를 틀고 있다. 바로 최근 두 차례 진행된 ‘다단계 국회’다. 이 관례에 따르면 특정 법안 통과만을 목적으로 4일짜리 임시국회도 열 수 있는 모양이다.

물론 그래선 안 된다는 규정은 없다. 국회법은 2·4·6·8월 임시국회 및 정기국회 회기만을 규정하고 있을 뿐 여야 합의로 열리는 1·3·5·7월 임시국회 회기에 대해서는 별도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한 차례의 본회의만으로도 숙고의 시간을 거친 법안들은 수백 개도 일사천리 진행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같은 다단계 국회, 쪼개기 국회가 연속으로 일어나는 배경을 살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는 해당 회기 내에서만 유효하며 다음 회기에서 기존 안건에 다시 필리버스터를 신청할 수 없다는 것이 국회법 106조의2에 규정된 내용이다. 이상의 사실을 주지하고 지난해 12월 임시국회 일정을 살펴보면 좀 더 와닿게 된다.
▲ 2019년 12월 국회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법안 처리 일정표.

지난해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된 쟁점법안 3개 중 수사권 조정안을 제외한 선거법과 공수처법은 이렇게 통과됐다. 8일 현재 임시국회는 계속 중이며 민주당은 내일 본회의를 열어 수사권 조정안을 상정한다.

수사권 조정안은 여야가 어느 정도 의견 일치를 보이고 있지만, 이미 선거법과 공수처법 처리 과정에서 분루를 삼킨 한국당은 항의차원으로 수사권 조정안에도 필리버스터를 신청할지 고민 중이다. 이 경우 민주당은 10일 임시국회를 끝내고 13일 새 임시국회에서 수사권 조정안을 표결에 부친다는 시나리오다.

국회 회의 중 여야를 막론하고 자주 등장하는 논리는 ‘당신들도 그랬잖아’다.

지난해 조국 사태 당시 여권을 중심으로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가 문제되자 야권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때는 실컷 이용해먹지 않았느냐”며 맞섰다. 정세균 총리 후보자 청문회 과정에서 자료제출 미흡을 지적하자 민주당은 “황교안 대표가 총리로 올 때도 그랬다”고 반박했다.

이런 주고받기가 이어지다보면 결국 ‘누가 먼저 했느냐’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초선 의원들은 억울할 수도 있다. 말도 안 되는 악습을 자당 선배 의원들이 해왔던 행위라고 한다. 이런 장면을 보고 있자면 ‘네가 먼저 때렸잖아’, ‘난 그렇게 세게 안 때렸어’라며 싸우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든다.

원칙 없이 잘못된 관례가 들어서면 후일 상대방의 똑같은 행동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를 부정하면 ‘내로남불’ 비판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황이 반복되면 ‘니들끼리 손잡고 주고받고 다 해먹어라’는 염세적인 목소리가 나온다. 대한민국 국회 신뢰도가 OECD국가 중 최저수준을 기록한 데에는 이같은 ‘짝짜꿍’도 톡톡히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

민주당은 이번 사안과 관련해 하나의 국회 관례를 만들어냈다. ①임시국회는 일주일 씩 열어도 된다. 문희상 국회의장도 일정 부분 기여한 바 있다. ②회기는 일단 임시국회를 열고 차차 결정해도 된다.

만일 올해 총선에서 한국당이 다수석을 차지하거나, 차기 대선에서 한국당이 집권했을 때 한국당이 ‘관례대로’ 행동한다면 과연 민주당이 여기에 반박할 수 있을까.

한국당이 패스트트랙 법안 논의에 단 한 차례도 참여하지 않은 것은 별개의 문제다. 당초 선거법·공수처법 등 원안이 패스트트랙 지정을 위한 여야4당의 잠정안이었음은 협상 당사자들이 더 잘 알고 있다.

내부 이견 조율을 유도하면서 한국당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이는 것이 첫 번째고, 마지막까지 협상을 거부할 경우 다수결에 부치는 것이 순서였지만, 한국당의 불참을 핑계로 아무 논의 없이 6개월여를 보낸 민주당은 이번 법안 처리 과정에서 이미 두 차례의 선례를 만들어냈고, 세 번째 선례 만들기에 착수했다. 유치원3법까지 고려하면 네 번째 선례가 나올 수도 있다.

최소한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다면 절차라도 제대로 지켜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 대국민 신뢰를 얻고 후환을 없애는 지름길이다.

 

스페셜경제 / 김수영 기자 brumaire25s@sp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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