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소속 이정현 의원이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궁 신무문 앞에서 제21대 국회의원선거 종로구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2020.02.04. (사진=뉴시스)


[스페셜경제=김수영 기자] 과거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전신) 대표를 지낸 이정현 의원이 4일 서울 종로 출마를 선언하며 그 배경에 관심이 모아진다. 얼핏 보아서는 아군의 표를 빼앗는 악수(惡手)로밖에 해석이 되지 않는다.

전남 순천에 지역구를 두고 있는 이 의원은 지난해부터 서울에 출마한다는 입장을 밝혀온 바 있지만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같은 보수진영에서 종로 출마를 고심 중인 상황에 그가 나서 표를 갈라먹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19대 국회부터 정세균 현 국무총리가 이곳을 거점으로 삼으며 다져온 지역이고, 이낙연 전 총리에 대한 여론의 긍정적 반응까지 생각해본다면 이 시점에, 이 의원이, 왜 하필 종로에 출마한다는 건지 심중이 궁금해진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 의원은 미래세대가 이번 총선의 주역이라며 그 젊은이들의 서포터·가이드 역할을 하겠다는 명분을 밝혔다. 물론 부족하다. 종로여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서울 종로는 정세균 총리의 현 지역구로 ‘정치 1번지’로 꼽히는 곳이다. 더불어민주당에서 이낙연 전 총리가 출마를 확정했으며, 그동안 대항마로 여겨지며 전(前) 총리 간 ‘빅매치’ 성사로 관심을 모았던 황 대표는 최근 종로가 아닌 다른 험지 출마를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황 대표가 이 전 총리와의 정면대결을 피하는 데에는 여러 해석이 있으나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은 여론조사 결과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전 총리와 황 대표의 지지율 격차는 2배 이상으로 나타났는데, 두 사람이 유력한 차기 대권후보로까지 거론되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이번 총선이 곧 대선 전초전의 성격을 띠고, 여기서 패배하면 대권 주자로서도 탈락한다는 위기의식의 발로라는 것이다.

빅매치 성사 여부 관심이 고조되던 지난달 정치권에는 민주연구원 자체 조사 결과 이 전 총리가 황 대표에 밀리면서 민주당이 이 전 총리를 다른 곳으로 출마시키려 한다는 말이 돌았다.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은 ‘그런 사실이 없다’며 반박했고, 며칠 뒤에는 여의도연구원 자체조사 결과 황 대표가 이 전 총리에 한참 뒤진다는 정 반대의 소문이 돌았다. 민주연구원과 여의도연구원은 각각 민주당과 한국당의 정책연구소다.

SBS가 지난 2일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해 양자대결 결과를 발표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해당 조사에서 황 대표(26.0%)는 이 전 총리(53.2%) 지지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황 대표의 ‘다른 험지’ 출마설이 나온 것도 여의도연구원 조사 결과 황 대표가 밀린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직후였다.
 

※ 조사대상 : 종로구 유권자 500명, 조사기관 : IPSOS(입소스), 허용오차 : 95% 신뢰수준에 ±4.4%p,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참조.


정치에 입문한지 만 1년 좀 지난 신인에 불과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총리를 지낸 이력으로 보수진영의 성원을 한 몸에 받으며 당대표로 정계에 발을 들이고, 단숨에 대권 주자 명단에까지 이름을 올린 것은 황 대표에게 부담이 아닐 수 없다.

27%p에 달하는 격차는 쉽게 역전시키기 힘든 수치다. 이 전 총리가 이렇다 할 큰 사고 없이 정계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는 점과 총선까지 남은 기간 등을 고려하면 황 대표로서는 아무리 잘해도 박빙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는 첫 원내 진출을 시도하는 황 대표에게는 다소 무리한 행보일 수 있다. 따라서 황 대표는 종로를 포기하고 상대적으로 안전한(?) 험지에서 원내 입성을 시도하는 방법이 최선일 수 있다.
▲ 이정현 무소속 의원이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총선 종로 출마 기자회견을 하기 전 인사를 하고 있다. 2020.02.04. (사진=뉴시스)

하지만 여론과 일부 당내 인사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다. 낙선을 하더라도 당당하게 정면대결을 펼친 뒤 명예롭게 패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황 대표의 패배가 보수진영 결집의 구심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다. 실제 삼국시대 당시 백제와 신라 간 전투에서 신라의 관창은 백제 장군 계백의 결사대와 첫 번째 전투에서 패배해 사로잡혔지만 소년병임을 감안한 계백은 그를 풀어줬다. 그러나 ‘적장의 목을 베지 못했다’며 분기탱천한 관창은 다시 백제군과의 일전에 나섰고, 끝내 목이 베여 돌아온 그의 모습에 외려 사기가 오른 신라군은 백제군을 대파했다. 삼국사기는 황산벌 전투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바로 그 해 백제는 멸망했다).

황 대표는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정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질 수 없다는 자존심인지, 위험부담을 지기 싫은 것인지, 원내 진출에 대한 욕망인지 그 속을 낱낱이 파헤칠 수는 없다.

이 때 이 의원이 구원투수를 자청하고 등장한다. 갈팡질팡하는 황 대표에게 손짓을 하고 있다. ‘겁먹지 말고 종로로 나오라’고.

이 의원과 황 대표가 함께 종로에 출마하게 된다면 보수표가 분산되며 이 전 총리의 당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당연히 이 의원과 황 대표는 낙선이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이 의원의 종로 출마는 병살타인 셈이다.

하지만 황 대표로서는 명분이 생길 수 있다. 표가 갈라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명예롭게’ 전투에 임하고 패하라는 지지자들의 열망마저 이뤄줄 수 있는 일거양득의 효과도 있다.

또 박근혜 정부 시절 새누리당 대표까지 지낸 이 의원 정도의 이력이면 누군지도 모르는 후보와 표가 갈려 패배했다는 변명마저 봉쇄하는 효과가 있다.

황 대표는 고심이 깊다. 김형오 한국당 공천관리위원장이 TK물갈이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며 50% 컷오프 이야기까지 공공연히 오가고, 중진 의원들을 향해 수도권 험지 출마를 요구하면서 정작 본인이 ‘다른 험지’를 찾는다면 비판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미 정의당은 황 대표의 타지 출마 소식이 전해진 것과 관련해 “이렇게 간 보다가 줄행랑 놓을 거면 험지출마 약속은 왜 했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다만 당 내부에서는 황 대표가 종로 출마를 결정했지만 공식 선언을 보류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혁신통합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보수 통합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종로 출마를 선언하기 보다는 통합 논의가 일단락 된 뒤에 종로 출마 축포를 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다.

 

스페셜경제 / 김수영 기자 brumaire25s@sp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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