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 세탁기 고발 영상보고 ‘충격’…신경영으로 삼성 혁신 이끌어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자” 변화 독려…IMF에도 성장세 지속
“질 위해 양 포기해도 좋다” 불량 발견 시 생산라인 가동 멈춰
학력·성별·직종 차별 없애…능력제 도입해 전문가·여성인력 양성
중소기업과 상생에도 노력…국내 스포츠 발전 위한 지원군 역할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경영권 승계 의혹·X파일 등으로 곤혹도

[스페셜경제=변윤재 기자] 한국 재계의 큰 별이자 삼성을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시킨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타계했다. 향년 78.

 

삼성의 성공신화를 쓴 경영인이자 기술·품질을 강조한 사업가, 인재경영에 앞장선 경영가이자 대한민국 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한 지지자, 더불어 사는 삶을 꿈꿨던 이상가...이건희 회장은 한국 재계에 남긴 족적만큼 그의 생애는 파란만장했다.

 

1987년 경영권 승계까지 아찔한 순간 여럿

 

194219일 대구에서 태어난 이 회장은 호암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의 35녀 중 일곱 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이병철 회장은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서 청과·건어물 무역회사인 삼성상회를 경영해 삼성 창업의 기틀을 닦았던 때였다. 이건희 회장은 경남 의령 본가에서 할머니 손에서 길러지다가 1945년 해방 이후 가족들과 만났다.

 

1961년 선진 경영 문화를 배우라는 부친의 엄명을 받고 유학길에 올라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를 거쳐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과 매스커뮤니케이션을 배우며 견문을 넓혔다.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와 1966년 동양방송에 입사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결혼 후 삼성 비서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룹의 경영권을 물려받은 장남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이병철 회장의 눈 밖에 나면서 이 회장은 후계자로 떠오르게 된다. 1977, 이병철 회장이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회장이 후계자임을 공식화하고 이듬해 삼성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1987년 이병철 회장이 타계해 삼성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을 때까지 그는 아찔한 순간을 여러번 겪어야 했다. 1982년에는 양재대로에서 덤프트럭과 교통사고가 나 아찔한 순간을 넘기기도 했다.

 

반대 뿌리치고 반도체 투자…초격차 삼성 밑거름

이 회장은 삼성을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키를 쥔 27년 동안 삼성의 근본적 변화를 이끌었다. 안으로는 경영 혁신을 통해 그룹의 문화를 바꿨고 반도체와 휴대전화, 가전 등 성장 동력을 육성해 삼성을 내수 소비재 기업에서 세계 굴지의 IT기업으로 키웠다

 

이 회장이 처음 주목한 것은 반도체였다. 1970년대 미국 실리콘밸리를 누비며 하이테크 산업 진출을 모색하던 이 회장은 한국반도체 인수를 추진했다. 당시 파산 직전의 한국반도체 인수를 모두가 반대했었다. 일본의 기업 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통해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기술식민지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사비로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한 데 이어 실리콘밸리를 드나들며 선진 기술을 들여오는 데 공들였다. 이후 삼성은 198671메가 D램 생산을 시작으로 199264메가 D램을 세계 최초로 생산하며 반도체 초격차 신화를 쓰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이 회장이 선택한 성장 동력은 휴대전화였다. 그는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온다1990년대 초반 휴대전화 사업에 진출했다. 산악지형이 많은 지형 특성을 감안해 어디서나 잘 터진다는 의미의 애니콜브랜드를 선보인다. 19958월 마침내 애니콜은 51.5%의 점유율로 국내 정상에 올랐다. 전세계 휴대전화 시장 1위인 모토로라가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1등을 빼앗긴 것이다. 이후 삼성 애니콜은 국내 휴대전화 시장에서 강자로 군림하며 현재 스마트폰 기술의 초석을 닦았다.

 

탁월한 안목과 승부수를 통해 삼성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저변에는 기술력이 있었다. 이를 위해 품질 강화와 인재 양성에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대표적인 예가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삼성의 반도체가 세계 1위에 올랐을 때는 이 회장은 하루에 3시간에서 5시간 밖에 잠이 안 왔다고 말하며 걱정을 드러냈다. 미국을 방문하던 중, 전자제품 판매점에서 삼성 제품이 먼지를 뒤집어 쓰고 진열대 구석에 있는 모습을 본 이 회장은 품질 강화 방안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불량이 생긴 세탁기 뚜껑을 손으로 깎아서 조립하는 영상이 사내방송을 통해 방영되자 이 회장은 질보다 양으로 승부해 온 관행을 뜯어 고치기로 결심한다.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현지 주재원과 주요 임직원들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고 주문했다. 이른바 신경영 선언이다. 그 뒤 이 회장은 경영 전 부문에 걸쳐 나부터 변하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대적인 혁신을 추진했다. 삼성이 초심으로 돌아가 선진 경영 시스템을 바탕으로 품질·서비스 혁신을 이뤄 전세계 선도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한 전략이었다.

 

애니콜 15만대 불태운 품질경영집념

 

특히 이 회장은 충격요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제품)불량은 암이라고 표현한 이 회장은 양과 질 비중을 아예 010으로 가야 한다. 질을 위해서라면 양을 희생시켜도 좋다고 주문했다. 삼성전자는 생산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비효율도 상당했다. 이 회장은 나사가 굴러다녀도 줍는 사람이 없고, 3만명이 만들고 6000명이 고치러 다니는 무감각한 조직이라고 강하게 질타하며 라인스톱제도를 과감히 도입했다. 생산현장에서 불량이 발생할 경우 즉시 해당 라인의 가동을 중단하고 문제점을 완전히 해결한 뒤에야 다시 가동시키도록 했다. 덕분에 1993년 전자제품 불량률은 전년 대비 30~50%까지 줄어들었다.

 

애니콜 화형식도 품질 경영에 대한 이 회장의 고집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19953월 구미사업장에서 품질은 나의 인격이오 자존심이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임직원 20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량 휴대전화와 팩시밀리 등 15만 대를 불태웠다. 이날을 기점으로 휴대전화 불량률이 2%대까지 떨어지게 된다.

 

이후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과감한 투자를 통해 2001년 세계 최초 4기가 D램 개발, 2007년 세계 최초 64Gb 낸드플래시개발, 2010년 세계 최초 30나노급 4기가 D램 개발·양산, 2012년 세계 최초 20나노급 4기가 D램 양산 등의 기술 초격차를 일궜다.

 

학력·성별·직종 차별 없애고 공정·능력·가능성에 집중

 

이 회장은 품질경영과 동시에 도전정신과 활력 넘치는 기업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인재경영을 집중했다. 신경영 선언을 한 그 해 1993년 하반기 신입사원 공채 전형에서 전공시험을 폐지하고 전산 기초지식과 상식, 영어 듣기 시험을 도입한 것을 계기로 공정·능력·가능성에 방점을 찍은 인사개혁을 단행했다.

 

학력과 성별, 직종에 따른 차별을 없애고자 학력 제한을 폐지하고 연공 서열 대신 능력급제로 인사제도를 바꿨다. 사내대학을 설립하고 야간대학에 진학하는 직원을 지원해 인력 역량 강화에 힘을 실어줬다. 우수 여성인력 발굴과 육성에도 적극 나섰다. 19924월 여성전문직제를 도입한 이래 소프트웨어 전문가, 지역전문가로 여성의 영역을 넓혔다. 1995년엔 장단기 어학연수 기회도 여성에게 똑같이 보장해줬고, 여성들만 입던 근무복도 자율화했다.

 

아울러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조직문화를 위해 국제화·전문화·다양화 시대게 걸맞은 인재를 확보하고 양성하기 위해 지역전문가, 글로벌 MBA 제도 등을 도입했다. 5000명이 넘는 임직원들이 이 제도를 통해 전문인력으로 거듭났다. 자랑스런 삼성인상을 실시해 현재까지도 삼성 임직원들이 창의적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동기 부여를 하고 있다.

 

이 회장은 조직의 나태함을 경계했다. 일례로 1996년 연평균 17%의 성장률을 기록했을 때도 그는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해 반도체가 조금 팔려서 이익이 난다 하니까 자기가 서있는 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그저 자만에 빠져 있다고 질책했다. 오히려 내부 자만을 경계하고 장래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는 게 이 회장의 지론이었다. 삼성은 비상경영에 들어가 경영 전 분야에 걸쳐 3년 동안 원가·경비의 30%를 절감하는 한편, 한계 사업을 과감히 정리했다.

 

이 회장의 지휘 아래 DNA를 확 바꾼 삼성은 1997IMF 외환위기,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도 성장새를 이어가며 몸집을 빠르게 불렸다. 취임 당시 매출 10조원 영업이익 2000억원, 시가총액 1조원에서 무서운 기세로 몸집을 키웠다. 2018년 매출은 387조원으로 약 39배 늘었고, 영업이익도 72조원으로 359, 시가총액 역시 396조원으로 무려 396배나 증가했다.

 

이 과정에서 추격자에서 시장의 변화를 좌지우지하는 강자로 입지를 다졌다. 2006년 글로벌 TV시장에서 일본 소니를 제치고 세계 1위를 차지했고, 스마트폰에서도 애플을 제치고 1위를 달성했다. 메모리 반도체를 포함해 20여개 품목에서 1위에 오르며 삼성은 전세계 브랜드 5, ‘가장 일하고 싶은 기업’ 1위에 오르는 등 세계에서의 위상도 높아졌다.

 

상생 경영’ 사명으로국내 스포츠 지지자로 큰 역할

이 회장은 상생경영에도 공들였다. 수익을 많이 내는 것을 넘어 중소·중견기업,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사는 방안을 실현하는 게 기업의 사명이라 여겼다.

 

그는 중소기업중앙회의 유일한 연수원인 중소기업인력개발원을 지어줬고, 중소기업과 공동 기술개발을 위해 혁신기술기업협의회를 운영했다. 부품·소재를 공급하는 중소기업부터 일류가 돼야 삼성이 일류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회장의 사명은 이재용 부회장에게 이어져 삼성은 중소기업의 스마트공장 구축 등을 지원하고 있다.

 

국경과 지역을 초월하여 사회적 약자를 돕고 국제 재난 시 구호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94년 삼성사회봉사단을 출범시켜 조직적인 사회공헌활동을 전개했다. 기업으로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첨단장비를 갖춘 긴급재난 구조대를 조직, 국내외 재난 현장에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 회장의 경영철학은 임직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매년 연인원 50만명이 300만 시간 동안 자발적으로 봉사활동에 참여 중이다.

 

학창시절 레슬링, 럭비를 했던 이 회장은 스포츠계의 지지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스포츠가 국제교류와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중요한 촉매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1982년 대한레슬링협회장을 지낸 이 회장은 1993년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부회장을 시작으로 국제 스포츠계로 활동을 넓혔다. 1996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활동하며 올림픽 스폰서로 이름을 올렸다. 특히 16개월 가운데 170일을 해외에서 보내며 IOC 위원들을 설득한 결과,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기여했다.

 

한국 재계에 큰 별이었지만, 각종 수사로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1996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사면복권됐다.

 

1998년 경영에 복귀한 뒤에도 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경영권 승계 의혹에 연루됐다. 이 건은 2009년 대법원은 배임죄를 적용한 원심을 깨고 이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005년에는 삼성 X파일이 터져 특검 조사를 받았다. 차명계좌와 1000억원대 세금포탈 혐의로 이 회장은 특검에 기소되자 2008년 전략기획실 해체 등 쇄신안을 발표한 뒤 퇴진했다. 그러다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재계·체육계 건의로 200912월 대통령 특별사면을 받고 2010년 삼성전자 회장으로 복귀했다.

 

이 회장은 21세기 삼성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조직을 재정비하고 미래 사업 발굴에 노력을 기울였으나 20145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65개월 간 와병생활을 했다

 

스페셜경제 변윤재 기자 purple5765@sp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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