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출 꺼리던 과거와 달리 권위 내려놓고 거리감 좁혀
의전 생략하고 현장 스킨십…SNS 등으로 일상 공유도
“직원 반응 수집하는 데 무게…쌍방향 소통 강화 필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해 10월 서울 광화문 인근 한 대중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겸한 번개 행복토크를 열고 구성원들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 (사진 제공=SK그룹)
[스페셜경제=변윤재 기자] 과거 회장님은 벼랑 위의 꽃과 같았다. 불도저, 단상, 명령으로 대변되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그룹의 성장을 이끌었지만 공식석상에 가야 볼 수 있을 정도로 베일에 싸여 있었다. 회장님을 풍자한 개그 프로그램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을 정도로 이들에 대한 시선에는 존경과 불편의 양가적인 감정이 섞여 있었다.

 

회장님들이 달라지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얼굴을 맞댄 소통이 부쩍 늘었다는 점이다. 과거에도 간담회 형식의 내부 소통은 있었다. 다만 형식과 절차를 중시하다 보니 행사 개최에 의의를 두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의전을 빼고 대화에 집중하려는 총수들이 늘었다.

 

더 가까이현장과 스킨십 강화

 

구광모 LG 회장은 과도한 의전을 꺼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취임식을 생략했던 그는 올해 시무식도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신년사는 영상으로 대신했다. 자신을 회장이 아닌 대표로 불러줄 것을 요청하며 권위를 내려놓은 구 회장은 사업 현장을 수시로 찾는 총수이기도 하다. 임원에게 보고받는 대신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책임급 실무진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

 

DB그룹 김남호 회장도 직원들과의 교류를 중시하는 편이다. 소탈하고 소통을 중시하는 까닭에 재계의 인맥도 넓은 김 회장은 직원들에게도 총수라는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고자 먼저 다가서는 스타일이라는 평가다. 일례로 2009년 입사 초기 당진공장 근무할 때. 24시간 교대 근무하는 직원들을 위해 밤중에 치킨을 양손에 사들고 찾아가 함께 나눠 먹으며 대화하곤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역시 현장 직원들과 만나는 접점을 늘리며 스킨십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해 6월 서울 강동구 상일동 삼성물산 사옥 방문을 비롯해 충남 아산 온양사업장,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지하철공사 현장, 최근에는 반도체부문 자회사인 충남 세메스(SEMES) 천안사업장까지, 이 부회장은 현장 방문 때마다 구내식당을 꼭 들린다.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오가는 식당에서 그는 직원들과 밥정()’을 나누고 사진을 찍으며 거리감을 좁히고 있다.

 

번개·미팅...판 깔고 대화 나선 회장님

 

정의선 현대차그룹 총괄수석부회장도 직원들과의 대화에 적극적이다. 지난해 10타운홀 미팅이 대표적이다. 직원들이 그를 수부(수석부회장의 준말)’라고 부르며 회사의 방향성을 비롯해 다양한 질문을 쏟아내자, 정 수석부회장은 이들의 의견을 듣고 청년 세대의 고민을 담은 책을 권하며 다가섰다. 직원들과 악수는 기본, 함께 셀카를 찍는 스킨십으로 직원들에 다가섰다.

 

SNS는 기본, TV 광고도 접수

 

개인적 노출을 꺼졌던 과거와 달리 미디어를 활용한 소통에도 의욕적이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30만명이 넘는 인플루언서. 직접 만든 요리나 맛집을 공개하기도 하고 이마트 상품을 홍보할 때도 있다. 최근에는 TV에 간접 출연하기도 했다.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전화를 걸어 판매에 어려움을 겪는 감자·고구마 농가를 도와달라고 요청하자 흔쾌히 수락해 화제가 됐다. 이후 SNS를 통해 판매과정을 공개하며 완판은 물론 대중의 호감까지 얻었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도 미디어를 전략적으로 활용한 대표로 손꼽힌다. 그는 리니지M 광고에 연달아 출연했다. 리니지M의 무기 아이템 강화에 실패하자 욕설을 내뱉는 남성, NC다이노스의 경기가 펼쳐지는 야구장에서 리니지M을 즐기던 학생들 등 김 대표를 알아보지 못해 벌어지는 유머러스한 상황이 담겼다. 지난해에는 택진이형이라 부르는 어린이 유저에게 리니지M2 출시를 위해 일찍 일어나 일하고 있다는 광고에 목소리 출연을 했다. PC 온라인게임 시대를 열고 키운 리니지에 대한 김 대표의 애정을 간접적으로 보여줘 고객의 관심을 높였다.

 

그룹 이미지 제고 염두한 소극적 커뮤니케이션지적도

 

과거와 비교해 파격적인 행보에 나선 까닭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1997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위기를 겪으며 기업의 부침을 목격했다. 대내외 정세에 영향을 받는 한국의 경영인으로서 유연함은 무기임을 체득했다. 더욱이 5G·인공지능(AI) 등 창의성에 기반한 신기술 경쟁으로 인해 상명하복의 틀을 깰 필요성이 커졌다. 기업분석 전문 한국 CXO연구소 오일선 소장은 경영철학을 제시하고 기업문화를 선도적으로 이끌어가는 게 총수의 역할이라며 징기스칸이 구성원들과 세계 정복의 가치를 공유하고 실천했듯이 기업의 롱런을 위해서는 총수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1981년부터 2000년 사이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의 등장은 이전까지의 경영 방식을 바꿔야 할 이유가 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밀레니얼 세대 인구는 올해 기준으로 1417만명에 달한다. 인구 비중은 28.3%X세대(25.3%)와 베이비부머(25.4%)보다 많다. 경제활동 인구 중에서도 34.6%3분의 1에 달한다. 이들은 호불호가 분명하고 수평적인 소통을 중시한다.

 

다만 회장님들의 변화가 아직까지는 제한적이다. 의견 수렴이 복리후생이나 워라벨 강화 등으로 직접 연결되지는 않는 모습이다. 실질적인 소통과 연대감 강화보다는, 1고객인 직원들을 대상으로 그룹 또는 총수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데 무게를 두기도 한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운동회·산악회와 같은 과거의 일방적인 소통에서 나아갔지만 구성원의 반응을 수집하는 소극적 커뮤니케이션인 경우가 많다구성원들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양방향 소통을 강화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스페셜경제 / 변윤재 기자 purple5765@sp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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