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금 1억3000만원, 한푼도 못 받고 쫓겨날 위기의 세입자

▲K아파트 (사진=KB부동산신탁, HOP홀딩스)
[스페셜경제] “억울합니다! 저희 가족 전세금 지켜주십시오! 도와주세요.”


지난 6월 기자클럽 홈페이지에 이같은 사연의 글이 올라왔다. 글을 작성한 이는 대구시 달서구 소재의 K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는 전세 세입자 김미영(가명) 씨다.


김씨는 “평범했던 저희 가정이 KB부동산신탁 때문에 전재산 전세 보증금을 한 푼도 못 받을 지경이 됐다”고 호소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 김씨는 새누리당 홈페이지를 비롯해 인터넷 홈페이지 곳곳에 억울한 사연을 알리고 있다. 지난해 5월 K아파트에 둥지를 튼 김씨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스페셜경제>에서 진실 추적에 나섰다.


27일 법조계에 따르면 30대 가정주부인 김씨를 비롯한 K아파트(가명)에 거주하고 있는 14세대는 ‘전세보증금 반환’과 ‘사기’혐의로 KB부동산신탁에 민・형사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해 초 미분양 아파트에 전세금을 내고 입주한 이들이 불과 1년여 만에 시행사인 KB부동산신탁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배경은 무엇일까. 세입자와 KB부동산신탁 간에 첨예하게 엇갈리는 주장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돌풍 일으킨 아파트…그러나


“KB금융그룹 자회사인 KB부동산신탁이 선보인 K아파트가 전국 최초로 ‘분양가 선보장제도’를 시행해 아파트 업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미분양아파트를 고급 리모델링하고 K로 아파트 명칭을 변경하면서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지난 2009년 하반기 다수의 언론은 KB금융그룹의 계열사 KB부동산신탁(이하 KB신탁)이 시행한 K아파트가 독특한 분양조건으로 50여일만에 전체 178세대 중 97세대를 분양해 60% 이상의 실적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사실 지난 2008년 7월 유림건설(주)이 준공한 이 아파트는 입주 초반 ‘유령아파트’로 불릴만큼 분양 성적이 좋지 않았다.


입주가 시작된 지 1년이 지나도록 고작 4가구의 입주에 그치자 KB신탁은 2009년 10월 분양대행업체인 (주)HOP홀딩스(이하 HOP)와 분양대행을 체결하고 하반기부터 ‘분양가 선보장제도’, ‘부동산 중개업소와 미분양물량 1대1 호응’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미분양 아파트 털어내기를 시도했다.


시행사와 분양대행사는 부동산 시장 상황이 전국에서 가장 열악하다는 대구시에서 K아파트가 이례적인 열기를 띄고 있다며 연일 홍보에 나섰으나 100% 분양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새 아파트를 ‘전세’로 내놓고 전세난에 시달리고 있는 부동산 소비자들을 주변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유혹했다.


해당 임대 아파트 각동의 등기부등본 상 근저당권이 2억5000만원가량 잡혀있는 것이 흠이었지만 주변시세보다 약 5000만원가량 저렴하다는 점은 전셋집을 알아보던 소비자들에게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2010년 말에서 2011년 초 사이 이 아파트엔 55가구의 세입자가 1억3000만원대의 전세금을 걸고 입주했다.


근저당권이 잡혀있다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고급 리모델링 된 아파트를 시세보다 저렴하게 들어온데다 무엇보다 국내 굴지의 금융그룹인 KB금융그룹의 자회사가 시행사라는 점에서 세입자들은 안심하고 이 아파트에 ‘행복한 꿈’을 걸었다.


하지만 세입자들의 단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난해 6월 13일 역삼세무서로부터 별안간 세입자들이 살고 있는 건물이 압류됐다는 공문서가 날아왔다.


▲ 역삼세무서가 전세 세입자에게 보낸 '임차물건의 소유권이전 및 압류 사실 통보' 공문서. (사진=소비자고발 캡쳐)
‘임차물건의 소유권이전 및 압류 사실 통보’가 기재돼 있는 공문서를 살펴보면 세입자가 임차중인 K아파트는 부동산 소유권이 KB신탁에서 역삼세무서의 체납자인 HOP로 이전돼 국세체납처분절차에 따라 해당 부동산을 압류했다는 내용이다.


HOP가 부과세와 각종 근로소득세 등 국세가 13억7000여만원이 체납돼 있어 세무서에서 근저당이 잡힌 아파트에 압류를 걸은 것이다.


압류 사실도 황당한데 세입자들을 더욱 충격에 빠뜨린 대목은 임대건물의 소유주가 KB신탁에서 분양대행사였던 HOP로 변경됐다는 사실이다.


KB신탁 및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KB신탁은 지난 2010년 7월 HOP와 인수계약을 맺었다. 두 달 후 HOP는 아파트를 담보로 제 2금융권에서 대출을 받고 담보대출금과 세입자들의 전세보증금으로 약 360억원을 KB신탁에 납부했다. 이로써 1년 후인 지난해 6월 2일 전세 아파트 55채의 소유권은 HOP 측에 이전됐다.


그러나 국세체납과 임금체불 등으로 자금난에 처한 HOP에 압류가 가해지면서 소유권을 이전한 지 불과 10일만에 압류통보가 날아온 것이다.


HOP는 55세대 인수대금에서 발생한 매입부과세의 환급을 통해 역삼세무소에 10억3000만원을 체납액으로 충당했고 부족한 3억3400만원은 KB신탁 측에서 대신 납부해 지난해 11월 9일 국세체납으로 인한 압류를 해제했다.


하지만 HOP를 향한 채무자들의 발길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파트를 담보로 제 2금융권에서 돈을 빌린 HOP가 자금난에 시달리며 대출금 이자를 3개월 이상 연체하자 HOP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이 또다시 법원에 임의경매로 풀리게 된 것이다.


이에 전세 세입자들은 단 한 푼도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오는 10월 집을 옮기거나 경매에 나온 아파트를 매매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됐다.


그러나 1억3000만원의 전세금을 포기할 수 없는 일부 세입자들은 최근 KB신탁에 전세보증금을 반환하라며 민사소송을 걸었다. 부동산 사기 의혹으로 형사소송도 함께 제기했다.


오는 10월 중 재판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양측 간 주장은 팽팽하게 엇갈리고 있다.


이번 소송에서 논쟁이 가열되고 있는 부분은 ▲계약서 내 ‘특약사항’(소유권 이전, 계약금 반환 등) 언급 유무 ▲부실업체(HOP)에 소유권을 이전 ▲대기업 계열사의 신뢰 등 법적 문제와 도의적 문제다.


세입자 “헌신짝처럼 내던져…너무 억울하다”


소송을 제기한 세입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전세 계약 당시 KB신탁은 KB금융그룹의 자회사임을 내세워 재무건전성의 탄탄함을 내세웠다.


세입자들은 2억여원의 근저당권 설정에 불안감이 있었으나 “KB신탁이 망하면 대한민국이 망한다”, “소유권이 KB신탁에 있으니 문제될 것이 없다” 등의 부동산 관계자들의 말을 믿고 계약을 체결했다. 국내 굴지의 금융그룹 KB의 계열사니까 신뢰가 두터웠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당시 몇몇 언론사는 KB계열사의 명칭 및 로고와 유사한 노란색 ‘K’를 아파트 브랜드에 사용한 것이 주민들에게 큰 관심과 신뢰를 얻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또 당시 대기업 건설사들이 미분양 아파트를 전세로 놓고 몇 년 후 분양에 성공했던 분위기도 세입자들의 계약 결정에 한 몫을 더했다.


이렇듯 세입자들은 계약 당시 KB신탁을 믿고 전세로 입주했으나 1년도 채 되지 않아 KB신탁이 HOP 측에 소유권을 이전했다는 사실에 공분했다.


특히 계약서에는 ‘제5조, KB신탁과 전세계약을 체결한다’는 조항이 있었지만 세입자들이 한창 계약을 진행하고 있던 시점인 2010년 7월 HOP와 인수계약을 체결했다는 점에서 분노를 금하지 못했다.


이들은 “인수 사실만 알고 있었더라면 전세로 들어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라며 “KB신탁이 ‘사기’를 친 것과 다름이 없다”고 분노했다.


인수계약뿐만 아니라 지난해 6월 HOP 측으로 소유권이 이전된 사실도 세입자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일부 세입자는 입주한 지 1개월 만에 건물이 압류됐다는 공문을 받았고, 55세대 세입자들은 압류 공문서를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소유권 이전 사실을 깨닫게 됐다.


당시 KB신탁과 전세 세입자 간 체결한 계약서에는 제3자에게 매각될 경우 매수자 앞으로 소유권이 이전 될 예정이라는 내용과 별도의 세입자 동의절차 없이 임대보증금이 매수자에게 포괄적으로 승계됨을 인정된다는 특약사항이 기재돼 있다.


특약사항을 놓고 보면 KB신탁 측에 법적 문제는 없지만 세입자들은 “KB신탁이 계약서의 특약사항을 언급하지 않은 채 전세금 반환에는 이상이 없다고 안전을 보장했다”며 “잔금납부 후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잔금납부 후 ‘본 계약서’를 살펴보고 마지막 특약사항을 읽는 순간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며 “근심이 생겨 분양담당자에게 따져 물으니 ‘경매에 들어가도 당신 돈은 찾을 수 있으니 걱정말라’고 전해 이사 나가는 순간까지 문제가 발생되지 않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살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입자들이 우려하던 문제는 끝내 현실로 다가왔다. 부동산 압류사실 자체보다 이들을 더욱 분노케 한 것은 소유권이 부실업체로 알려진 HOP에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KB신탁이 국세와 관리비, 직원 급여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부실업체와 계약을 맺은 것을 두고 ‘도덕적 해이’에 빠진 몰염치한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KB신탁 측이 부실업체에 해당 아파트의 소유권을 이전함으로써 세입자들의 임차보증금을 보장받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법조계와 세입자에 따르면 HOP는 수년째 국채를 미납했고 최근 신용평가에서 C+로 자금회수 의문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재무건전성에 빨간불이 들어온 상태다.


또 근무하는 직원들의 급여를 주지 못해 고발을 당하고 대표이사가 살고 있던 건물은 경매로 소유자가 변경되는 등 ‘부실기업 딱지’가 붙여진 기업이라고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결국 소유주 HOP의 국채미납과 대출금 이자 미납으로 세입자들은 전세금 한 푼 돌려받지 못한 채 길거리로 내몰리게 됐다.


문제가 불거지자 지난해 HOP 관계자는 세입자와의 대화에서 “(인수계약 체결당시) KB신탁에서 우리 회사의 재정상태를 이미 알고있었다”며 “KB신탁 측에 소유권 이전을 미루면 안 되겠냐고 말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고 말해 KB신탁 측으로 책임을 전가했다.


이에 14세대는 KB신탁을 전세보증금 반환과 사기 혐의로 소송을 제기하고 오는 10월 소송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피같은 재산 1억3000만원을 포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매달 100여만원의 대출금 이자를 내며 아파트를 구입할 여력도 이들에게는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번 소송을 통해 KB신탁의 ‘사기전세분양’ 의혹과 ‘부도덕한 행태’를 고발해 재산상의 불이익을 받지 않고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는 것이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시행사 “특약사항에 기재…충분히 설명했다”


세입자들의 절절한 사연과 달리 시행사 KB신탁 측은 사정은 안타깝지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특히 ‘사기전세분양’ 의혹에 대해서는 발끈하며 사실무근이라고 일축했다.


KB신탁 관계자는 계약 당시 임대물건의 매각 및 임대차보증금 반환에 대한 특약사항을 충분히 설명했다고 주장한다.


관계자는 “특약사항은 서명란 바로 위에 굵은 고딕체로 기재돼 있어 보지 않을 수가 없다”며 “전세민들에게 충분한 설명 끝에 입주를 시켰다”고 반박했다.


그는 “특약사항을 알려준 뒤 ‘판단은 알아서 하시라’고 전하면 계약을 해지한 사람도 있었고 고민을 하다가 다음날 계약을 하러 온 사람도 있다”며 “소송을 진행하는 세입자가 들은 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관계자는 입주 당시 세입자들에게 HOP와의 계약을 말하지 않았다는 지적에 대해 “특약사항에 제3자와 매각이 진행될 것이고 별도의 동의절차 없이 소유권 이전된다는 항목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분양대행사가 대행을 하면서 일정기간 미분양세대를 분양할 수도 있고, 임대해놓은 상태에서 계약해지도 될 수 있다”며 “인수 계약 이후 변수가 산재해 있기 때문에 반드시 HOP가 소유권을 갖는다는 보장이 없다. 따라서 제 3자 혹은 위탁자라는 표현을 쓴 것일 뿐 매각 사실을 알리지 않고 일을 진행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또한 “HOP와 인수 계약을 맺을 당시에는 국세 체납 사실이 없었다”며 “인수 대상을 물색해 재무상태를 확인하고 HOP를 택했는데 인수 이후에 재무구조가 악화된 것”이라고 말했다.


KB신탁이 HOP의 재무상태를 알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당시 문제가 불거지면서 양사간 관계가 좋지 않아 (잘못된)말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KB신탁이 전세금 반환의무가 HOP 측에 있다는 것을 세입자에게 충분히 설명했고 특약사항란에도 ‘소유권 이전 후 임대차보증금 반환청구는 매수자에게 하기로 하며 KB신탁에는 반환청구를 할 수 없다’는 문구가 기재돼 있음을 알렸다.


KB신탁은 이처럼 법적으론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부동산 압류 이후 세입자의 항의가 끊이지 않자 도의적인 차원에서 임차인들에 한해 최초 분양가(4억5000~4억7000만원)의 48%(2억~2억2000만원)로 미분양된 주택의 할인을 실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아파트의 계약에는 ‘전세 보증금 반환 요청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이 붙는다. KB신탁으로썬 인심 쓰는 듯 보이지만 세입자로썬 전세보증금을 날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아파트의 현재 시세가 3억5000~3억7000만원인 점을 감안하면 현 시세보다 1억5000만원을 할인받아 집을 장만할 수 있는 기회이지만 사실상 새로이 2억원이 넘는 돈을 마련해야 하는 세입자로썬 ‘그림의 떡’인 셈이다.


이처럼 강제분양의 덫에 빠졌다고 주장하는 세입자와 위험성을 충분히 알렸으니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시행사 간 공방이 벌어지며 양측 모두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다. 오는 10월 소송의 결과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주장이 접점을 찾을 수 있을까. 전세자금을 잃은 세입자의 울부짖음이 법정을 향해 메아리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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